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pot of Jeju azbang

제주아즈방의 이런 저런 여러가지 관심사 창고

🤍 文 學/隨筆 .

'동해구(東海口)를 찾아가다' / 김현태

아즈방 2024. 4. 3. 13:07

 

 

갈매기 떼 지어 내려앉아 한가로이 쉬고 있는 조용한 바닷가,

한 시대 나라의 수호신을 모시던 성지였고, 영토방위의 최전선이었다.

지금 동유럽 우크라이나 동남부 해안지역 마리우폴 니코폴처럼,

강 하구 해안의 군사 요충지였던 곳이다.

한반도를 중심으로 통일국가를 이룩하였으나,

내부의 사회적 갈등을 해소하지 못하고,

바다를 건너 끊임없이 침입해 들어오는 왜적을 방어하는 전초기지였던 곳이다.

고요한 신새벽 잠에서 깨어나서 가만히 누워있었다.

멀리서 바다의 신음 소리가 나지막이 들린다.

일찍 일어나신 할아버지께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신다.

“바다 끓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풍파가 오려나 보다.”

장마철 태풍이 올 때면 깊은 바닷속 물이 일렁이면서,

바닥의 자갈 끌리는 소리가 ‘싸르~르~~’ 환청처럼 들린다.

구름이 낮게 깔리고 벌레도 날지 않고,

기상예보인 양 어르신들께서는 허리 통증을 호소하시고,

평소 들리지 않던 산 너머 동해남부선을 달리는 열차의 기적소리가 아스라이 들리던 기억 속 고향을 찾아간 짧은 일정이다.

석굴암을 감싸 안은 토함산 동쪽 기슭 골골을 휘돌아 내린 물과 달을 머금고,

기림사 골굴사를 품은 함월산 골짝 골짝에서 쏟아져 내린 물줄기가,

성난 야수처럼 내달려 큰 하천을 이루니,

평소 하얗게 배를 드러내놓고 가만히 누워있던 대종천이 일어나 꿈틀대며 넘쳐흘러 주변의 중보들 갓밑들에 땀 흘려 가꾸어 풍요롭게 익어가던 농작물을 휩쓸어 가는 난리를 겪는다.

높은 가을 하늘을 보기 전에 두세 번의 태풍이 더 지나가고 나서야 산과 들에 고요가 찾아든다.

그 산천을 휘돌아 온 물이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 어귀에,

호국용이 머무시는 감은사 터가 있고,

바다 가운데 대왕암이 솟아 있는 신성한 해역 바로 동해구 이다.

지금의 동경주로 불리는 경주시 문무대왕면 봉길리 모래 해변과 감포읍 대본리 사이로 대종천이 동해로 통하는 물길이 열려있는 범상치 않은 해역이다.

인근 지역에는 먼 선대 때부터 전해오는 얘기가 있다.

‘풍파가 올 때면 바다에서 종소리가 들린다.’라는 이야기이다.

국태민안을 위해 나라에서 건립한 황룡사에는 구층 목탑과 더불어 50만 근이나 되는 대종이 있었다고 한다.

몽골군의 침입으로 절과 탑은 불타 없어지고,

대종은 배에 실어 가져가려 하다 이곳 바다 수호신이 진노하여 파도를 일으켜서 빠뜨려 버렸다.

그래서 풍파가 일 때면 그 소리가 울린다 하는 이 말을 이 지역 노인들께서는 할아버지로부터 들어온 이야기로, 할아버지 이전 조상 대대로 전해 내려왔다.

몸 구석구석 통증이 저려오는 저기압이 폭풍우를 몰고 오는 철이 되면,

종소리가 들리기를 기다린다.

그 종을 찾기 위해서 한때 애써 탐사를 한 적도 있었다.

서양 역사 속 기록으로만 남아 있던 고대 트로이 목마처럼,

전설이 아닌 실제적 역사가 되어 불쑥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신라 문무대왕께서 삼국을 통일하여 찬란한 왕국을 건설하고서도,

죽어 영혼까지 나라를 지키시겠다 하며,

“내 죽어 바다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 는 유언을 남기셨다.

도처에 명산 명당을 두고서도 기꺼이 바다의 차가운 물속에 묻어 달라 하신 그 정신이야말로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아니겠나.

만천하에 귀감이 되고, 길이 남길 숭고한 정신이시다.

세상을 호령하던 권력자들을 보라!

진시황의 여산릉,

이집트 왕들이 잠든 피라미드,

수많은 제왕의 무덤,

거대한 위용의 사후 궁전을 남겼다.

영생을 꿈꾸며 호화롭게 장식하여 길이 남기고 싶은 것이야 인간의 보편적 욕망이 아니던가.

청소년 시절 시골에서 초중학교 다니던 때의 일들이 새삼스레 떠오른다.

학교가 있는 면 소재지 어일리에서 2십여 리 들길을 땡볕 속에 몇 시간을 걸어서 대왕암 앞 모래사장 해변에 자주 갔다.

방학이 되면 친구들이랑 무리 지어 찾는 특급 피서지이다.

까마득해 보이던 그 들길에는 과속 방지 카메라가 설치된 새 길이 나서 몇 분이면 닿았다.

인근 마을 사람들은 수중에 솟아있는 그 바위를 ‘대왕바우’라고 불렀다.

헤엄을 쳐서 서로가 실력을 뽐내며 건너가 바위에 올라앉아 놀기도 했다.

인근에 사는 친구가 들려주는 얘기로,

“해녀들이나 물 일하는 사람들도 대왕바우 중앙부위 물속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했다.

아무리 더운 여름날이어도 중심부 십자형 가운데 물속에 들어가면 ‘감기 든다’라 했었다.

그때는 그곳이 신성한 왕릉이라는 사실은 까마득히 모르면서 무언지 모르나 신성시하던 곳이었다.

이후 조사 발굴되어 문무왕릉임이 밝혀지고,

감은사 창건의 의미가 호국용을 보호하고 영생을 축원하기 위함이었다.

경주에서 ‘왕의 길’을 따라 산을 넘고 내를 건너 찾아와서 이견대에 올라 선왕께 보은의 잔을 올리며 배알했던 곳이라는 것도 뒤늦게야 알게 되었다.

호국용이 바다에 맞닿은 물길을 따라 감은사 출입이 가능하시도록 통로를 열어 두고 편히 쉬어 갈 수 있게 해 두었다.

대륙의 아침 해를 가장 먼저 맞이하는 땅
호화궁궐 뒤에 두고 영생의 돌집 마련한 곳
현실과 이상 세계가 하나 되어 숨 쉬는 성지

임진란 시 왜군의 장수로 참전했던 ‘사가야’가 조선에 귀순하여 여러 전투에서 많은 공을 세워 조선왕으로부터 부여받은 이름이 ‘김충선’이다.

이곳 작은 절벽 있는 이견대 전투를 이끌어 공을 세웠던 곳으로,

임진란 당시 치열한 전장이었다.

침략국의 장수가 조국을 등지고, 상대국을 흠모해 귀순하여 모국에 대적하며 일생을 산다는 일은 보통사람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결단이다.

어쩌면 그도 때로 여기에 서서 아득히 바다 건너 떠나온 고향을 그리워했으리라.

평범한 시민의 입장에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가슴이 저민다.

추구하는 이상과 현실적 삶의 욕망을 내려놓고 사는 삶이 있을까?

높고 낮음도 귀하고 천함도 가진 것 모두 내려놓고,

영욕과 생사마저도 하나가 되어 넘실대는 저 바다를 보니,

좁은 눈으로 발 앞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허둥대며 살아온 지난날의 삶이 너무나 초라함을 느낀다.

주변 일대에 연대산 성고개 성둘레미 장진 소바짐 같은 전시에 쓰이던 말이 지명으로 쓰이고 있다.

어느 시대인지는 모르나 장진 마을 뒤쪽 바닷가 야트막한 산 위에는 군사 주둔지로 쓰였다는 평지가 펼쳐져 있다.

해파랑길을 따라 뒤쪽 산을 조금 오르니,

동해구 수중릉이 내려다보이는 전망이 좋은 자리가 나온다.

비문에 관직명이 새겨진 묘가 하나 있다.

거친 숨 고르며 잠시 쉰다.

한 시대 나라의 최일선 전쟁터로 총알과 화살이 빗발치고 칼이 부딪고 비명이 난무하던 곳이라 하기에는 너무나 조용하여 무상함을 느낀다.

이견대에 올라서 윤슬 반짝이는 바다를 바라보며,

동서 양 진영의 좌우 이념 대립,

남북 남녀 세대 간, 갈가리 찢어진 시대의 아픔을 한 번에 말끔히 날려버리게,

뒷산 자락에 무성히 자란 대나무 한 토막 잘라 피리를 만들어 불어나 볼까.

나라의 만 가지 파란을 잠재우던 ‘만파식적’ 그 성음(聖音)을 내어,

대종소리 함께 온 누리에 은은히 울려 퍼지는 날이 와서,

이 강토에 영원한 평화가 깃들기를 빌어본다.

 

*제13회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동상

동해구(東海口) : 삼국유사 권 제6 신라본기 제6 문무대왕 하(下)에 처음 기록이 나옴.
소바짐 : 장진과 감포항 사이 지역. 병사들의 보급물자 등의 짐을 싣고 먼 길을 온 소의 등에서 짐을 내린다는 의미의 소 받짐 벗짐에서 유래한 말이 ‘소바짐’으로 변한 지명.
해파랑길: 해안지대를 따라 펼쳐져 있는 언덕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