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처가 / 류영택
친구들은 나만 보면 아내에게 잘 하라고 당부를 한다.
나는 그때마다 고개를 끄덕이지만 돌아서면 기분이 묘해져온다.
가만, 내가 언제 마누라 모르게 딴 살림을 차린 적이 있었던가.
아니면 날마다 마누라를 두들겨 패기라도 했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을 해도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하긴 제 맘 잡고 남에 말 한다고, 자신들이 그러니 나도 그렇게 보이는가보다.
애써 마음을 누그러뜨리면 또 그 말이 들려온다.
이쯤 되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 눈에는 내가 날마다 마누라를 두드려 잡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이젠 묻지 않을 수가 없다.
"와, 누가 뭐라카더나?"
"응, 그냥"
세상에 이보다 더 무책임 한 말이 또 있을까.
화를 내고 싶지만,
그냥이란 엄청난 뉘앙스에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다른 사람에게는 하지 않는 말을 내게 그냥 할 수 있다는 것은,
그냥 내가 그렇게 보여, 그냥 입에서 나오는 대로, 그냥 해버린 것이다.
참으로 나 자신이 한심하고 아내가 가엽다.
어디 깊은 산속에 들어가 실컷 울고 싶은 심정이다.
친구들은 아내의 천성이 그런 줄도 모르고,
내가 아내의 기를 너무 꺾어놓아 그렇게 된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자고로 남자가 기가 약하면 여자라도 거세야 한다.
행여 차를 몰고 가다 접촉사고라도 당하면,
잘잘못을 가리기도 전에 머리를 조아리며 비실거리는 남편을 등 뒤로 물리고는,
나 하고 한 판 붙읍시다.
삿대질을 하며 악을 써야 그나마 불이익을 당하지 않고 살 수가 있다.
그런 면에서는 아내도 나도 빵점이다.
아내와 나는 논리적으로 따져들기커녕, 내 말이 맞지요!
상대의 부릅뜬 눈만 봐도 서로 등 뒤에 숨기 바쁘다.
그러다보니 매사에 조심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속이 편치가 않다.
아내는 아내대로 대가 차지 못한 내가 못 마땅하고,
나는 나대로 한숨지을 수밖에 없다.
차라리 아내에게 쥐어 살아도 거신 여자 만났으면 얼마나 좋을까.
무슨 일이 있으면 입에 거품을 무는 친구의 아내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
친구의 아내는 공격적이다.
외모도 공격적으로 보인데다 말도 속사포다.
한 번 말을 했다하면 상대에게 말을 할 틈을 주지 않는다.
거기다 끈질긴 근성도 있다.
피플처럼 한 번 물었다 하면 상대가 백기를 들기 전에는 절대로 놓아주지 않는다.
아무리 덩치 크고 간 큰 남정네도 친구의 아내와 시비가 붙으면 학을 떼고 만다.
어쩌다 친구가 남과 시비가 붙으면, 친구를 뒤로 물리고 전면에 나선다.
그럴 때면 남동생을 때린 녀석을 두들겨 패주는 누나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친구는 아내에게 묵사발 나는 남자주위를 실실 맴돌 뿐이다.
하루는 친구의 아내를 핏대 아내에게 가당치도 않는 요구를 했다.
"내게 하는 것처럼 밖에서도 그래마 안되나?"
"아무한테나 통해요!"
아내의 그 말은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아내마저 나를 새피하게 본 모양이다.
그렇다고 화를 낼 수도 없다.
남자가 오죽 못 났으면 여편네 힘을 빌릴까.
자괴감이 들 수도 있겠지만 그 보다는 괜히 말다툼을 했다간,
사흘이고 나흘이고 밥을 못 얻어먹는 것은 고사하고,
길게는 보름이 넘도록 단식투쟁을 하는 뒷감당이 더 무서웠다.
지금은 역전이 됐지만 여차하면 밥 먹듯 밥을 굶는 그 못된 성질머리 때문에,
나는 번번이 싸움에서 지고 말았다.
처음 부부싸움을 할 때만 해도 나는 자신만만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신혼 초에 확실히 해두지 않으면 평생 고생한다는 화두를 붙들고, 아내가 굶기나 말리나 신경도 쓰지 않았다.
학창시절 자취 실력을 살려 라면을 끓여 오히려 내 쪽에서 시위를 벌였다.
제아무리 독한 사람이라도 구수한 라면냄새를 어찌 배겨낼 수 있겠는가.
꼴깍꼴깍 침을 되새김하다보면 새젓이 다 닳을 것이다.
후루룩 일부러 소리 내어 먹었다.
하지만 통하지가 않았다.
닷새 째 접어들자 이젠 내 쪽에서 급해졌다.
저러다 정말 배고파 죽는 것은 아닌가.
"제발, 좀 묵으라."
다시는 성질 건드리지 않겠다며 손이야 발이야 싹싹 빌어도 소용이 없었다.
이참에 확실히 해두겠다는 듯 아내는 열흘 넘게 굶었다.
그 후에도 몇 번 단식투쟁을 했지만,
나는 그게 그렇게 무서운 것인지 당하기 전까지는 몰랐다.
굶는 아내보다 때 거르지 않고 먹는 내 몸이 더 축이 났다.
그런데 희한 한 것은 나이가 들수록 그 증세가 슬슬 내게로 옮아온다는 것이다.
어린 아이 같이 왜 그러냐?
아내를 다독이며 내가 했던 말을 이제 내가 아내에게 듣게 된 것이다.
"이것도 좀 드셔보세요?"
"됐다."
그때 당했던 일을 복수를 하려는 것도 아닌데.
조금만 수가 틀리면 숟가락을 놓아버린다.
지난 날 내가 그랬던 것처럼 밥을 먹지 않는 나보다 아내 몸이 더 축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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