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pot of Jeju azbang

제주아즈방의 이런 저런 여러가지 관심사 창고

🤍 文 學/隨筆 . 146

'畫家 羅蕙錫의 戀愛論' / 구활

화가 나혜석의 연애론 / 구활  수덕여관은 버림받은 여인들이 한을 풀어놓는 곳이다. 예산 수덕사 입구에 있는 이곳은 마음에 깊은상처가 없는 이들은 드나들지 못할 정도로 회한의 뿌리가 깊은 곳이다. 우선 시인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던 일엽 스님이 그렇고, 스님의 친구이자 동갑내기인 화가 나혜석의 족적은 근세의 전설로 남아 있다. 또 여관의 주인이자 화가 고암(顧菴)이응로의 본부인인 박귀옥 여사도 한을 풀어 놓으면 아무도 감당하지 못할 것 같다. ‘문화유산답사기’를 쓴 유홍준은 수덕사를 이야기하면서, 일엽스님과 박귀옥 여사의 한은 간단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 여관에서 정작 드라마 보다 더 드라마틱하게 살다 무연고자 병동에서 외롭게 숨진 나혜석에 대해선 취급품목이 아니란 듯 외면하고 있다. 나혜석은..

수필 - '꽃 진다, 꽃이 진다' / 김상립

꽃 진다, 꽃이 진다 / 김상립 지금 벚꽃으로 유명한 경주 보문호 둘레길이 꽃 잔치로 한창이다. 모두가 벚꽃으로 만든 세상 같아서 구름처럼 몰려든 사람들마저 꽃처럼 보이는 그런 날이다. 쏴-아 하고 부는 바람에 고운 꽃잎이 분분히 떨어진다. 구경 나온 사람들은 하얀 꽃잎이 내리며 그려내는 매혹적인 움직임에 손뼉을 치고 환호성을 지른다. 주어진 삶을 다 누려보지도 못하고 속절없이 가야 하는 그것들을 보면, 허무한 꽃의 일생에 적이나 마음이 측은하고 울적할 법도 한데 도리어 신이 나서 야단들이다.눈이 부시게 곱던 꽃이 땅으로 내리자 말자 무참하게 짓밟힌다. 길가에 수북이 쌓인 꽃잎위로 크고 작은 자국이 선명하다. 사람들이 힘주어 누른 발자국이다. 아이 것도, 어른 것도, 죽 미끄럼을 탄 흔적마저 있다. 뿐인..

'반야(般若)로 가는 길' / 이방주

반야로 가는 길 / 이방주 월류봉 광장에 우리가 모였다. 여기서 반야로 가는 길을 찾는다. 월류봉은 금강으로 흘러들어가는 초강천에 감겨있다. 달이 경관에 취해서 머물다 간다는 월류봉 다섯 봉우리가 한눈에 들어온다. 바로 앞 오봉에서 바위 한 덩어리가 미끄러져 내려와 강 가운데서 불끈 일어섰다. 그 바위 마루에 월류정이 있다. 제 그림자에 취한 달도 편히 머물 수 있겠다. 정자까지 어우러져 그림 같은 풍광이다. 월류정을 품은 광장은 풍류 마당이다. 시가 있고 향기로운 술이 있고 그리고 아름다운 것이 있고…. 달도 놀다 간다니 월류정은 놀이 마당이다. 예나 지금이나 색(色)의 공간이다. 반야사는 여기서 이십리 남짓, 우리는 투명한 참 지혜가 있는 반야(般若)의 세계로 찾아가야 한다. 초강천은 금강의 한 줄기..

'우울한 귀향' / 구활

우울한 귀향 / 구활 이제 이 도시를 떠나야지. 멋진 귀향, 화려한 이 한마디를 앞세우고 나는 돌아가야 하리. 가서 집을 지으리라. 집 뒤엔 얕은 언덕과 구릉이 먼 산으로 연해져 있고, 먼산은 걸어서 반 마장 정도 거리에 있었으면. 그곳에 살면서 저녁 무렵이면 언덕에 올라 장려한 낙조를 바라보며, 내 저리고 아팠던 청춘과 생애를 보리라. 집 앞 실개천보다 좀 더 넓은 거랑(川)에는 맑은 시냇물이 일 년 사철 흘러가는 곳. 투망이나 반두를 들고 걸어서 한번쯤 쉬고 닿을 수 있는 거리. 낡은 자전거라도 있으면 단숨에 이를 수 있는 곳. 그런 곳에 살리라. 아, 우리 집 입구에 들어서면, 감나무 숲속에 갇힌 삼 칸 초옥이 그림처럼 아름다워라. 키 큰 가죽나무는 해마다 햇순을 피워내 상큼한 입맛을 돋워주는 집...

'오늘에 충실한 삶을 위하여' / 곽흥렬

오늘에 충실한 삶을 위하여 / 곽흥렬 또다시 그 우편물이 도착했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무료로 건강검진을 받으라고 보낸 통지서이다. 지금까지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나이 사십 줄에 들어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부터 날아들기 시작하더니, 그 이후로 한동안 잊을 만하면 각인시키듯 부쳐오곤 한다.우편물을 보는 순간 야릇한 기분에 젖어든다. 아, 내가 이 날 이때까지 무사히 살아남았구나. 잠시 감사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반평생 넘는 세월 동안 크게 병원 신세를 진 적이 없고, 설사 졌다 하더라도 한두 번의 가벼운 통원치료에 그쳤던 적 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주마간산 격으로 내용을 주욱 훑어보고는, 선 자리에서 찢어 쓰레기통에 던져버린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나의 행동을 두고 별 희한한 사람이라..

수필 - '뭐가 이카노' / 하재열

뭐가 이카노 / 하재열 수잠이었다. 몇 번을 뒤척였다는 것과 꿈도 꾸었다는 생각을 해낸다. 화를 낸 듯 나를 바라보는 늙은 얼굴과, 말 건네며 활짝 웃는 얼굴의 두 사람이 보였다. 웃는 여자 쪽이 오래 등장했고 손도 잡고, 좋은 말도 나눈 것 같았다. 새해 첫날밤인데 그 꿈 괜찮네 하다가 다시 잠이 든 꿈결이었다. “뭐가 이카노.” 옆구리를 맞았다. 꿈인가 했는데 아내 팔꿈치였다.“와 이카노.” 얼떨떨 물었다.내 한쪽 손이 밀쳐내 졌다는 걸 느끼고는 뭔가 싶었다. 아내 배꼽 아래 언저리에 손이 가 있었던 모양이다. 모처럼 한 침대에 누웠다가 잠결에 그리되었는데, 주책없다는 뜻인 것 같아 피식 웃었다. 녹이 다 슬어 작동이 어려운데 옛날 신호가 살아난 줄로 착각했나 보다. 오작동이라도 좀 했으면 좋겠는데...

'이슬 병동' / 윤 영

이슬 병동 / 윤영 끙끙 앓던 엄마는 얽힌 링거 줄과 피주머니 줄을 가지런히 정리하시더니, 겨우 잠이 들었다. 푸성귀가 있는 텃밭에라도 다녀올라치면 기다시피 다녀오던 몸. 결국, 입원을 결정하고 수술한 지 사흘 째 되는 밤이다. 나는 병실 문을 닫고 복도로 나왔지만 갈 곳이 없다. 작은 도서관이 있는 병동까지 가기엔 제법 긴 복도가 부담스러웠으며, 1층으로 내려가기엔 새벽이라서 선뜻 내키지 않는다. 별관에서 본관으로 가는 길엔 몇 점의 그림과 사진들이 걸려 있다. 엄마는 입원하던 날 이 복도를 오래 서성거렸다. 홍도의 갈매기 사진을 다시 만난다. “야야, 나는 왜 저 갈매기만치도 못하노.  망망대해를 훨훨 날지도, 바위에 쪼그려 앉지도 못하니 우짜노.”  “엄마, 우주에 인간으로 태어나 새들처럼 훨훨 날..

'순대국밥'

나는 미식가는 아니다. 입맛이 까다롭지 않다.음식에 호불호가 없고 웬만해선 다 좋아한다.그래도 잘 먹었나의 기준은 얼마나 기분 좋은 배부름이었나이다. 그중 국밥만 한 게 없다.​국밥이란 국밥은 사실 안 가리고 다 좋아한다.특히나 배고플 때면 국밥은 최고의 식사다.그리고 국밥은 뜨끈할 때 먹어야 제맛이다.​내 나름대로의 국밥을 먹는 스타일이 있다.우선 나오자마자 뜨거울 때 공깃밥을 넣는다.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밥을 절대 덜지 않는다.뚝배기 채로 호호 불어서 깍두기랑 먹는다.그리고 국밥은 자고로 완뚝해야 제맛이다.​이 스타일이 만든 폐해라면 꼭 입천장을 댄다.특히 순대국밥 먹다 입천장 홀라당 까진 적이 많다. 야성적인 국밥 시식은 꼭 상처를 남긴다.주체할 수 없는 진심은 내 입천장이 증표다.​순대국밥 한 그..

'깃털' / 한강

깃털 / 한강 문득 외할머니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나를 바라보는 얼굴이다. 사랑이 담긴 눈으로 지그시 내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손을 뻗어 등을 토닥이는 순간. 그 사랑이 사실은 당신의 외동딸을 향한 것이란 걸 나는 알고 있었다. 그렇게 등을 토닥인 다음엔 언제나 반복해 말씀하셨으니까. 엄마를 정말 닮았구나. 눈이 영락없이 똑같다.외갓집의 부엌 안쪽에는 널찍하고 어둑한 창고 방이 있었는데, 어린 내가 방학 때 내려가면 외할머니는 내 손을 붙잡고 제일 먼저 그 방으로 가셨다. 찬장 서랍을 열고 유과나 약과를 꺼내 쥐어주며 말씀하셨다. 어서 먹어라. 내가 한입 베어무는 즉시 할머니의 얼굴이 환해졌다. 내 기쁨과 할머니의 웃음 사이에 무슨 전선이 연결돼 불이 켜지는 것처럼.외할머니에게는 자식이 ..

'허수아비의 독백' / 백승분

허수아비의 독백 / 백승분친정집에 들렀다. 가을걷이가 대충 끝나 햅쌀을 찧어 놓았으니 가져가라는 어머니의 전화를 받고서다. 아직 밭작물이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지 어머니는 보이지 않고, 허수아비가 텃밭을 지키고 있다. 그도 가을걷이에 힘이 들었나보다. 남루한 옷자락을 여밀 생각도 않고 낯익은 사람을 대하듯 편안한 표정이다. 지나가던 바람이 어루만지고 옷매무새를 바로 잡아주자, 그의 독백이 귓전에 사운댄다.바쁘다. 가을엔 다들 그렇겠지만 나는 잠시도 한눈을 팔 수가 없다. 주어진 땅을 지키려면 밤잠까지 설쳐야 될 때도 있다. 주인님이 봄부터 여름까지 잘 키워서 맡긴 걸 상품이 되게 돌봐야 한다. 비록 몸은 자유롭지 않지만 최선을 다한다.한낮에는 내리쬐는 열기가 뜨겁다. 옷을 다 벗어던져도 시원찮은데 그럴 수..

'청산도에서' / 박기옥

청산도에서 / 박기옥 여행에도 운이 작용하는 모양이다. 나는 청산도행을 두 번이나 실패했다. 날씨 때문에 완도항에서 배가 뜨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새벽 일찍 출발해서 무려 5시간을 달려갔던 곳이었다. 일행은 여객 터미널 주변을 뭉그적거리다가 돌아왔다. 이번에는 운 좋게도 무사히 배가 떴다. 40여 분의 항해 끝에 청산도에 도착했다. 그런데 어찌할까. 어처구니없게도 배에서 내리자마자 나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얼마나 모질게 다쳤던지 무릎이 순식간에 풍선처럼 부어올랐다. 인대 파열이었다. 졸지에 섬에서 깁스를 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 섬은 언제나 바람에 머물러 있었다. 뭍의 날씨가 여름을 재촉할 때도 섬은 아직 꽃샘바람을 벗어나지 못했다. 파도는 바위를 끌어안은 채 아이처럼 보채는데, 무심한 유채..

'트로트 단상(斷想)' / 강승택

트로트 단상(斷想) / 강승택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르고 늦바람이 용마름을 벗긴다더니, 광풍도 이런 광풍이 없다. 평생 가정과 일밖에 모르던 여자가 트로트 광풍에 갇혀 헤어날 줄을 모른다.아내는 24시간 녀석을 끼고 산다. 잠을 잘 때나 화장실에 갈 때, 심지어 샤워할 때조차, 곁에 두지 않으면 허전해 못 견딘다. 어느 날 밤에는 코까지 골아 가며 자고 있기에, 슬그머니 쥐고 있던 유튜브의 스위치를 꺼준 적이 있다. 순간 얼마나 격렬하게 반응하던지, 나는 그만 데인 손 거둬들이듯 황급히 녀석을 내주고 말았다. 좌견천리, 앉아서 천리를 본다지만, 과연 아내는 자면서도 노래를 듣고 감상하는 신통함이 있는 줄 그때 처음 알았다. 요즘 공중파 방송을 통해 등극한 어느 남자 가수에 대한 아내의 관심이 ..

'삶이 아름다운 이유' / 김태규

내년이면 70, 쉽게 실감이 나지 않는 일곧 추석, 연휴가 끝나면 올 한 해도 거의 다 지난 셈이다. 내년이면 세는 나이로 일흔 즉 70이 된다. 옛날엔 70이면 古來稀(고래희)라 해서 드물다 했고, 나 또한 예전부터 그 나이 정도가 되면 다 살은 사람이란 생각을 해왔는데, 내가 바로 그 70이 된다. 내가 다 살았다는 얘기가 되니 쉽게 실감이 가질 않는다.나이 50을 넘길 때, 이제 야, 나도 드디어 쉰이 되는구나, 이제 본격 내리막이네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그로부터 어느 사이에 또 다시 20년이 훌쩍 흘러서 이젠 70이 된다.그 사이에 체력은 떨어지고 또 이런저런 증세도 있고 해서 고생 좀 하고 있지만, 머릿속은 아주 멀쩡하기만 하다. 기억력이 조금 감퇴했지만 사고력이나 이해력은 반대가 되고 있으니..

'눈물은 낯을 가린다' / 조이섭

눈물은 낯을 가린다 / 조이섭 눈물은 낯을 가리나 봅니다. 여자들은 화장실에서 물 틀어 놓고 울고, 중년 남자들이 마시는 소주잔의 반은 눈물로 채운다잖아요. ‘눈물 없는 세상’이 왔으면 하고 바라는 이들이 많습니다. 기쁘고 좋아서 흘리는 눈물보다 슬프거나 억울해서, 서럽거나 외로워서 우는 사람이 많아서 일 테지요. 눈물 없는 세상이 하늘에서 툭 떨어지기를 기다리느니, 다른 사람 눈치 보지 않고 내 맘대로 펑펑 울 수 있는 눈물 방이라도 하나 만들어 볼까 싶네요. 아이들은 언제 어느 때 가리지 않고 제 울고 싶으면 울고, 좋으면 웃습니다. 어른들은 그렇지 않고 웃거나 울 때 눈치를 살핍니다. 다른 사람의 좋은 일에는 박장대소하지만, 나에게 웃을 일이 생기면 주위에 슬픈 사람이 없는지 기색을 살핍니다. 울고..

'탁주 한 잔'

탁주 한 잔. 死後千秋萬歲之名 不如生時濁酒一杯(사후천만세지명 불여생시탁주일배)죽은 후 천추만세까지 이름이 전해지는 것이 살아생전에 탁주 한잔만 못하다.사후의 세계보다 살아 生前이 더 소중하다는 뜻이다.고려의 대문호 李奎報가 아들과 조카에게 준 시(示子姪)를 보면, 노인의 애틋한 소망이 그려져 있다.죽은 후 자손들이 철따라 무덤을 찾아와 절을 한들, 죽은자에게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세월이 흘러 백여 년이 지나 가묘(家廟, 祠堂)에서도 멀어지면, 어느 후손이 찾아와 성묘하고 돌볼 것이냐고 반문했다.찾아오는 후손 하나 없고 무덤이 황폐화되어 초목이 무성하니, 산 짐승들의 놀이터가 되어 곰이 와서 울고, 무덤 뒤에는 승냥이가 울부짖고 있을 것이 자명하다고 했다.산에는 古今의 무덤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지만,..

'아버지의 미소' / 박경대

아버지의 미소 / 박경대 우리 집은 종갓집이다. 청주는 일 년 내내 떨어지지 않고 마실 만큼 제사가 자주 있다. 오늘도 제사가 있는데 이십오 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기일이다. 이른 아침부터 제수를 장만하고 있는 아내의 손이 분주하다. 일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사소한 심부름 외에는 별 도움이 되지 못하는 내가 미안할 따름이다. 몇 년 전까지는 딸아이가 고기를 굽고, 전도 붙이며 엄마를 곧잘 도왔는데, 시집을 간 뒤로는 늘 혼자서 음식을 만들고 있다. 어린 시절, 제삿날은 친척 어른 몇 분이 오셔서 음식을 장만하셨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서서히 그분들의 발걸음이 뜸해 지더니, 부모님이 돌아가시고는 그만 끊어져 버렸다. 사회적으로 핵가족화가 되고 내가 외동이다 보니 도리가 없다. 혼자서 하는 준비가 힘은 ..

'공처가' / 류영택

공처가 / 류영택친구들은 나만 보면 아내에게 잘 하라고 당부를 한다. 나는 그때마다 고개를 끄덕이지만 돌아서면 기분이 묘해져온다. 가만, 내가 언제 마누라 모르게 딴 살림을 차린 적이 있었던가. 아니면 날마다 마누라를 두들겨 패기라도 했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을 해도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하긴 제 맘 잡고 남에 말 한다고, 자신들이 그러니 나도 그렇게 보이는가보다. 애써 마음을 누그러뜨리면 또 그 말이 들려온다. 이쯤 되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 눈에는 내가 날마다 마누라를 두드려 잡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이젠 묻지 않을 수가 없다."와, 누가 뭐라카더나?""응, 그냥"세상에 이보다 더 무책임 한 말이 또 있을까. 화를 내고 싶지만, 그냥이란 엄청난 뉘앙스에 다시 한 번 깊이 생각..

'이발(理髮)' / 정목일

이발(理髮) / 정목일 하루의 기분을 좋게 하는 데는 목욕, 한 달의 기분을 좋게 하는 데는 이발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지만 나에게 이 말은 마음의 짐이며 부담이다.식구들로부터 이발 좀 하라는 채근을 받고서야 비로소 이발할 생각을 하게 되면, 그것도 시간이 있고 기분이 내켜야만 이발소에 가게 된다.소요 시간만도 두 시간 가량 드니, 무작정 이발소에 갈 수도 없다. 시간이 아깝거니와 ‘면도’라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이 싫어서, 한동안 미장원을 이용하기도 했다. 여자들 틈에 끼어 미용사의 손에 머리카락을 잘리는 것이 편안하지는 않았으나, 30분 정도로 간단히 끝낼 수가 있어 좋았다.​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미장원 출입도 마땅하지 않았다. 젊은 여자들의 온갖 잡담을 들어야 하고, 흘깃흘깃 훔쳐보는 시선을 받기..

'차향(茶香)을 꿈꾸며' / 박종화

차향(茶香)을 꿈꾸며 / 박종화 차를 맛있게 우려내기란 참 어렵다고 한다. 찻잎도 중요하지만 물 온도가 차의 맛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동료의 부친상 소식을 뒤늦게 들었다. 한 달쯤 뒤, 그를 만났을 때 쭈뼛쭈뼛 부의금 봉투를 꺼냈다. 그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런 형식 너무 싫어'. 한 손으로 봉투를 받아 바지 뒷주머니에 그대로 찔러 넣었다. 나는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 후 그 동료와는 멀어졌다. 전근 간 선배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랜만에 사무실 근처로 갈 테니 밥이나 한 끼 먹자는 거였다. 선배는 그동안 나에게 밥도 많이 샀고, 공연 티켓도 통 크게 쏜 적이 있었다. 매번 얻어먹는 게 미안해서 내가 사겠다고도 했지만, 선배는 단호하게 거절하곤 했다. 이번엔 식당에 미리 가 결제를 해뒀다. 나중에 그 ..

'웃음소리' / 김세희

웃음소리 / 김세희 자연은 계절마다 새로운 소리를 연주한다.이른 봄 살얼음이 낀 논가에서 들려오는 개구리 소리, 봄의 창공을 나르며 노래하는 종다리, 여름향기를 뿜으며 노래하는 매미, 깊어가는 가을밤의 귀뚜라미 소리, 겨울 마당을 간질이는 싸락눈 내리는 소리… 쓸쓸… 아까부터 숲속 어딘가에서 새로운 소리가 들린다. 쓰르라미 소리다. 이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지금 숲을 가득 채우는 매미 소리는 자취를 감추고 말겠지. 이런 계절의 소리로 달력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봄의 새소리, 여름의 풀벌레 소리, 가을의 가랑잎 굴러가는 소리, 한겨울 한옥의 문풍지 소리까지. 계절마다 다른 소리로 달력을 만든다면 한 장씩 넘길 때마다 기분 좋은 하루가 열리지 않을까. 자연의 소리가 계절마다 다르듯 자연을 닮은 사람도 제 ..

'아버지에 대한 기억' / 여세주

아버지에 대한 기억 / 여세주 아버지는 늘 집에만 있지는 않았다. 여름에는 하얀 두루마기를, 겨울에는 검은 두루마기를 차려입고 출타를 하면, 여러 날 만에 돌아오곤 하였다. 들에 나가 일을 하던 아버지 모습은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농사일은 우리 집 일꾼이었던 창림이 아저씨에게만 맡겨졌다. 아버지가 집에 돌아와 머무를 동안에는, 당신의 벗들이 찾아와 며칠씩이나 묵어갔기에 사랑채는 북적거렸다. 내 기억에서, 아버지는 늘 그렇게 살았다. 손님들이 하나둘 떠난 날엔 나를 안고 사랑채로 건너갔다. “사내는 사랑방에서 자야 한다.”고 하면서. 아버지의 팔베개에 누워 있으면 할머니나 어머니의 품속처럼 편안하지 않았다. 눈만 말똥대며 잠을 들이지 못했다. 그럴 때면 안방에 건너가란다. 나는 아버지의 그 말이 채 끝..

'불멍' / 이동이

치솟는 불길이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만큼 자유분방하다. 주체할 수 없는 욕망을 불사르듯 푸른빛으로 일렁인다. 오직 타오르기 위한 일념으로 장작을 에워싸는 불길, 그 현란한 불꽃의 몸짓에 홀린다. ‘타다닥, 타닥’ 장작이 타면서 불티가 날아오른다. 밤의 장막에 별처럼 박혔다가 화르르 쏟아져 붉은 수정되어 구른다. 잠시 반짝이다 시나브로 흙과 동화되고 만다. 느리게 반짝이다 사라지는 불꽃은 노인의 인생 꽃인 검버섯을 닮았다. 그 꽃도 저렇게 시들거리다가 가뭇없이 사그라지는 것이 아닌가. 이 시간 이 고요. 불길 따라 흐르고 불길 따라 머문다. 어느 순간 나를 내려놓자 내가 없다. 실존하는 형체는 이미 내가 아니다. 환하게 부서져 내리는 불빛에 산화되어 버렸다.  딸네는 매주 금요일이면 아이 셋을 데리고 멀리..

'그건 채소지만 이건 고기잖아' / 구활

그건 채소지만 이건 고기잖아 / 구활 나를 키워 온 건 순전히 고향 하늘이다. 그 하늘 아래서도 개구리 울음소리와 소쩍새 울음소리가 안아주고 업어 주며, 반 이상을 키워 왔다. 미당(未堂) 을 시인으로 만든 건 ‘팔 할이 바람’이지만, 내가 커 온 건 고향 하늘 아래에서 들리는 이런 소리 덕이다.개구리는 혼자 울지 않는다. 솔로로 울던 놈이 친구들을 끌어모아 끝내는 코러스로 운다. 그래서 개구리의 울음소리는 장엄하다. 높낮이가 없는 듯 하지만 자세히 들어보면 박자를 어기는 법이 없다. 바이올린의 고음과 같은 현란한 음을 내지 않아 지루한 감이 없진 않지만, 반야심경을 독송하는 스님의 염불을 듣듯, 듣고 있으면 소리 속에 내가 빠진다. 여름 저녁, 마당 복판에 두어 개의 멍석을 깔고, 바람의 방향에 맞춰 ..

'지금이 좋을 때' / 정성화

지금이 좋을 때 / 정성화  왼쪽 눈에 황반변성이 생겨 주기적으로 동네 안과에 다니고 있다. 어느 날 진료를 마친 원장님이 말했다. 의학 전문지에 올라온 통계를 보니, 노년의 건강이 잘 유지되는 시기는 대개 75세까지더라며, 눈에 이상이 있다 해도 지금이 좋을 때라고 했다. 무슨 의미인지 물었다. 그는 “내 발로 걸어서 내가 가고 싶은 데를 갈 수 있으면 좋을 때지요.”라고 했다. 내 발로 걸어서 어디를 간다는 게 그만큼 중요하다는 얘기다. 그래서인지 체력이 좋은 사람을 보면 마음이 끌린다. 가끔 들르는 식당의 주인은 나와 비슷한 연배인데, 매일 새벽 네 시에 나와 혼자 백반 100인분을 준비한다. 큰 들통을 번쩍 들어 옮길 정도로 힘이 세고, 상에 올라온 갖가지 반찬들은 이전에 우리 어머니가 해주던 바..

'죽방렴(竹防簾)' / 박순태

죽방렴 / 박순태  눈 가리고 아웅 한다는 말이 있다. 객체였던 내가 어느 순간에 주체가 되어버렸다. 얕은 수단 부려 이익 보려다 얕은 수단에 넘어진 꼴이 됐다. 일행을 태운 버스는 제주 중문에 자리한 내국인 면세점에 들어섰다. 주차장에는 차들이 빽빽이 세워져 있고, 관광버스가 줄지어 들어온다. 사람들이 차에서 내리기 바쁘게 입구를 향해 종종걸음이다. 물길 따라 유영하는 멸치 떼 같다. 내 마음이 덩달아 요동치며 무리에 섞였다. 매장 안으로 들어서니 갖가지 상품들이 깔끔하게 치장하고 선을 보인다. 진열장 안에는 불빛 받은 보석이 반짝거리고, 늘씬한 마네킹은 신상품 옷을 걸치고 뽐낸다. 화장품 코너에는 앵두 빛 립스틱이 시선을 당긴다. 생활용품들은 시중 거래가 보다 저렴한 가격표를 붙이고 있다. 특산품인 ..

'졸보' / 조이섭

졸보 / 조이섭 용돈이 6년 동안 제자리걸음이다. 퇴직한 연금생활자 신세라지만, 치솟는 물가를 따라가지 못한다. 아내에게 용돈 올려 달라는 말을 꺼내려다 매번 삼키고 만다. 엄연한 가장으로서 많지도 않은 용돈 하나 맘대로 못하는 처지다.  딱한 거로 말하자면, 어디 그뿐이랴.설 전날, 가까이 사는 큰아들이 구이용 소고기 세트를 가져왔다. 바닷가 도시에 사는 둘째는 예정에 없던 생선회를 사 왔다. 아이스박스에 초고추장이랑 상치까지 담겨 있었다. 술이 고팠던 삼부자는 식사 전에 생물이라는 핑계로 회를 먼저 차려 놓고, 소주잔을 돌렸다. 아내는 생선회를 입에도 대지 않는 큰며느리와 손주들 주려고 소고기를 구웠다. 생선회 덕분에 준비해 온 고기가 절반이나 남았다.설을 쇠고 작은아들이 돌아갈 때, 아내가 밑반찬 ..

'부부(夫婦)' / 강호형

부부(夫婦) / 강호형무던한 부부지간에도 말다툼쯤은 있게 마련이다. 그것이 도에 지나치지만 않는다면 없는 것보다 낫다는 말도 있다. 실제로도 가벼운 입씨름이 자칫 무미건조해지기 쉬운 부부간에 활력소 구실을 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짓도 오래 지속하다 보면 단골 ‘메뉴’ 같은 것이 생기게 마련인데, 그것이 자존심에 저촉 되는 사안일 경우 잘못하면 위험 수위로까지 치닫는 수도 있다. 자식에 관한 문제가 그 중의 하나다. 자식은 어디까지나 부부의 합작품이니만큼, 부모 중 어느 한 사람을 닮거나 두 사람의 특성을 적당히 섞어서 닮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이럴 경우 부모 모두가 조금도 나무랄 데 없는 완전한 인간이고, 자식들 또한 그런 부모를 완벽하게 닮는다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그것은 한낱 이상론에..

'문득 그대' / 구활

문득 그대 / 구활 ‘늘뫼’는 친구의 아호다. 그는 ‘항상 산에서 살고 싶다’는 소망을 담아 그렇게 작호한 것이라 했다. 호를 갖기 전에 내가 ‘우수(又睡)’라는 별호를 지어 준 적이 있다. 그는 아침형 인간으로 새벽 3시쯤에 일어나 진지들에게 시 한편씩을 배달하다 보니 잠이 모자랐다. 함께 산행에 나설 땐 차만 타면 졸았다. 그래서 또 ‘우(又)’ 자와 잠 ‘수(睡)’ 자를 엮어 ‘또 잔다’는 뜻으로 지은 것이다. 그 호가 맘에 들지 않아 ‘늘뫼’로 바꿨나 보다.그는 시 배달을 마치면 바로 산행에 나선다. 하루도 거르는 날이 없다. 한겨울에는 상하 우모복으로 중무장하고 나선다. 동네 앞산에 올라 해뜨기를 기다린다. 그의 버릇은 솟아오르는 아침해를 와작와작 씹어 먹는 것이다.그는 새벽 산행 파트너로 나를..

'초우(招雨)' / 천경자

초우(招雨) / 천경자 무거운 구름이 하늘을 짓누르는 장마 때가 되면 달콤한 향기를 풍기는 오동꽃이 생각난다. 그리고 한 번씩은 내 외리에서 언제까지나 살고 있는 그 두꺼비가 나타나 그때의 일을 회상하게 한다.웬일인지 일찍부터 나는 곤충이나 동물을 그리는데 흥미가 있었다. 덕분에 탐탁하지도 않은 내 작품 속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나비와 잠자리 등이 제물처럼 등장하곤 했다. 그것은 아마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살며, ‘보리 가실(보리 베기)을 할 무렵에 많이 보이는 갖가지 곤충과 두꺼비 같은 동물들을 수없이 접해온 까닭이 아닌가 한다.그런데 어린 마음에도 두꺼비는 기괴한 동물이란 느낌이 들었고, 귀여운 것과는 거리가 먼, 괜히 농락해 보고 싶고 때로는 학대까지 해보고 싶은 감정을 주는 추물이었다.그러나 비를..

'뿌리의 힘' / 문혜란

뿌리의 힘 / 문혜란 집이란 대저 이러해야 한다는 호감으로 마주한다. 앉아있으되 터를 누르지 않고, 하늘로 열려있으나 가볍지 않다. 집은 하나같이 단아하고 간결하여 호사를 멀리한 근검함이 배어나나, 이백 년 세월을 품고 당당하다. 기와지붕의 곡선과 골목과 담의 직선이 조화를 이루며, 특별한 치장 없이도 품격을 지녔다. 마을을 오롯이 감싼 나지막한 산과 들은 조선의 문장가 신흠이 야언(野言)에서 읊은 전원생활을 떠올리게 한다. 집은 사람이 담기는 곳이어서 주인의 성품을 닮는다. 불편함을 감수하며 조상들의 주거공간을 훼손하지 않고 삶을 이어가는 저들에겐 그들만의 긍지가 있을 거다. 집도 사람과 함께 나고 자라고 늙는다. 시간이 쌓이면 그 안에 추억과 이야기가 담기며 역사가 된다. 한곳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