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pot of Jeju azbang

제주아즈방의 이런 저런 여러가지 관심사 창고

🤍 文 學/隨筆 . 131

'운문사(雲門寺)의 노송(老松)' / 변종호

운문사의 노송 / 변종호 늘어선 노송군락이 방문객을 압도한다. 천년 고찰을 수호하느라 저마다 가슴팍에 상흔을 새기고 있다. 긴 세월 강인한 생명력으로 뿌리내리고 줄지어 서 있는 노거수는 오백 나한의 모습이다. 일주문 대신 들머리에 도열한 소나무는 하나같이 일제의 만행을 간직하고 있다. 수령 일백 년을 훌쩍 넘어섰을 노송, 제 몸을 톱으로 유린당할 때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도리 없이 진을 뽑아야 했던 민초의 가슴도 쓰렸으리라. 청도 운문사를 찾아가는 길이다. 정갈한 비구니 도량에는 보존하는 보물도 많지만 꼭 찾아보고 싶은 것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처진소나무'이다. 우리나라 소나무 중 세 번째로 지정됐으니 그럴만한 이유가 있으리라. 매년 음력 삼월삼짇날이면, 비구니 스님들은 오백 년을 살아낸 노송에 막..

'일조진(一朝塵 )' / 맹난자

일조진(一朝塵) / 맹난자 은퇴 이후의 삶이란 언뜻 평온해 보이나 기실은 좀 지루하다. 바쁘지 않게 해가 뜨고 별다른 일 없이 해가 진다. 그날이 그날 같다지만 몸안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그렇지 않다. 하루에도 수만 개의 세포가 죽고 다시 태어나며, 하루 동안에도 마음은 대략 5만 가지를 생각할 정도로 산란하게 요동치며 변화를 계속한다. 항상(恒常) 한 것은 하나도 없다. 어제와 달라진 나를 감지하며 천천히 물러나는 일을 익히는 중이다. 액자 '虛心'에 눈이 더 간다. 글씨를 써주신 오영수 선생도 벌써 딴 세상 사람이 되셨다. 요즘 나는 를 통해 지인들과 함께한 추억의 시간 속으로 곧잘 빠져들곤 한다. '지나친 그 세월이 나를 울립니다.' 이 멜로디를 기타로 들려주시던 선생의 모습도 그립고, "파도여 파도..

'고산준령을 오르며' / 변종호

고산준령을 오르며 / 변종호 가기 싫다고 아니 갈 수도 미룰 수도 없다. 정해진 길이 아니라 예측 불가하며 가는길이 서로 다르니 끝까지 함께할 이도 없다. 더러 주저앉지만 다시 일어서 가야 하는 길고도 지루하며 험준한 산행이다. 폭염에 덕유산을 낙점했다. “어제는 한 치 앞도 안 보였는데 오늘은 잘 보이겠네요,” 곤돌라 승선권을 체크하는 서른 중반의 덩치 큰 여직원 말이다.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기분이 좋아진다. 장소와 날씨가 잘 맞아떨어진 셈이다. 문명의 이기로 몸이 호사한다. 걸어서 오르면 세 시간은 족히 걸린다. 설천봉이 가까워지자 주목 군락지가 눈에 들어온다. 고산의 운치는 역시 노거수인 주목이다. 살아 천 년 죽어서 천 년을 간다는 고사목이 생의 역사를 모두 털어내고 마들가리로 서 있다. 저리 ..

'물 좋고 정자 좋은 데가 어디 있으랴' / 곽흥렬

물 좋고 정자 좋은 데가 어디 있으랴 / 곽흥렬 물은 언제나 가장 완전한 평형을 지향한다. 설사 일시적으로 그 높낮이가 다를지라도 이내 평형상태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 이것이 물의 이치다. 우리 사는 세상사도 어김없이 이러한 물의 이치를 닮았다. 만사(萬事)는 누구에게나 지극히 공평한 것 같다. 물 좋고 정자까지 좋은 데가 어디에 있을까 싶다. 이것이 좋으면 저것이 나쁘고, 저것이 좋으면 이것이 또 나쁘게 되어 있는 것이 조물주의 섭리다. 학교 공부를 잘하는 사람은 기계 다루는 데 서툰 반면, 기계 조작에 능란한 사람은 대체로 학업에는 흥미가 적은 법이다. 다이내믹한 운동을 좋아하는 이들은 바둑이나 서예 같은 정적인 취미생활에는 그다지 소질이 없는 경향이 있다. 다방면에 능해 이른바 팔방미인이란 소리를 ..

'마음으로 그려보는 세월의 그림자' / 김재형

마음으로 그려보는 세월의 그림자 / 김재형 마음이란 사람의 몸속에 잠재되어있는 지식, 감정, 의지 등의 정신활동을하는 행위를 말 한다. 그래서 특히 대인 관계에 있어서 마음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마음이 없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고, 먹어도 그 맛을 모른다 했다. (心不在焉,視而不見,聽而不聞,食而不知其味) 하기야 마음이 지척(咫尺)이면 천리도 지척(咫尺)이요, 마음이 천리(千里)면 지척(咫尺)도 천리라는 말이 예로부터 전해내려 오고 있다. 어느 철인이 말하기를 마음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만이 삼라만상의 변화무상한 실체를 느낄 수있고, 참다운 진실(眞實)도 알 수있다 했으니, 그러고 보면 사람의 본체는 그 사람의 육신(肉身)이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이 아닐까? 생각 컨데 마음먹기에 따..

'밥 먹었느냐' / 정태헌

밥 먹었느냐 / 정태헌 끼니때 밥 먹는 일보다 절실한 게 또 있을까. 마음 편한 사람과 밥상머리에 마주 앉아 하는 식사는 행복하다. 뿐인가, 좋은 사람들과 둘러앉아 담소하며 먹는 밥은 소찬일지라도 즐겁다. 예수도 제자들과 둘러 앉아 담소하며 밥 먹는 일을 즐겼다. 그래서 당시의 말 좋아하는 무리는 예수가 비천한 이들과 먹는 일에만 열이 났다고 비난 했다. 그래도 예수는 잡혀가기 전날 밤까지 제자들과 함께 만찬을 즐겼다. 이처럼 기꺼운 사람들과 정담을 나누며 밥 먹는 일보다 더 값지고 성스러운 게 세상에 또 있으랴. 밥은 목구멍으로 넘어가 피가 되고 살이 되어 값진 목숨을 이어준다. 터미널에서 막냇자식을 기다리는 중이다. 외지에서 공부한답시고 석 달 만에 집에 오는 터라 마중 나와 있다. 버스 도착 시각이..

'거시기 3대' / 한인자

거시기 3대 / 한인자 나는 거시기 3대이다. 1대 외할머니에 이어 2대 어머니, 그리고 내가 뒤를 이어 3대가 되었다. 거시기란 말은 내가 어렸을 때 외할머니한테 많이 듣던 말이다. 그리고 어머니가 다시 외할머니만큼 나이 들었을 때, 또 다시 어머니에게 많이 듣던 말이기도 하다. 외할머니는, “얘, 인자야, 저~ 거시기 가져오너라.” “할머닌, 거시가가 뭐예요?” “저, 그 왜 거시기 있지 않니.” 이렇게 할머니의 말 속에선 거시기란 말이 수시로 튀어나왔다. 난 할머니의 거시기가 무엇을 지칭하는지 몰라서 가슴이 답답했다. 할머니가 왜 그렇게 그 말을 자주 쓰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60대가 되자, 어머니도 외할머니처럼 툭하면 거시기 가져오라고 하셨다. “어머니도 참, 외할..

'아름다운 소리들' / 손광성

아름다운 소리들 / 손광성 소리에도 계절이 있다. 어떤 소리는 제철이 아니면 제맛이 나지 않는다. 또 어떤 소리는 가까운 곳에서 들어야 하고, 다른 소리는 멀리서 들어야 한다. 어떤 베일 같은 것을 사이에 두고 간접적으로 들어야 좋은 소리도 있다. 그리고 오래전에 우리의 곁을 떠난 친구와도 같이 그립고 아쉬운 그런 소리도 있다. 폭죽과 폭포와 천둥소리는 여름에 들어야 제격이다. 폭염의 기승을 꺾을 수 있는 소리란 그리 많지 않다. 지축을 흔드는 이 태고의 음향과 ‘확’하고 끼얹는 화약 냄새만이 무기력해진 우리들의 심신에 자극을 더한다. 뻐꾸기며 꾀꼬리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폭염 아래서는 새들도 침묵한다. 매미만이 질세라 태양의 횡포와 맞서는데, 파도처럼 밀려오는 그 힘찬 기세에 폭염도 잠시 저만치 비껴..

'다시 듣고싶은 호랑이의 꾸중' / 김 학

다시 듣고싶은 호랑이의 꾸중 / 김 학 긴 장마철 내내 방구석에 갇혀 책과 함께 시간을 죽였다. 책과 나는 시간을 죽인 공범이다. 영원한 고전이라는 연암 박지원의 '虎叱(호질)'을 다시 읽었다. 호랑이가 사람을 꾸짖는다는 내용의 고전소설이다. 이솝우화 못지 않게 재미가 있었다. 연암은 어쩌면 그렇게 호랑이에 대해서 소상하게 잘 알고 있었을까? 혼자 그 을 읽으면서 때로는 얼굴을 붉히고, 때로는 소리내어 웃었다. 짧은 글 속에 그렇게 깊은 뜻을 담다니, 연암의 글 솜씨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이란 고을에는 수천 권의 책을 펴낸 덕망 높은 40대 선비 북곽 선생이 살았고, 그 근처에는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어 수절하던 동리자라는 미인이 있었다. 왕은 일찍이 두 남녀의 명성을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야시비' / 서경희

야시비 / 서경희 야시비가 내렸다. 반짝, 내렸다. 야시비는 언제나 반짝! 하고 내린다. 야시는 여우의 경상도 사투리로 여름날 야시처럼 깜찍하게 잠깐 내리는 비를 ‘야시비’라 한다. 경상도 출신의 내가 서울에 살면서 가장 매력을 느끼는 것이 서울 사람들의 말씨다. ‘서울에 사는 보통 사람들이 쓰는 언어’인 서울 말씨는 우리나라 표준어 제정의 기준이면서, 그 아름다움이 뛰어나 보인다. 서울이라는 비만의 도시를 어루만져주는 부드러운 융단과 같다고 느끼며 자주 나의 부러움을 산다. 말씨는 아니지만 때로 서울 말씨만큼이나 어여쁨을 주는 시골말도 만난다. 그 고장 특유의 정서가 뚝뚝 흐르는 토담집 삽짝에 서있는 접시꽃 같은 정겨움을 주는 말이다. 일테면 전라도 사투리 ‘뭐땀시’(무엇 때문에)가 그러한데, 나는 이..

'액자에 대한 유감' / 목성균

액자에 대한 유감 / 목성균 지방관아 아전의 집, 품격을 못 갖춘 거실 벽면에 길이 170cm, 폭 50cm쯤 되는 서예(書藝)액자가 하나 걸려 있다. 액자는 열네 자의 한자를 초서로 쓴 것인데, 내 얕은 진서(眞書) 실력으로는 고작 여섯 자밖에는 알 수가 없었다. 초서라 모르는 글자를 옥편으로 찾아볼 수도 없었다. 글자의 앞뒤를 어림짐작으로 맞춰 가며 유추해석을 시도해 보았으나 도저히 해석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만 표구(表具)의 용도로만 걸어 두고 볼 뿐이었다. 내용을 알고 모르고 간에 허전한 벽면에 잘 만든 표구가 한 점 환경정리용으로 걸려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아직 친구들 외에는 이 액자의 내용에 대해서 물어 본 사람이 없었다. 다행한 일이다. 우리 집에는 아직 이 액자의 내용에 진지한 관..

'고향집을 허물면서' / 목성균

고향집을 허물면서 / 목성균 잠실(蠶室)로 쓰던 헛간에 세간을 전부 옮겨 놓고 나자 하루해가 설핏했다. 둘째와 막내는 돌아가고 나는 안방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기로 했다. 아침 일찍 포클레인이 집을 헐러 오기로 되어 있기도 했지만, 나는 내일이면 허물어질 이 집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고 싶었다. 세간을 비워 낸 빈집은 마치 공연을 끝내고 장소를 옮겨 가기 위해서 내부를 비워 낸 서커스단의 빈 천막처럼 썰렁했다. 기우는 늦가을 엷은 저녁 햇살이 아쉬운 듯 마루 끝에 잠시 머물렀다. 마음 둘 곳이 없어 마당에 서성거렸다. 세간이래야 할머니와 어머니가 시집올 때 해 가지고 온 낡은 장롱을 비롯해서 이불과 옷가지, 그리고 옹기와 사기들이 전부지만, 우리 식구들의 기쁜 웃음과 허망한 한숨이 밴 피붙이 같은 세간들이다..

'누비처네' / 목성균

누비처네 / 목성균 아내가 이불장을 정리하다 오래된 누비처네를 찾아냈다. 한편은 초록색, 한편은 주황색 천을 맞대고 얇게 솜을 놓아서 누빈 것으로, 첫애 진숙이를 낳고 산 것이니까 40여 년 가까이 된 물건이다. 낡고 물이 바래서 누더기 같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시골에서 흔치 않은 귀물이었다. “그게 지금까지 남아 있어?” 내가 반색을 하자 아내가 감회 깊은 어조로 말했다. “잘 간수를 해서 그렇지.” 그리고 “이제 버릴까요?” 하고 나를 의미심중하게 쳐다보며 물었다. 그건 분명히 누비처네에 대한 나의 애착심을 알고 하는 소리다. “놔둬.” 그러자 아내가 눈을 흘겼다. ‘별수 없으면서-’ 하는 눈짓이다. 그것은 삶의 흔적에 대한 애착심은 자기도 별수 없으면서 뭘 그리 체를 하느냐는 뜻이다. 나는 아내의..

'명태에 관한 추억' / 목성균

명태에 관한 추억 / 목성균 늦가을이나 초겨울이면 우리 집 부엌 기둥에 명태 한 코가 걸려 있었다. 산골 그을음투성이 초가 부엌 기둥에 걸린, 다소곳한 명태 한 쌍은 '천생연분'이란 제목을 달고 싶은 한 폭 정물화였다. 이슥해서 취기가 도도해진 아버지가 명태 한 코를 들고 와서 마중하는 며느리에게, "옛다" 하며 건네주는 걸 본 적 있다. 남용이 아닌가 싶은 아버지의 호기가 참 보기 좋았다. 그 날, "아버님, 저녁 진짓상 차릴까요?" 며느리가 묻자 아버지는, "먹었다" 하시며 두루마기를 벗어서 며느리에게 건네주고 사랑으로 들어가셨다. 며느리는 두루마기 자락을 추녀 밑에 걸어 놓은 등불에 비춰 보더니, 즉시 우물로 가지고 가서 빨았다. 아버지는 취한 걸음으로 이강들을 건너서, 은고개를 넘어, 하골 산모퉁..

'섬진강을 따라가면' / 정목일

섬진강을 따라가면 / 정목일 나는 곧잘 섬진강을 찾아 나선다. 지리산과 섬진강이 만나는 하동에서 구례까지의 길을 좋아한다. 대개 쌍계사까지 갈 경우가 많지만 화엄사, 실상사, 연곡사 등 지리산 사찰들을 둘러보고 남원을 거쳐 함양, 진주로 일순하는 길을 택하기도 한다. 왜 이 길을 좋아하는가. 우리 산수의 절경에 푹 빠져서 말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너무 좋으면 말이 소용없는 법이다. 그냥 마음으로 온몸으로 느끼면 될 뿐……. 섬진강을 따라가면 첩첩한 산들이 기러기 날개짓으로 날아오고, 지리산 어느 사찰의 범종 소리가 흘러가는 양하다. 영원의 하늘을 향해 번져가는 그리움의 선형(線形) 같아 보인다.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에서 섬진강 쪽을 바라보면 여덟 겹의 산들이 첩첩으로 드러나 보인다. 거대하고 우람한 산..

'재회(再會)' / 최호택

재회(再會) / 최호택 할아버지는 마지막으로 눈물을 주르르 흘린 후, 당신 아들과 조카, 손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눈을 감으셨다. 마침내 여섯 달 동안의 투병 생활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내가 스물일곱이 되던 1978년 양력 일월이었다. 사랑방 문이 열리고 곡哭을 하라는 큰 당숙(堂叔)의 말씀에 안상제들과 친척들이 일제히 엎드려 곡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더 이상 할아버지와 나란히 잠자리에 들 수 없고, 할아버지를 뵐 수 없다는 생각에 이르자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할아버지는 여든 두 해를 사셨지만 최근 여섯 달 동안이 더 길게 느껴졌으리라. 요 며칠 동안 더욱 힘들어하시는 할아버지를 아무도 고통으로부터 구해내지 못했다. 잠시 동안의 울음을 그친 당숙과 재당숙(再堂叔)은 밖으로 나와 담배를 피워 ..

'선풍기' / 목성균

선풍기 / 목성균 처서가 지났다. 그늘에서는 더 이상 바람이 필요 없으니 올여름도 다 갔다. 언제부터인지 선풍기가 거실 구석으로 밀려나서 한가하게 쉬고 있다. 소임을 잃은 선풍기의 모습이 너무 초라해 보인다. 바람개비를 감싸고 있는 안전망이 군데군데 도장이 벗겨져 녹이 슬었고, 눈처럼 하얗던 플라스틱 몸체는 빛이 바래서 누렇다. 막내 진국이를 낳고 산 선풍기다. 진국이 나이 스물일곱 살이니깐 선풍기 나이도 스물일곱 살이다. 기계의 나이치곤 고령이다. 선풍기가 우리 집 형편을 돕느라고 무병장수해 주는 것 같아서 고마운 생각이 든다. 진국이는 복지경에 태어났다. 산모가 세 이레를 지났는데도 원기를 못 찾고 땀을 줄줄 흘리면서 헐떡거렸다. 갓난 것 이마에도 땀띠가 송골송골했다. 우리는 달동네 서향 문간방에 세..

'사람 사이의 틈' / 이해인

사람 사이의 틈 / 李海仁 아파트 사이사이 빈 틈으로 꽃샘 분다 아파트 속마다 사람 몸 속에 꽃눈 튼다 갇힌 삶에도 봄 오는 것은 빈 틈 때문 사람은 틈 새 일은 늘 틈에서 벌어진다. 김지하 시인의 『중심의 괴로움』이란 시집을 읽다가 만나게 된 ‘틈’이라는 이 시가 요즘 내 마음 안에서 떠나질 않는다. 창 틈으로 스며들어 오는 햇빛, 달빛, 바람, 높은 산에서 바위 틈을 비집고 돋아나는 아름다운 들꽃, 우리 집 장독대 옆, 눈에 잘 띄지도 않는 좁은 돌 틈을 비집고 무성하게 자라나는 풀들, 그리고 바쁘게 일을 하다 잠시 쉬어보는 시간과 시간 사이의 틈, 하루에도 수없이 어떤 틈들과 만난다. 자연과 일상의 시간 사이에 어떤 틈이 있듯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틈이 있다. 상대방을 넉넉히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

'구수하고 시원한 된장국과 생태찌개' / 유혜자

구수하고 시원한 된장국과 생태찌개 / 유혜자 어느 명사가 일류음식점에 손님들을 초대하고, “보잘 것 없는 음식으로 모셔서 죄송합니다만 많이 드십시오” 했다. 그 말을 들은 음식점 주인이, “지금한 말 취소하십시오. 우리 집 음식은 시내에서 가장 맛있다고 소문난 집입니다.”고 항의했다 한다. 내가 소개하고자 하는 신선한 배추 넣은 된장국과 생태찌개도 맛은 좋지만 평범한 음식이다. 그러나 ‘보잘 것 없는 음식’이라고 폄하하면 아마 그 음식점 주인도 화를 낼 것이 분명하다. 정동, 러시아공사관 건물 한쪽이 남아 있는 광장에서 신문로로 나오는 골목에 야트막한 한식집이 있었다. 점심시간이면 샐러리맨들로 꽉 차서 문 바깥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때는 고층빌딩이 가려 있지 않아서 멀리 보이는 인왕산..

'채송화 이야기' / 김진수

채송화 이야기 / 김진수 참 이상한 일이다. 글이 손에 잡히지 않으면 괜히 불안하다. 계절이 자꾸 지나건만 도대체 글이 잡히지 않는다. 그러던 가을 어느 날 밤이었다. 서재에 불을 끄고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는데 책상 위에 걸린 액자 하나가 어렴풋이 눈에 들어왔다. 문단 데뷔 기념으로 선물 받은 채송화 액자였다. 누가 밀어올린 걸까. 돌각사리 틈 사이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액자 속의 채송화. 불을 켜자 수줍고 해맑은 어린 소녀같이 까르르까르르 색동웃음을 마구 토해내는 것 같다. 밤하늘 은하의 별무리 같기도 하고, 어느 여왕이 보석상자를 엎질러 놓은 것 같기도 하였다. 나는 곧바로 컴퓨터 창을 열었다. 옛날 페르시아에 보석을 좋아하는 여왕이 살았다. 얼마나 보석을 좋아했는지 자신의 백성들과 보석을 한 개씩..

'어머니의 강' / 김애자

어머니의 강 / 김애자 강가에 차를 대고 입적(入寂)하신 듯이 잠든 어머니 얼굴을 들여다본다. 세수 92세가 되고부터 염주도 놓고,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침이 마르도록 읊으시던 귀거래사도 잊으셨다. 어머니의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던 삶의 숱한 편린들이 삭제되어버린 이후, 그분은 그저 먹고 자는 원초적인 본능에 따라 무위로 움직일 뿐이다. 사람이 과거의 기억에서 놓여난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뇌 세포가 거반 손상된 어머니는 살아있으되 살아 있는 자가 누려야할 모든 권리를 상실하였다. 무심무념(無心無念)의 상태에서 검불 같은 노구(老軀)도 운신하기가 귀찮고 힘겨워, 하고많은 날을 방안에서만 지내신다. 정체된 삶, 닫혀버린 시간 속에서 아무런 의미도 느끼지 못한 채 겨울을 건너 이 봄날, 강가에 나오시었다...

'소찬(素饌)' / 남해진

보온밥통 뚜껑을 열고 공깃밥을 뜬다. 정수기 찬물을 내리며 몇 번 가신다. 두레박으로 퍼 올린 우물물에 말아 먹던 꽁보리밥 맛이랴. 장독 속에서 누렇게 숙성된 된장을 떠올리며 풋고추로 쌈장을 찍는다. 밑반찬도 동나고 입맛도 깔깔하다. 배는 허전한데, 먹어도 그만 안 먹어도 그만이라는 어정쩡한 생각이 들 때, 담백하고 개운한 뒷맛에 끌려 혼자 먹는 점심(點心)이다. 우량아로 태어났다 하나 잔병치레를 하도 많이 해서 그랬는지 어릴 때 나는 골골했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음식을 대하면 괜히 트집을 잡았다. 입이 짧아 두 살 위아래 누나나 여동생 몰래 챙겨주시던 고기반찬도 비위에 거슬려 마다하고는, 김치나 나물반찬에 젓가락을 대며 깨작거렸다. 그뿐 아니라, 어머니가 만든 음식이 아니면 꺼림직한 생각이 들어 아예 ..

'오아시스와 신기루' / 변해명

내가 실크로드를 다녀온 지 10년이 지나고 있지만, 아직도 명사산(鳴沙山) 월아천(月牙泉)의 사진을 보면, 그 신비하고 불가사의한 오아시스와 신기루가 지워지지 않는다. 해발 1.800m에 위치한 사막의 오아시스, 그 오아시스가 있는 명사산은 바람에 모래가 가각거리는 소리가 새소리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사방이 금모래로 덮인 모래 산이요, 바람이 불면 그 모래들이 출렁이며 움직여서, 금방 자른 모습의 모래 산을 만들어 놓는데도 월아천만은 어떤 바람이 불어도 모래가 밀려오거나 장소의 변화가 바뀌지 않고 작은 오아시스로 모래산 속에 몇 천 년을 그렇게 있는 것이다. 월아천은 초승달의 어금니 같다고 붙여진 이름인데, 초승달처럼 휜 작은 호수에 물이 고여 있는 것이다. 둘레로 몇 그루의 나무들이 자라고, ..

'우상(偶像)의 눈물' / 구활

우상의 눈물 / 구활 간밤에 어머니가 오셨다. 무슨 일로 오신 걸까. 이렇다 할 우환도, 특별한 걱정거리도 없는데, 온종일 궁금했다. 꿈속 방문의 이유를 몰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최근 행적을 되짚어 보니 그럴 한한 꼬투리 하나가 잡혔다. 아하, 이것 때문에 오신 것이로구나. 저승에서도 아버지와 한 집에 살고 계시다면 이런 저런 시중드시느라 몹시 바쁘실 텐데. 나는 일곱 명이 한 달에 한 번 점심을 먹는 모임의 늦깎이 회원이다. 예술을 전공하거나 애호가들로 구성되어 있어, 화제는 문학, 음악, 미술, 조각, 공연, 건축, 음식 등으로 무척 다양하다. 조각하는 분이 “회원들의 흉상을 제작하여 전시회를 열 때 작품으로 내 놓겠다”고 했다. 회원들이 수긍하는 걸로 일단 결론이 났다. 나는 엉거주춤한 상태..

'요행수(僥倖數)' / 백남일

내 신접살림은 한강이 한눈에 내려다 뵈는 금호동 산등성이, 그것도 셋집 단칸방에 틀었다. 자고새면 물통을 들고 동네 초입 저지대에 있는 공동 수돗가로 내달아야만 했는데, 그때 턱밑으로 유유히 흐르고 있는 강물은 숨찬 갈증을 풀어주곤 했다. 사는 일 그렇게 고되고 몸에 부쳤어도, 내 집 마련의 꿈에 부풀었기에 늘 긍정의 몸짓으로 하루하루의 삶을 아귀차게 엮어나갈 수 있었다. 그렇게 만 7년의 세월이 흘렀다. 셋째 막둥이가 태어나던 그 해, 오매불망 그리던 새집 대문간에 내 이름 석 자의 문패를 달 수 있었다. 비록 삼간 슬래브 서민 주택이었지만, 두 다리 쭉 펴고 평생소원이었던 내 명의의 주택에 몸을 눕히니 세상 부러울 게 없었다. 여우도 편히 쉴 수 있는 감춰둔 굴이 있고, 허공을 나는 새도 내려와 앉을..

'걸레' / 안병태

걸레 / 안병태 여덟 폭 차곡차곡 접은 타월로 방을 닦는다. 방 두 개까지는 조신하게 잘 닦았으나 세 개째부터는 게으름도 나고 무릎도 아파, 초등학생 시절 교실 마룻바닥 닦던 자세로 좌르르 냅다 달리면서 방을 닦다가, 안주인으로부터 잔소리를 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눈치껏 건성건성 날치기로 닦는다. “이놈아 그게 무슨 짓거리냐, 마음 속 먼지를 닦듯 법당바닥을 닦아라!” 문득 소백산 도솔암의 노스님 호령소리가 들린다. 사십 년 전 그때 법당바닥 닦던 자세 역시 엉덩이로 하늘을 찔렀었나보다. 법당바닥과 마음바탕이 둘이 아니라는 진리를 깨닫기는커녕, 새벽 세시 기상만은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입산한 지 보름 만에 퇴출당해 하산하고 말았었다. 사십 수년 세월을 훌쩍 건너온 지금, 그 시절 그 노승의 꾸중을 이..

'군불을 지피며' / 백남일

불을 땐다. 아궁이에 화목을 밀어넣고 잎나무 불쏘시개로 불을 사른다. 이때 불씨가 자리 잡을 때까진 불집을 쑤석거려선 안 된다. 세상사 어디 뜸들이지 않고 되는 일 있던가. 쌍 도리 채운 남향받이 육간 생가. 칠남매가 성장하여 대처로 떠나고, 이제는 적막공산에 홀로 앉아 그 옛날의 번화를 반추하고 있다. 장손의 책무가 아니더라도 도심의 소음으로 귀가 먹먹해질라치면, 나는 지체 없이 고향으로 향한다. 하루가 다르게 변모하는 첨단 문명의 소용돌이에 표류하는 자존을 붙들기 위해, 벼 배동서는 논두렁길을 걷는다. ​ 아궁이에 불을 지핀다. 빈 솥에 물을 붓고 군불을 때는 것이다. 달포 가까이 비워둔 휑한 아궁이가 불길을 선뜻 받아들이질 못한다. 그러나 마른나무에 불이 붙고 불목이 덥혀지기 시작하면, 마른갈이 논..

'숭늉' / 백남일

내 단골 밥집은 식사 뒤면 으레 숭늉을 내놓았다. 눌은 밥물이 다색으로 우러난 구수한 뒷맛이 좋아 나는 종종 그 집을 찾는다. 숭늉은 밥을 푸고 난 뒤 물을 조금 붓고 끓인 숙수(熟水) 또는 숙랭(熟冷)을 뜻하는 순수 우리말이다. ‘계림유사(鷄林類事)’에선 숙수를 '熟水曰泥根沒'-이근몰(익은물)이라 칭했는데, 숙랭은 처음 ‘슉랭’으로 표기했다가 후에 ‘숭늉’으로 변했다는 게 언어학자들의 공통된 견해이다. 그런데 요즘은 전기밥솥 사용이 보편화 돼서 숭늉 맛을 볼 기회가 줄어들어 아쉽기 그지없다. 과거 우리의 취사방법은 아궁이 위의 부뚜막에 무쇠 솥을 걸고 밥을 지었다. 이때 솥 바닥에 눌어붙은 누룽지를 처리하기 위해 물을 두르고 한소끔 불을 지피면 꿀물 빛 숭늉이 되었다. 중국에선 밥을 지을 때 물을 많이..

'애음산필(愛飮散筆)' / 백남일

내가 술잔을 입에 대기 시작한 건 갑년(甲年)이 지나서였다. 소싯적엔 밀밭만 스쳐도 얼굴이 화끈대는 것 같아 술과는 인연을 맺지 못했다. 더구나 아버님이 간경화로 일찍 타계하신 그 원인이 알코올 중독에서 비롯됐기 때문에, 나로선 술이 저주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종갓집 기제사는 어찌도 그리 자주 찾아오던지, 아랫목에 들여 논 술독에서 뽀르륵 소리가 나기 시작하면 애주가이신 당신은 기다렸다는 듯, 용수 박아 웃국을 시음하시곤 했다. 지금도 향가(鄕家) 대숲에 오르면, 일제말의 악랄한 수탈 행위의 눈길을 피해 파 놓은 밀주 항아리 구덩이가 피압박 민족의 아린 상흔(傷痕)으로 남아 있다. 그땐 밀주 단속반원과 산림감수가 서낭당 재빼기에 나타났다 싶으면 온 동네 사람들의 입술이 퍼렇게 질려버리고 말았다. ..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 / 원영

해우소(解憂所)에 앉아 근심을 풀고 내다보니, 창문 너머로 연보랏빛 오동꽃이 곱게 피었다. 옛날에는 딸을 낳으면 오동나무 한 그루를 마당에 심었다가 딸이 커서 시집갈 때, 그 나무로 가구를 짜 보냈다던데, 암자 뒤꼍에 웬 오동나무가 있나 싶다. 그나저나 꽃이 빨리 지는 것이 여느 해보다 짧은 봄이 되려나 보다. ​ 이상한 것은 낙엽 지는 가을보다 꽃잎흩날리는 봄날에 무상(無常)함을 더 자주 느낀다는 점이다. 물론 그 덕분에 따스한 봄볕 아래 삶을 성찰하기도 하고, 가벼이 날리는 꽃잎 바라보며 소리 내어 시를 읽기도 한다. ​ 하루는 절문을 닫아걸고 가까운 곳이라도 걸어볼까 하여 길을 나섰다. 스님들에게도 잠시 쉬시라 일러두고, 애틋한 망상이나 하며 먼 동네 한 바퀴 휘~ 돌기로 했다. 청허 선사는, 花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