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방렴 / 박순태
눈 가리고 아웅 한다는 말이 있다.
객체였던 내가 어느 순간에 주체가 되어버렸다.
얕은 수단 부려 이익 보려다 얕은 수단에 넘어진 꼴이 됐다.
일행을 태운 버스는 제주 중문에 자리한 내국인 면세점에 들어섰다.
주차장에는 차들이 빽빽이 세워져 있고, 관광버스가 줄지어 들어온다.
사람들이 차에서 내리기 바쁘게 입구를 향해 종종걸음이다.
물길 따라 유영하는 멸치 떼 같다.
내 마음이 덩달아 요동치며 무리에 섞였다.
매장 안으로 들어서니 갖가지 상품들이 깔끔하게 치장하고 선을 보인다.
진열장 안에는 불빛 받은 보석이 반짝거리고,
늘씬한 마네킹은 신상품 옷을 걸치고 뽐낸다.
화장품 코너에는 앵두 빛 립스틱이 시선을 당긴다.
생활용품들은 시중 거래가 보다 저렴한 가격표를 붙이고 있다.
특산품인 갈치는 은빛을 내고, 한라봉은 우뚝하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상품에는 관심 없이 그냥 지나친다.
호소하듯 보내주는 점원들의 미소에도 아랑곳없이 아이쇼핑도 하지 않는다.
모두가 한 곳에만 정신을 집중하고 있다.
구석진 자리는 북새통이다.
꼬부랑 할머니와 새색시도 있고,
담배 연기 냄새에 진저리치던 사람까지 합세했다.
미성년자가 없는 게 다행이다.
모두가 약속이나 한 듯 담배만 산다.
비행기 예매표와 신분증이 그것을 살 수 있는 자격 서류이다.
먼저 온 사람들이 담배 열 갑씩을 손에 쥐고 흡족한 대가를 받은 듯 흐뭇한 표정을 짓는다.
담배가 보물인 양, 보약이 된 양 착각을 일으킨다.
이곳은 마치 죽방렴 같다.
멸치는 밀물에 떠밀린 먹이를 쫓는다.
다음 차례가 어떻게 전개될지는 안중에도 없다.
눈이 있고 귀가 있고 감각기관을 갖고 있어도 운명을 감지할 수 없다.
그러다 썰물을 맞아 막다른 곳에 이른다.
여기 몰려든 사람들도 멸치처럼 시류에 따라 우르르 편승하고,
가까운 미래에 닥쳐올 자화상은 지워버린다.
멸치는 물결 따라 사람은 세월 따라 소리 없이 살아가는 생명체다.
사람들이 무리지어 밀려든다.
먼저 온 우리처럼 곧장 담배 가게 앞에서 줄을 선다.
별다른 대화 없이 서 있는 시간이 무료해서,
앞에 서 있는 아주머니에게 하루에 담배를 몇 개비씩 피우냐고 물었다.
아주머니가 손사래를 저으며,
“무신 말씸을 그렇게 해유? 저는 그런 물건 있는 대로 잡아 던져버린 대유.” 한다.
그 말을 듣고 있던 사람들이 싱긋이 웃는다.
이심전심에서 나타내는 표정관리일 성싶다.
피우지 않는 담배를 무엇하러 살까.
동행자의 부탁, 친척이나 이웃의 선물, 아들이나 사위에게 전하려는 사람들이다.
우리 부부는 일단 사고 보자는 식이다.
어찌 보면 거름지고 장에 가는 꼴이다.
건강에 해롭고 부자지간이나 남녀노소가 함께 피울 수 없는 담배를 아랫사람에게 주려 한다니, 이것이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격이다.
담배 한 보루 사면 편도 비행요금 절반은 해결된다.
시중에서는 45,000원에 거래되는 것이 이곳에는 18,500원이다.
엄청난 가격 차에 마음이 진동을 일으킨다.
몸수고 조금 하면 될 것을, 사지 않으면 손해 본다는 마음이 앞선다.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알겠다.
담배 가격차가 신경을 건드린다.
국민 건강을 담보하여 담뱃값 인상이란 미명에,
애꿎은 애연가들만 피해를 보게 되었다.
담뱃값 올리면 금연할 줄 알았는데 그것은 탁상공론이었다.
담배에 붙인 세금이 증세없는 복지실천에 큰 몫을 하고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노자의‘소유 없는 생산’이 떠오른다.
욕심을 버리고 꼭 필요한것만 가지라는 이 일침이 앙큼했던 마음을 다독인다.
필요치 않은 물건 사려고 오랜 시간 줄지어 있었던 것을 생각하니,
얼굴이 화끈거린다.
도리를 지키려던 양심이 담뱃값 하나에 희롱당하며 여지없이 무너졌다.
몸이 오그라든다.
이게 무슨 꼴인가.
심적 상태는 이미 낙제다.
순수한 모습의 그림자가 조용히 숨을 쉬며 잠을 깨고 있다.
담배를 받아든 아내의 얼굴을 살짝 훔쳐보니 이른 봄날이 되어있다.
담배 열 갑을 손에 들고 세상을 걸머쥔 듯 자랑스러워하는 활짝 핀 얼굴들.
이들은 바람 따라 움직이는 들꽃들이었다.
제 꾀에 제가 빠져서 속아 넘어갈 위인들도 아니다.
겉과 속이 다른 자기중심 자기 본위에 젖은 약삭빠른 현대인들이 아니다.
백지 같은 마음씨에 검은 점을 찍은 순진함이 들통 난 현장이라 더더욱 속이 쓰라려 온다.
이색적인 통계에 화들짝 놀랐던 적이 있다.
개성공단이 폐쇄되기 전,
그 곳을 왕래한 사람들은 하루 4.2갑씩 담배를 소비했단다.
면세 담배가 거기 사람들을 골초로 둔갑시켰다.
조지 버나드쇼는 제대로 교육 받은 사람의 징표는 통계를 보고 깊이 감동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개성 체류자들의 담배 소비 통계에 머리가 띵하다.
누구의 제안에서, 누구의 결정으로, 이런 현상이 일어나도록 했나.
오호통재라.
찬바람 맞는 이웃들 한 명 한 명이 떠오른다.
마소처럼 일해서 허우적거리며 살아가는 삶들,
아무리 용을 써도 흐릿하고 꾀죄죄한 공간 속에서 해방되지 못한다고,
끙끙거리는 이들이다.
그들은 오늘도 월급을 쪼개 은행 빚 이자와 사글세에 짓눌린 처지에서,
몸부림치며 꽁초를 질근질근 씹어댄다.
그들의 마음은 결국 빛깔과 습기를 잃어버린 채,
발바닥에 비벼지는 꽁초처럼 얇고 납작해져 간다.
하루 한 갑의 담뱃세는 연간 121만 원을 상회하여,
9억짜리 아파트 재산세와 저울추를 맞춘다.
법의 목적은 악의 방지일진데,
당국의 얄팍한 정책을 생각하니, 마음에서 요동치는 파도가 목을 넘쳐흐른다.
내 몸도 작은 우주인지라 엘니뇨 현상이 일어난다.
면세 담배는 어진 삶들의 미끼였다.
담배 가게에 멸치 떼 같이 몰려들게 한 정책은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죽방렴이다.
진풍경의 마침표는 누가 찍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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