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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에 대한 기억' / 여세주

아즈방 2024. 8. 17. 18:04

아버지에 대한 기억 / 여세주

아버지는 늘 집에만 있지는 않았다. 

여름에는 하얀 두루마기를, 겨울에는 검은 두루마기를 차려입고 출타를 하면,

여러 날 만에 돌아오곤 하였다. 

들에 나가 일을 하던 아버지 모습은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농사일은 우리 집 일꾼이었던 창림이 아저씨에게만 맡겨졌다. 

아버지가 집에 돌아와 머무를 동안에는, 

당신의 벗들이 찾아와 며칠씩이나 묵어갔기에 사랑채는 북적거렸다. 

내 기억에서, 아버지는 늘 그렇게 살았다.

 

손님들이 하나둘 떠난 날엔 나를 안고 사랑채로 건너갔다.

“사내는 사랑방에서 자야 한다.”고 하면서. 

아버지의 팔베개에 누워 있으면 할머니나 어머니의 품속처럼 편안하지 않았다. 

눈만 말똥대며 잠을 들이지 못했다. 

그럴 때면 안방에 건너가란다. 

나는 아버지의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벌떡 일어나 맨발로 안채를 향해 달음질쳤다. 

어쩌다가, 아버지 곁에서 잠이 들 때에는 여지없이 불이 난 꿈을 꾸곤 했다. 

활활 타오르는 불 속에서 놀라 소리치며 뛰쳐나온다. 

마당을 지나고 안채 툇마루까지 와서야 꿈에서 깨어났다. 

사내는 사랑방에서 자야 한다던 그 말이 나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인 줄을 그때는 몰랐었다.

 

큰형수가 시집오던 날이었다. 

마당 전체에 흰 천막을 쳤다. 

부엌에는 마을 아낙들이 가득하고, 

부엌 앞에서도 무쇠솥 뚜껑을 뒤집어 놓고 전을 굽는 여인네들로 분주했다. 

안채에 있는 큰방, 마루방, 상방에는 물론이고 마루에도 손님들로 북적였다. 

사랑채에서도 아랫방과 윗방에 들어가지 못한 손님들이 마루에까지 물러나 앉았다. 

천막 아래에 펼쳐 놓은 멍석에도 빈틈없이 사람들로 가득 찼다. 

밀려난 손님들은 이웃집 사랑채로 건너갔다. 

할머니는 손님들의 성화에 못 이겨 마당으로 내려와 엿 고리를 머리에 이고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마을 청년들은 음식 나르는 일로 바빴다. 

허리가 구부러진 할아버지 두 분도 지게를 내려놓지 않은 채 마당 한편에 서서 할 일을 기다렸다. 

사당 아래에 있는 오두막집에 살면서 묘사 때마다 음식을 지고 나르던 할아버지들이었다. 

할아버지 한 분이 굴렁쇠를 굴리는 데 쓰는 조그마한 소죽 젓개를 만지작거렸다.

“그거 내 꺼라요! 이리 줘요!”라고 소리쳤다. 

때마침 내 옆을 지나시던 아버지가,

“그거 내 꺼니 이리 주게.”라고 하란다. 

내 말을 왜 그렇게 바로잡으라고 하였는지를 그때는 알 수 없었지만, 

그 가르침이 나를 향한 아버지의 유일한 훈육이었다.

 

내 나이 일곱이었던, 초등학교 1학년 때의 가을 운동회였다. 

운동장에는 만국기가 펄럭이고 흰 석회가루로 운동장 한 바퀴를 도는 줄을 그어 놓았다. 

아이들은 양옆에 흰 줄무늬 달린 검은색 사각 팬티와 푸른색 교표가 찍힌 러닝셔츠를 입었다. 

청군과 백군으로 갈라져 보물함 터트리기도 하고 줄다리기도 했다. 

운동장을 한 바퀴 도는 달리기에서 3등을 했다. 

상으로 노트 한 권을 받을 때에, 아버지가 하얀 두루마기를 입고 갓을 쓴 모습으로 교장 선생님 옆에 앉아있었다.

3등 한 것을 아버지에게 들켰다는 생각에 창피했다.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가 왜 교장 선생님 옆에 있느냐고 어머니에게 투덜대었다. 

아버지가 우리 학교 기성 회장이라고 했다. 

난 어머니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교장 선생님 옆에 나란히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아버지가 왠지 자랑스럽기도 했던 것 같다.

 

이른 아침인데도 아버지는 사랑방에 없었다. 

주무신 흔적도 보이질 않았다. 

어제 저녁에 나가신 아버지가 들어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어머니가 심부름을 시켰다. 

마지못해 한길 건너에 있는 주막으로 투덜투덜 걸어갔다. 

아버지는 그곳에 있었다. 

그 심부름이 점점 잦아졌다. 

그런 날이면, 주막집 여자가 할머니에게 불려 와 혼쭐이 나는 때도 있었다. 

어머니와 싸움을 하는 일도 벌어졌다. 

나는 그런 혼란이 왜 일어나는지 잘 몰랐다. 

주막집 여자는 나만 보면 생글생글 웃으면서 말을 건네는데도 그냥 싫었다. 

그런 일이 벌어진 후로는 사랑채에서 아버지와 함께 잠자리에 든 기억은 없다.

 

아버지는 꽤 오랫동안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아버지가 우리 곁에 항상 함께 있지 않아서 그런지 그립지도 않았다. 

그러던 어느 겨울날 이른 아침,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길을 나섰다. 

초등학교가 있는 마을을 지나고 나서, 

지름길로 가자면서 어느 마을 뒷산으로 나 있는 비탈길로 접어들었다. 

작은 언덕을 넘으니 다시 길게 뻗은 신작로가 나타났다. 

어머니의 분주한 발걸음을 따라 10여 리를 걷고 또 걸었다. 

어느 산모퉁이를 돌아서니, 제법 큰 마을이 저 멀리 보였다. 

낯익은 동네였다. 

묘사를 지낼 때에 아버지를 따라 한두 번 와본 곳이었다. 

어머니는 걸음을 멈추고서 신작로 가에 붙어 있는 작은 오두막집을 가리키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여서부터 니 혼자 가거라. 

 저 집에 가면 너거 아부지가 있을 끼다.

 꼭 모시고 온나.”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는 곧장 마을을 향해 걸었다.

한참을 걷다가 걸어온 뒤쪽으로 고개를 돌려 어머니를 찾았다.

어머니는 아직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어서 가라는 손짓을 하더니, 어머니의 모습은 이내 산모퉁이 뒤로 사라졌다.

아버지는 그곳에 있었다.

주막집 여자는 갓난아이를 안고 웃으며 반겼다.

그리고는 아이를 쳐다보며 “오빠 왔네.”라고 하면서 어른다.

“혼자서 왔나, 너거 엄마가 데려다 주더나?” 아버지가 물었다.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혼자서 왔다고 짧게 대답하였다.

흰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갈 걱정이 앞섰다.

아버지가 눈 때문에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다고 할까 봐 걱정되었다.

쉬지 않고 쏟아져 내리는 눈은 잠시 만에 길을 뒤덮었다.

평소와는 달리 눈이 싫었다.

아버지에게 빨리 집에 가자고 졸랐다.

아버지는 내 예측대로 눈이 많이 와서 지금은 가지 못한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혼자서라도 집으로 돌아가겠다며 아침에 걸어왔던 길로 나섰다.

눈은 어느새 무릎까지 쌓였다.

수없이 뒤를 돌아보아도 아버지가 뒤따라오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인적도 없는 길을 혼자서 걸었다.

무서움이 밀려들었다.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린 지름길을 더듬다가 몇 길이나 되는 언덕 밑으로 굴러 떨어졌다.

안간힘으로 언덕을 기어오르는 동안, 아버지가 무척 야속했다.

 

따뜻한 봄이었다. 

난 초등학교 3학년이 되었다. 

식구들이 마루에 둘러앉아 칼국수로 저녁을 때우고 있었다. 

어느 아이의 다급한 고함이 들렸다. 

동구 밖에서 마을로 들어서는 고갯마루를 넘으면서 점점 가까워져 왔다. 

목소리가 빠르게 커지는 것으로 봐서, 

그 아이가 달려오면서 외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풍양어른이, 풍양어른이 돌아가셨대요. 풍양어른이 교통사고로 죽었대요.” 

고함이 똑똑히 들려왔을 때쯤에는, 

이미 그 아이가 우리 집 삽짝 앞에 헐떡이며 서 있었다. 

저녁을 먹던 식구들은 영문을 모른 채 마치 정지된 화면처럼 온몸이 굳어졌다. 

풍양 댁은 우리 집 택호였고, 풍양어른은 분명 우리 아버지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립지도 않던 아버지가 서러움 속에서 갑자기 보고 싶었다. 

아버지는 증조부 산소 발치에 묻혔다. 

아버지가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교량 위에서 몇 시간의 진혼굿이 벌어졌다. 

아버지의 가상(假像)을 내 두 팔에 안고 20리 길을 걸어서 집으로 모시고는 왔지만,

아버지는 아버지의 자리로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많은 세월이 지났다. 

내 나이가 그때의 아버지 나이를 한참이나 넘겼다. 

기억의 저편에 아슴푸레한 그리움으로 서 있는 나의 아버지. 

아버지는 아버지라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