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미소 / 박경대
우리 집은 종갓집이다.
청주는 일 년 내내 떨어지지 않고 마실 만큼 제사가 자주 있다.
오늘도 제사가 있는데 이십오 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기일이다.
이른 아침부터 제수를 장만하고 있는 아내의 손이 분주하다.
일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사소한 심부름 외에는 별 도움이 되지 못하는 내가 미안할 따름이다.
몇 년 전까지는 딸아이가 고기를 굽고, 전도 붙이며 엄마를 곧잘 도왔는데,
시집을 간 뒤로는 늘 혼자서 음식을 만들고 있다.
어린 시절, 제삿날은 친척 어른 몇 분이 오셔서 음식을 장만하셨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서서히 그분들의 발걸음이 뜸해 지더니,
부모님이 돌아가시고는 그만 끊어져 버렸다.
사회적으로 핵가족화가 되고 내가 외동이다 보니 도리가 없다.
혼자서 하는 준비가 힘은 들겠지만 예전처럼 이웃에게 음식을 돌리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스럽다.
그만큼 재수 음식의 양과 가짓수를 줄인 것이다.
서재에서 음악을 듣다가 고소한 냄새에 끌려 나와 보니 주방과 거실이 복잡하다.
벌써 꽤 많은 음식이 소쿠리에 자리하고 있다.
어느 정도 만들고 나면 아내는 늘 그랬듯이 전 몇 가지와 막걸리 한 병을 가져다주리라.
입맛을 다시다 문득 책장 위에 있는 빛바랜 아버지의 흑백사진에 시선이 머문다.
생전의 아버지는 무척 엄하셨다.
다른 사람들과 손자 손녀에게는 자상하였으나,
유독 나에게만은 웃음을 보이시지 않았다.
남들은 외동이라 귀여움을 독차지 하였으리라 말들을 한다.
그러나 아버지와 함께했던 삼십 년 동안 학생이 된 뒤로는 칭찬을 들은 기억이
없다.
하긴 그럴싸한 일을 한 적도 없었으니 할 말은 없다.
휴전이 되어 제대를 하신 아버지가 고향으로 돌아오신 후,
당시로는 흔치 않았던 자전거를 구입하였다.
생활이 힘들었던 시골을 떠나 대구로 나오기 위해서였다.
군에서 받은 봉급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 장만했다니 무척 근검절약 하셨던 것
같다.
이듬해 봄, 대구로 나오신 아버지의 첫 정착지는 신천 근처의 방천시장이었다.
변변한 살림살이도 없이 하루하루 백 환씩 주는 판잣집의 방 한 칸으로 힘든 생활을 하셨다.
새벽이면 일어나서 ‘풍년초’ 한 모금을 피우고는 거리로 나선 것이다.
처음에는 과자공장에서 물건을 받아 이곳저곳의 구멍가게로 납품을 하였다.
장사가 잘되어 지금은 없어진 삼덕동 형무소 근처에 가게를 얻었고,
그곳이 내가 태어난 집이다.
항상 무뚝뚝하게 말씀하셨던 아버지도 삼덕동에서 살았던 이야기를 할 때면
얼굴에 미소가 비치며 말씀도 살가워졌다.
그 집에서의 기억은 전혀 나지 않는다.
하지만 유아기 때부터 포장이 되지 않은 진탕에서 얼마나 뒹굴고 놀았던지,
나의 몸이 항상 검둥이였다고 하셨다.
여태 별 탈 없이 건강한 것도 그때 발가벗고 뛰어 놀았던 덕분인 것 같다.
두 살 무렵 동네에서 우량아 선발대회가 열린 적이 있었다.
그때는 몸무게로 우량아를 뽑았는데,
가게 일을 도와주던 이종형님이 재미삼아 나를 데리고 출전을 하였다가 이등을 하였다.
그때 삼등을 한 아주머니가 이의를 제기하면서 나의 몸에 묻은 흙을 씻고 무게를
다시 재어보자고 할 정도였다.
오죽하면 형무소의 검붉은 담벼락에 붙어 놀고 있으면 아버지가 나를 찾지 못하였다는 이야기를 했을까.
가게는 몇 년 뒤 봉산동으로 그리고 염매시장 근처로 이전을 했는데,
차츰 번화가 쪽으로 옮기신 것을 보니 사업이 꽤 잘되었던 모양이다.
그때 아버지는 불혹을 두 해 앞두었으니 할머니를 모시고 자식 셋을 키우면서도
기반을 일찍 잡았던 것 같다.
놀던 곳이 생각나는 때가 염매시장 근처로 이사 오던 6살 무렵이었다.
어느 추운 날, 아버지의 친구 분이 무쇠 솥을 비롯하여 강정을 만드는 도구를
싣고 오셨다.
그분은 가게의 한 쪽에 솥을 걸어놓고 과자를 만들었다.
옆에서 일을 돕던 아버지는 열흘 정도 지날 무렵 자신이 생겼던지 직접 만들기
시작했다.
조청을 끓이고 박산을 비벼서 틀 위에 부어주면 둥그런 밀대로 평평히 다진 후,
사각나무 막대를 굴려가며 반듯하게 자르는 별로 어렵지 않는 작업이었다.
그해 시작한 강정 만드는 일은 매년 설을 앞두고 으레 하는 일이 되었다.
손이 많이 가는 일이라 가족 모두가 도왔다.
희미하게 남아있는 내 손의 화상 자국은 사십여 년 전 뜨거운 조청에 덴 훈장 같은
상처이다.
아버지는 그때도 걱정보다 꾸중을 하셨다.
한 푼이라도 아끼는 아버지는 반듯하게 찍으신 사진도 없었다.
돌아가시기 몇 년 전에 내가 연습 삼아 찍어 작업한 액자 속의 흑백 사진 한 장이
유일한 아버지의 독사진이다.
그 사진에서도 엄한 모습으로 나를 보고 계신다.
웃음을 보이지 않던 이유가 가슴 깊이 자리한 처자식에 대한 무거운 책임감 때문이
아니었을까.
아버지는 환갑잔치를 한 다음해 사고로 어이없이 돌아가시고 말았다.
자식의 좋은 모습과 옳은 효도 한번 받지 못하고 돌아가신 것이 어저께 같은데,
벌써 사반세기의 세월이 흘렀다.
그래도 생각해보면 늘 걱정하던 자식이 별 탈 없이 살아가고,
끔찍이 사랑하던 손자, 손녀가 벌써 성인이 된 것을 흐뭇해하리라.
아버지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지난 추억들이 한 조각씩 떠오른다.
가끔은 무언의 대화를 나누기도 하는데 항상 엄하셨던 아버지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러나 비록 표현은 하지 않으셨지만 내가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처럼,
아버지 역시 나를 무척 사랑하였으리라.
사실 얼마전부터는 엄한 모습에서 오히려 아련한 슬픔과 감사함을 느끼고 있다.
한참 옛 생각에 잠겨있는데 아내가 상을 들고 왔다.
기대했던 대로 막걸리 한 통과 안주가 차려진 술상이다.
오늘 낮술은 순전히 아버지 덕분에 먹는 것이다.
‘아버지 감사합니다’하며 올려다보니 오늘은 웬일인지 따뜻한 미소를 띠고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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