Depot of Jeju azbang

제주아즈방의 이런 저런 여러가지 관심사 창고

🤍 文 學 237

'혼(魂)으로 쓰는 글' / 반숙자

혼으로 쓰는 글 / 반숙자 들녘에 피어나는 들국화는 피고 싶어서 핀다. 꽃더러 왜 피느냐고 묻지 말라. 살아 있음의 가장 확실한 모습임을.....내가 수필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다.어느 시인은 나에게 가슴으로 오는 소리를 듣고, 가슴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라고도 하고, 어느 분은 혼(魂)으로 쓰는 글이라고 한다. 삭여 보면, 본능적인 욕구의 표현 행위로 보는 것이 아닌가 싶다.작가가 작품을 쓸 때 그는 곧 자신의 생명을 피우는 작업이라 생각한다. 수필이라는 나의 꽃은 암울했던 시기에 구원의 손길로 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작가가 된다거나 지면에 발표하려는 꿈을 갖지 못하고 살아가는 과정에서, 부딪히는 고통이 글을 쓰게 하였고, 그렇게 함으로써 살아날 수 있었다.누구에게 기대어 위로받고 싶거나, 스스로 무너..

'사람 사이의 틈' / 이해인

사람 사이의 틈 / 李海仁 아파트 사이사이 빈 틈으로 꽃샘 분다 아파트 속마다 사람 몸 속에 꽃눈 튼다 갇힌 삶에도 봄 오는 것은 빈 틈 때문 사람은 틈 새 일은 늘 틈에서 벌어진다. 김지하 시인의 『중심의 괴로움』이란 시집을 읽다가 만나게 된 ‘틈’이라는 이 시가 요즘 내 마음 안에서 떠나질 않는다. 창 틈으로 스며들어 오는 햇빛, 달빛, 바람, 높은 산에서 바위 틈을 비집고 돋아나는 아름다운 들꽃, 우리 집 장독대 옆, 눈에 잘 띄지도 않는 좁은 돌 틈을 비집고 무성하게 자라나는 풀들, 그리고 바쁘게 일을 하다 잠시 쉬어보는 시간과 시간 사이의 틈, 하루에도 수없이 어떤 틈들과 만난다. 자연과 일상의 시간 사이에 어떤 틈이 있듯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틈이 있다. 상대방을 넉넉히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

应是绿肥红瘦 / 초록은 살이 찌고 붉은 빛은 야위어가니

초록은 살이 찌고 붉은 빛은 야위어가니... 야반(夜半)의 풍우(風雨)에 해당화 질 것을 걱정하는 마음 천 년 전 중국에 글재주가 대단히 뛰어난 재녀(才女)가 있었다. 우리로 치면 황진이 격이라 보시면 되겠다. 그녀에게 어느 날 이런 詩想(시상)이 떠올랐다. 가까운 사람과 간밤에 술자리를 펼치고 정담을 나누었지, 창밖엔 밤새 비바람이 쳤지, 비는 적었으나 바람이 세차게 불었었지, 바깥은 을씨년스럽고 술자리는 따뜻했으니 분위기는 더욱 좋았지. 얘기 나누던 중에 잠시 걱정이 스쳐갔지, 바람이 세차니 뜰에 핀 초여름 해당화 붉은 꽃이 저러다 다 지고 말 것 같다고. 새벽녘 친구는 돌아가고 깊은 잠에 들었는데 문득 밝은 빛이 느껴져서 눈을 떠보니, 시중드는 아이가 창에 드리운 햇빛 가리개를 걷고 있더군, 몸을 ..

'구수하고 시원한 된장국과 생태찌개' / 유혜자

구수하고 시원한 된장국과 생태찌개 / 유혜자 어느 명사가 일류음식점에 손님들을 초대하고, “보잘 것 없는 음식으로 모셔서 죄송합니다만 많이 드십시오” 했다. 그 말을 들은 음식점 주인이, “지금한 말 취소하십시오. 우리 집 음식은 시내에서 가장 맛있다고 소문난 집입니다.”고 항의했다 한다. 내가 소개하고자 하는 신선한 배추 넣은 된장국과 생태찌개도 맛은 좋지만 평범한 음식이다. 그러나 ‘보잘 것 없는 음식’이라고 폄하하면 아마 그 음식점 주인도 화를 낼 것이 분명하다. 정동, 러시아공사관 건물 한쪽이 남아 있는 광장에서 신문로로 나오는 골목에 야트막한 한식집이 있었다. 점심시간이면 샐러리맨들로 꽉 차서 문 바깥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때는 고층빌딩이 가려 있지 않아서 멀리 보이는 인왕산..

'채송화 이야기' / 김진수

채송화 이야기 / 김진수 참 이상한 일이다. 글이 손에 잡히지 않으면 괜히 불안하다. 계절이 자꾸 지나건만 도대체 글이 잡히지 않는다. 그러던 가을 어느 날 밤이었다. 서재에 불을 끄고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는데 책상 위에 걸린 액자 하나가 어렴풋이 눈에 들어왔다. 문단 데뷔 기념으로 선물 받은 채송화 액자였다. 누가 밀어올린 걸까. 돌각사리 틈 사이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액자 속의 채송화. 불을 켜자 수줍고 해맑은 어린 소녀같이 까르르까르르 색동웃음을 마구 토해내는 것 같다. 밤하늘 은하의 별무리 같기도 하고, 어느 여왕이 보석상자를 엎질러 놓은 것 같기도 하였다. 나는 곧바로 컴퓨터 창을 열었다. 옛날 페르시아에 보석을 좋아하는 여왕이 살았다. 얼마나 보석을 좋아했는지 자신의 백성들과 보석을 한 개씩..

'어머니의 강' / 김애자

어머니의 강 / 김애자 강가에 차를 대고 입적(入寂)하신 듯이 잠든 어머니 얼굴을 들여다본다. 세수 92세가 되고부터 염주도 놓고,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침이 마르도록 읊으시던 귀거래사도 잊으셨다. 어머니의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던 삶의 숱한 편린들이 삭제되어버린 이후, 그분은 그저 먹고 자는 원초적인 본능에 따라 무위로 움직일 뿐이다. 사람이 과거의 기억에서 놓여난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뇌 세포가 거반 손상된 어머니는 살아있으되 살아 있는 자가 누려야할 모든 권리를 상실하였다. 무심무념(無心無念)의 상태에서 검불 같은 노구(老軀)도 운신하기가 귀찮고 힘겨워, 하고많은 날을 방안에서만 지내신다. 정체된 삶, 닫혀버린 시간 속에서 아무런 의미도 느끼지 못한 채 겨울을 건너 이 봄날, 강가에 나오시었다...

'소찬(素饌)' / 남해진

보온밥통 뚜껑을 열고 공깃밥을 뜬다. 정수기 찬물을 내리며 몇 번 가신다. 두레박으로 퍼 올린 우물물에 말아 먹던 꽁보리밥 맛이랴. 장독 속에서 누렇게 숙성된 된장을 떠올리며 풋고추로 쌈장을 찍는다. 밑반찬도 동나고 입맛도 깔깔하다. 배는 허전한데, 먹어도 그만 안 먹어도 그만이라는 어정쩡한 생각이 들 때, 담백하고 개운한 뒷맛에 끌려 혼자 먹는 점심(點心)이다. 우량아로 태어났다 하나 잔병치레를 하도 많이 해서 그랬는지 어릴 때 나는 골골했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음식을 대하면 괜히 트집을 잡았다. 입이 짧아 두 살 위아래 누나나 여동생 몰래 챙겨주시던 고기반찬도 비위에 거슬려 마다하고는, 김치나 나물반찬에 젓가락을 대며 깨작거렸다. 그뿐 아니라, 어머니가 만든 음식이 아니면 꺼림직한 생각이 들어 아예 ..

Coffee 이야기

6~70년대의 다방에서는 커피라고는 한 종류만 있었기에 손님들은 그냥 ‘커피’를 주문하면 되었다. 하기야 미국에서도 초기에는 우리와 비슷해서 모든 종류의 커피를 그냥 조(Joe)라고 불렀으며, 한 잔의 커피란 뜻의 ‘한 컵의 조’(a cup of Joe)라는 숙어도 있었다. 다방이 아닌 요즘의 커피전문점 ‘cafe'에서 coffee 메뉴판을 보면 커피 종류가 다양하고, 그 이름이 하나같이 복잡하고 어렵다. 에스프레소 (Espresso)는 ‘진한 커피’로, 아메리카노 (Americano)는 ‘연한 커피’로, 카페라떼 (Caffe Latte)는 ‘우유 커피’로, 카푸치노 (Cappuccino)는‘거품 커피’ 등으로 불러지면 좋을 텐데.... 다방에서 Café로 세월 따라 이름도 변해감에, 한 때 옛날 다방을..

'오아시스와 신기루' / 변해명

내가 실크로드를 다녀온 지 10년이 지나고 있지만, 아직도 명사산(鳴沙山) 월아천(月牙泉)의 사진을 보면, 그 신비하고 불가사의한 오아시스와 신기루가 지워지지 않는다. 해발 1.800m에 위치한 사막의 오아시스, 그 오아시스가 있는 명사산은 바람에 모래가 가각거리는 소리가 새소리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사방이 금모래로 덮인 모래 산이요, 바람이 불면 그 모래들이 출렁이며 움직여서, 금방 자른 모습의 모래 산을 만들어 놓는데도 월아천만은 어떤 바람이 불어도 모래가 밀려오거나 장소의 변화가 바뀌지 않고 작은 오아시스로 모래산 속에 몇 천 년을 그렇게 있는 것이다. 월아천은 초승달의 어금니 같다고 붙여진 이름인데, 초승달처럼 휜 작은 호수에 물이 고여 있는 것이다. 둘레로 몇 그루의 나무들이 자라고, ..

從心所欲不踰矩(종심소욕불유구)

공자는 자신의 일생을 돌아보며, “70대에 이르러서는 마음 내키는 대로 행해도 법도에서 벗어남이 없었다”라고 말했다. 대단한 자부심이다. 모든 생각이 자연의 순리와 완전히 부합했기 때문에, 생각 내키는 대로 행해도 법에서 벗어남이 없게 된 것이다. 장자의 ‘소요유(逍遙遊)’나 불가(佛家)의 ‘해탈’과 다르지 않은 절대자유의 경지이다. 중국 송나라 때 시인 황정견(黃庭堅·1045~1105)은, 도연명(陶淵明)과 두보(杜甫)의 시, 그리고 한유(韓愈)의 만년 문장 등을 평하여, “불번승삭이자합(不煩繩削而自合)”, 즉 “번거롭게 먹줄 치고 대패질하여 깎아내지 않아도 저절로 부합하는” 경지라고 했다. 최고 수준의 목수는 목재를 다듬을 필요 없이 천연 그대로도 용도에 딱 맞게 사용하는데, 도연명·두보·한유의 시와..

逍遙遊(소요유)

(莊子) 사상의 중요한 특징은 인생을 바쁘게 살지 말라는 것이다. 하늘이 내려준 하루하루의 삶을 그 자체로서 중히 여기고 감사하며 고마운 마음으로 살아야지, 하루하루를 마치 무슨 목적을 완수하기 위한 수단인 것처럼 기계적 소모적으로 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장자는 우리에게 인생에 있어서 ‘일’을 권하는 사람이 아니라 ‘소풍(逍風)’을 권한 사람이다. 우리는 ‘일’하러 세상에 온 것도 아니고, ‘성공’하려고 온 것도 아니다. 그런 것은 다 부차적이고 수단적인 것이다. 우리 모두는 과거 생에 무엇을 잘했는지 모르지만, 하늘로부터 삶을 ‘선물’로 받은 것이다. 이 우주에는 아직 삶을 선물로 받지 못한 억조창생의 ‘대기조’들이 우주의 커다란 다락방에 순번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최소한 당신과 나는 이 삶을..

有短取長(유단취장)

有短取長(유단취장) 성호 이익 선생 댁의 마당에 감나무가 두 그루 있었다.한 그루는 대봉 감나무지만 일년에 겨우 서너 개 열렸고, 다른 그루는 많이 열리지만 땡감나무였다.그 감나무들 때문에 마당에 그늘도 많아지고 장마 때면 늘 젖어있어 마당이 마를 날이 없었다.​둘 다 밉게 여긴 성호 선생이, 톱으로 한 그루를 베어 내려고 두 감나무를 번갈아 쳐다보며 오가고 있었다.​그때 부인이 마당에 내려와 말하였다.​"이 나무는 비록 서너 개라도 대봉시라서 조상 섬기는 제사상에 올리기에 좋죠.​ 저 나무는 땡감이지만 말려서 곶감이나 감말랭이 해두면 우리 식구들 먹기에 넉넉하죠"​그러고 보니 참 맞는 말이었다.성호 선생은 둘 다 밉게 보았고, 부인은 둘 다 좋게 보았던 것이다.밉게 보면 못났고, 좋게 보니 예쁜 것 이..

노인의 '다섯가지 좌절'과 '여섯가지 즐거움'

다섯가지 좌절 낮에는 꾸벅 꾸벅 졸지만 밤에는 잠이 오지않고, 곡할 때는 눈물이없고, 웃을 때는 눈물이나며, 30년 전 일은 기억하면서, 눈 앞의 일은 돌아서면 잊어버리고, 고기를 먹으면 이빨 사이에 다 끼고, 뱃속에는 없고, 흰 얼굴은 검어지는데, 검은 머리는 희어지네. - 星湖 李瀷(1681~1763) 여섯가지 즐거움 대머리가 되니 빗이 필요치 않고, 이가 없으니 치통이 사라지고, 눈이 어두우니 공부를 안해 편안하고, 귀가 안들려 세상 시비에서 멀어지며 붓 가는대로 글을 쓰니 손 볼 필요가 없으며 하수들과 바둑을 두니 여유가 있어 좋다. - 茶山 丁若鏞(1762~1836)

'우상(偶像)의 눈물' / 구활

우상의 눈물 / 구활 간밤에 어머니가 오셨다. 무슨 일로 오신 걸까. 이렇다 할 우환도, 특별한 걱정거리도 없는데, 온종일 궁금했다. 꿈속 방문의 이유를 몰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최근 행적을 되짚어 보니 그럴 한한 꼬투리 하나가 잡혔다. 아하, 이것 때문에 오신 것이로구나. 저승에서도 아버지와 한 집에 살고 계시다면 이런 저런 시중드시느라 몹시 바쁘실 텐데. 나는 일곱 명이 한 달에 한 번 점심을 먹는 모임의 늦깎이 회원이다. 예술을 전공하거나 애호가들로 구성되어 있어, 화제는 문학, 음악, 미술, 조각, 공연, 건축, 음식 등으로 무척 다양하다. 조각하는 분이 “회원들의 흉상을 제작하여 전시회를 열 때 작품으로 내 놓겠다”고 했다. 회원들이 수긍하는 걸로 일단 결론이 났다. 나는 엉거주춤한 상태..

座右銘(좌우명)

좌우명(座右銘)이라는 단어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좌우명이라는 단어의 유래와 그 참 뜻을 아는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다.좌우명(座右銘) 이라는 단어를 글자그대로 해석하면, “오른쪽 자리에 새겨 놓은 명언”이다.이는 삶의 귀감이 되는 금언을 항상 옆에 두고, 그 뜻을 새기며 살아간다는 말이 된다.이런 좌우명은 고대 중국 후한(後漢)의 유학자이자 문장가 최원(崔瑗, 77~142년) 으로 부터 유래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는 스스로 지켜야 할 금언을 칼로 새겨 자신의 책상 오른쪽에 놓고, 평생 동안 되새기며 살았다고 하는데,좌우명이라는 말은 거기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이다.그 당시 최원이 새겨 놓았다는 좌우명 19개 95자는 다음과 같다.     ▶ 紀綱(기망) : 그물의 끈. 나중에는 강..

'요행수(僥倖數)' / 백남일

내 신접살림은 한강이 한눈에 내려다 뵈는 금호동 산등성이, 그것도 셋집 단칸방에 틀었다. 자고새면 물통을 들고 동네 초입 저지대에 있는 공동 수돗가로 내달아야만 했는데, 그때 턱밑으로 유유히 흐르고 있는 강물은 숨찬 갈증을 풀어주곤 했다. 사는 일 그렇게 고되고 몸에 부쳤어도, 내 집 마련의 꿈에 부풀었기에 늘 긍정의 몸짓으로 하루하루의 삶을 아귀차게 엮어나갈 수 있었다. 그렇게 만 7년의 세월이 흘렀다. 셋째 막둥이가 태어나던 그 해, 오매불망 그리던 새집 대문간에 내 이름 석 자의 문패를 달 수 있었다. 비록 삼간 슬래브 서민 주택이었지만, 두 다리 쭉 펴고 평생소원이었던 내 명의의 주택에 몸을 눕히니 세상 부러울 게 없었다. 여우도 편히 쉴 수 있는 감춰둔 굴이 있고, 허공을 나는 새도 내려와 앉을..

'걸레' / 안병태

걸레 / 안병태 여덟 폭 차곡차곡 접은 타월로 방을 닦는다. 방 두 개까지는 조신하게 잘 닦았으나 세 개째부터는 게으름도 나고 무릎도 아파, 초등학생 시절 교실 마룻바닥 닦던 자세로 좌르르 냅다 달리면서 방을 닦다가, 안주인으로부터 잔소리를 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눈치껏 건성건성 날치기로 닦는다. “이놈아 그게 무슨 짓거리냐, 마음 속 먼지를 닦듯 법당바닥을 닦아라!” 문득 소백산 도솔암의 노스님 호령소리가 들린다. 사십 년 전 그때 법당바닥 닦던 자세 역시 엉덩이로 하늘을 찔렀었나보다. 법당바닥과 마음바탕이 둘이 아니라는 진리를 깨닫기는커녕, 새벽 세시 기상만은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입산한 지 보름 만에 퇴출당해 하산하고 말았었다. 사십 수년 세월을 훌쩍 건너온 지금, 그 시절 그 노승의 꾸중을 이..

'군불을 지피며' / 백남일

불을 땐다. 아궁이에 화목을 밀어넣고 잎나무 불쏘시개로 불을 사른다. 이때 불씨가 자리 잡을 때까진 불집을 쑤석거려선 안 된다. 세상사 어디 뜸들이지 않고 되는 일 있던가. 쌍 도리 채운 남향받이 육간 생가. 칠남매가 성장하여 대처로 떠나고, 이제는 적막공산에 홀로 앉아 그 옛날의 번화를 반추하고 있다. 장손의 책무가 아니더라도 도심의 소음으로 귀가 먹먹해질라치면, 나는 지체 없이 고향으로 향한다. 하루가 다르게 변모하는 첨단 문명의 소용돌이에 표류하는 자존을 붙들기 위해, 벼 배동서는 논두렁길을 걷는다. ​ 아궁이에 불을 지핀다. 빈 솥에 물을 붓고 군불을 때는 것이다. 달포 가까이 비워둔 휑한 아궁이가 불길을 선뜻 받아들이질 못한다. 그러나 마른나무에 불이 붙고 불목이 덥혀지기 시작하면, 마른갈이 논..

'숭늉' / 백남일

내 단골 밥집은 식사 뒤면 으레 숭늉을 내놓았다. 눌은 밥물이 다색으로 우러난 구수한 뒷맛이 좋아 나는 종종 그 집을 찾는다. 숭늉은 밥을 푸고 난 뒤 물을 조금 붓고 끓인 숙수(熟水) 또는 숙랭(熟冷)을 뜻하는 순수 우리말이다. ‘계림유사(鷄林類事)’에선 숙수를 '熟水曰泥根沒'-이근몰(익은물)이라 칭했는데, 숙랭은 처음 ‘슉랭’으로 표기했다가 후에 ‘숭늉’으로 변했다는 게 언어학자들의 공통된 견해이다. 그런데 요즘은 전기밥솥 사용이 보편화 돼서 숭늉 맛을 볼 기회가 줄어들어 아쉽기 그지없다. 과거 우리의 취사방법은 아궁이 위의 부뚜막에 무쇠 솥을 걸고 밥을 지었다. 이때 솥 바닥에 눌어붙은 누룽지를 처리하기 위해 물을 두르고 한소끔 불을 지피면 꿀물 빛 숭늉이 되었다. 중국에선 밥을 지을 때 물을 많이..

'애음산필(愛飮散筆)' / 백남일

내가 술잔을 입에 대기 시작한 건 갑년(甲年)이 지나서였다. 소싯적엔 밀밭만 스쳐도 얼굴이 화끈대는 것 같아 술과는 인연을 맺지 못했다. 더구나 아버님이 간경화로 일찍 타계하신 그 원인이 알코올 중독에서 비롯됐기 때문에, 나로선 술이 저주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종갓집 기제사는 어찌도 그리 자주 찾아오던지, 아랫목에 들여 논 술독에서 뽀르륵 소리가 나기 시작하면 애주가이신 당신은 기다렸다는 듯, 용수 박아 웃국을 시음하시곤 했다. 지금도 향가(鄕家) 대숲에 오르면, 일제말의 악랄한 수탈 행위의 눈길을 피해 파 놓은 밀주 항아리 구덩이가 피압박 민족의 아린 상흔(傷痕)으로 남아 있다. 그땐 밀주 단속반원과 산림감수가 서낭당 재빼기에 나타났다 싶으면 온 동네 사람들의 입술이 퍼렇게 질려버리고 말았다. ..

'막내의 아르바이트' / 목성균

막내의 아르바이트 / 목성균 막내가 바캉스 비용을 벌기 위해서 삼복염천에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공사장 잡부 일이다. 첫날 저녁때, 일을 마치고 돌아온 녀석은 괴멸된 전선에서 생환된 병사 만치 지쳐 있었다. 아내는 녀석에게 선풍기를 틀어 주고 냉 꿀물을 타서 먹이고, 한바탕 소란을 피웠다. 아무리 모성본능이라 해도 너무 호들갑을 떤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고마웠다. 요즈음 녀석이 제 친구들과 전화 연락이 잦은 것을 엿들었다. ‘동해안이 좋을까? 남해안이 좋을까?’하는 걸로 보아서, 바캉스 계획을 음모 중이라는 걸 알았다. 그런데, 저 녀석이 바캉스를 간다고 손을 벌렸을 경우, 선뜻 바캉스 비용을 줘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가 문제였다. 자식이 태양이 작열하고 푸른 파도가 넘실대는 여름 해변에 가서, 젊..

'닭개장' / 안도현

닭개장 / 안도현. 여름이 되면 슬며시 당기는 음식이 닭개장이다. 음식점에선 좀체 맛볼 수 없다. 이건 우리 어머니의 주특기 요리 중 하나다. 닭개장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어릴 때부터 어머니 옆에서 유심히 지켜봤다. 지금은 나도 마음먹으면 거뜬하게 끓여낼 자신이 있다. 닭은 집에서 키운 놈이 좋다. 푹 삶아서 식힌 뒤에 뼈에서 발라낸 살을 잘게 찢어 준비해 둔다. 고기가 귀하던 시절, 이걸 한 솥 끓이면 우리 집 여섯 식구가 두 끼는 먹을 수 있었다. 그건 닭개장에 넣는 채소와 국물 덕분이다. 닭고기와 채소의 절묘한 결합이 닭개장의 맛을 결정한다. 무시래기나 배추시래기를 반드시 넣어야 하는데, 나는 부드러운 배추시래기가 더 좋다. 마른 토란대와 고사리를 미리 삶아두는 것도 필수다. 숙주나물을 씻어 놓고 ..

'留別'(유별) / 鄭之升

留 別 鄭之升 細草閒花水上亭 세초한화수상정 가는 풀, 한적한 꽃 피어 있는 물가 정자 綠楊如畵掩春城 녹양여화엄춘성 푸른 버들 그림 같이 봄 성을 둘러있고 無人解唱陽關曲 무인해창양관곡 누구 하나 나를 위해 이별곡(양관곡) 불러줄 이 없고 只有靑山送我行 지유청산송아행 푸른 저산이 말없이 내 갈 길을 보내주는구나 鄭之升(정지승. 1550-1589)은 평생 은거생활로 일관했고, 출사에 관심이 없었으나 시로써 세상에 명성을 날렸다.

'黃龍江遭雨, 以荷葉裏奴頭'

黃龍江遭雨, 以荷葉裏奴頭 황룡강조우, 이하엽리노두 황룡강에서 비를 만나 연잎으로 하인이 머리를 감싸다 連江驟雨動輕瀾 연강취우동경란 강물 위 비 퍼부어 잔물결 일고 細葛初霑六月寒 세갈초점육월한 가는 베옷 비에 젖어 유월인데도 춥네 倦客行裝多勝事 권객행장다승사 지친 나그네 행장에도 좋은 일 많으니 馬前僮僕盡荷冠 마전동복진하관 말 앞의 하인들이 연잎 모자 다 쓴 것이라네 강항(姜沆·1567~1618)의 시 ‘黃龍江遭雨, 以荷葉裏奴頭’(황룡강조우, 이하엽리노두) (황룡강에서 비를 만나 연잎으로 하인이 머리를 감싸다)로, 그의 문집 ‘수은집(睡隱集)’에 있다. 강항은 좌찬성 강희맹의 5대손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 활동을 하다 일본으로 붙잡혀 갔다 탈출한 문인이다. 비가 퍼붓자 강의 물결이 일렁인다. 6월인데도 베..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 / 원영

해우소(解憂所)에 앉아 근심을 풀고 내다보니, 창문 너머로 연보랏빛 오동꽃이 곱게 피었다. 옛날에는 딸을 낳으면 오동나무 한 그루를 마당에 심었다가 딸이 커서 시집갈 때,그 나무로 가구를 짜 보냈다던데, 암자 뒤꼍에 웬 오동나무가 있나 싶다. 그나저나 꽃이 빨리 지는 것이 여느 해보다 짧은 봄이 되려나 보다.​이상한 것은 낙엽 지는 가을보다 꽃잎흩날리는 봄날에 무상(無常)함을 더 자주 느낀다는 점이다. 물론 그 덕분에 따스한 봄볕 아래 삶을 성찰하기도 하고, 가벼이 날리는 꽃잎 바라보며 소리 내어 시를 읽기도 한다.​하루는 절문을 닫아걸고 가까운 곳이라도 걸어볼까 하여 길을 나섰다. 스님들에게도 잠시 쉬시라 일러두고, 애틋한 망상이나 하며 먼 동네 한 바퀴 휘~ 돌기로 했다. 청허 선사는, 花落僧長閉 /..

'호랑이눈깔뺀파리' / 안도현

호랑이눈깔뺀파리 / 안도현 여름철이면 유독 극성을 부리는 놈이 있다. 이놈은 축축한 걸 좋아하는데 포유류의 눈곱을 특히 친애한다. 시골길을 걸을 때 눈가에 바짝 다가와 왱왱거리기도 하고, 소나 강아지의 눈앞에 나타나 꽤나 성가시게 굴기도 한다. 눈앞에서 기회를 엿보면서 알짱거리다가 눈 속으로 잽싸게 침투하는 기술도 가졌다. 손으로 낚아채 보지만 동작이 재빨라 좀체 잡을 수 없다. 이놈의 몸은 좁쌀만 한데, 이놈에게 당하는 괴로움은 좁쌀 한 가마는 될 것이다. 초파리인지 날파리인지, 아니면 하루살이 종류의 하나인지, 그 이름을 아는 이가 별로 없다. 하루는 이놈이 호랑이의 눈가에 나타났다. 호랑이는 대수롭잖게 여기고 눈을 껌벅거리다가 잠을 청했다. 때를 놓칠세라 이놈은 호랑이의 눈곱을 행해 돌진했다. 눈꺼..

칼럼 - '작약꽃이 아름답지만은 않은 이유'

엊그제 봄이 왔나 했더니 오월 하순, 벌써 초여름이다. 에, ‘비 온 끝에 볕이 나니 날씨도 청화하다. 떡갈잎 펴질 때에 뻐꾹새 자주 울고 보리이삭 패어 나니 꾀꼬리 소리 한다. 농사도 한창이요, 잠농도 방장이라. 남녀노소 골몰하여 집에 있을 틈이 없어 적막한 대사립을 녹음에 닫았도다’ 라더니, 요즘 마을에서 사람 구경하기 어렵다. 농사일은 때가 있으니 못자리를 준비하고 콩이며 깨를 심고, 제법 자란 고추와 마늘 밭의 풀을 뽑고, 과일나무 적과한다고 온 마을이 쥐 죽은 듯 고요하다. 고향으로 돌아와 두어해 농사를 해보니 여의치 않아 꾀를 낸 것이 작약농사다. 옛날부터 작약은 관상용이자 의약품으로 재배해왔다. 근래에 바이오산업과 건강기능성 식품시장의 전망이 밝겠다는 판단과 함께, 의성 작약이 한때는 전체 ..

'느림보 산행' / 이윤애

느림보 산행 우리 부부는 시간이 날 때마다 둘이 산에 다니기를 참 좋아한다.물론 처음에 우리 부부가 산행을 시작할 때, 참 웃지 못 할 일들이 많았다.우선 내가 그렇게 걷기를 좋아하는 편이 아니고, 특히 산에 가는 일 따위는 아예 남의 일처럼 생각하는 게으름뱅이였기 때문이다. "죽어라고 땀 빼고, 힘쓰고, 애쓰며 산에 올라갔다.  그럼 거기서 살 것이지 또 죽어라고 땀 빼고, 힘쓰고, 애쓰면서 내려올 것인데,  무슨 산을 정복한다고 야단법석을 치는 것인지, 그 놈의 산, 산, 산 ... 말도 말라, 산은 산일뿐이다.  인간들에게 쉽사리 정복당할 것이라면 그렇게 턱 버티고 있겠냐. 산은 산일 뿐, 산을 정복하려고 하는 것은 인간들의 억지와 욕심에 불과하다"는 등, 괴변까지 늘어놓으며 산에 오르기를 좋아하는..

'블랙커피' / 정근식

블랙커피 / 정근식. 나는 출근을 하면 습관적으로 밀크커피를 마신다. 밀크커피와 인연은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였으니 한 이십년 쯤 된 셈이다. 오랜 습관 탓에 요즘은 설탕이 들어가 달콤하고 크림이 진한 커피 맛을 희석시킨 자판기 밀크커피가 몸에 맞춘 양복처럼 내 입맛에 꼭 맞다. 그런데 오늘은 자판기를 잘못 눌렀다. 오랜만에 걸려온 고향 친구와 전화를 받으며 블랙커피를 눌렀던 모양이다. 커피를 입에 대니 가공되지 않은 특유한 쓴맛이 다소 낯설다. 단맛도 텁텁한 느낌도 없다. 나는 다시 뽑을까 망설이다가 블랙커피를 입으로 가져갔다. 커피를 천천히 한 모금 삼킨다. 커피는 목을 타고 입속에서 사라졌지만 쓴 향기가 입안에 가득하다. 설탕도 크림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블랙커피의 쓴 향기. 문득, 때 묻지 않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