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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밍웨이 모히또와 다이끼리' / 구활

아즈방 2024. 4. 5. 12:28

 

헤밍웨이 모히또와 다이끼리 / 구활

 

럼(Rum)은 해적들만 마시는 술인 줄 알았다.

대학생이 되어 막걸리를 마셔 본 게 술의 시작이었다.

독한 소주를 어쩌다 한 모금 마셔보면 맛이 없었다.

군 복무를 마치고 수습 기자로 언론계에 발을 딛고 보니 그곳은 술판이 기본이었다.

 

입사 2년 뒤인 69년 2월 14일 설악산 건폭골(죽음의 계곡)에서 희말라야 원정대

10명이 새벽 6시 눈사태를 만나 전원이 사망한 산악참사가 발생했다.

경북학생산악연맹 출신인 필자는 구조대원 5명(조병우, 김종률, 박상열, 최상복, 손익성)과 함께 현지로 출발했다.

구조대 멤버로 조난 현장으로 떠난다는 소식을 들은 지인이 양주 한 병을 보내와

지루한 열차 여행 중에 대원들과 홀랑 마신 것이 럼과의 첫 대면이었다.

 

대구에서 설악동까지 올라가는데 만 3일이 걸렸다.

당시 쌓인 눈은 2,5m 였으며, 속초에서 설악으로 내왕하는 공군 트럭은,

도로를 눈으로 다진 설도(雪道)위를 굼벵이처럼 걸어 다녔다.

설악동에 먼저 와 있던 고교 동기생인 산악연맹 멤버였던 강운구(사진가 · 조선일보 사진기자)와 김택현(중앙일보 사진기자)을 반갑게 만났다.

 

경비를 줄이기 위해 인근 여관에 들지도 못하고,

계곡 입구에 텐트를 치고 자기로 했다.

기온은 영하 20도 내외여서 중고군용 침낭에 들어가 꼬박 뜬눈으로 밤을 지샜다.

럼이란 술은 눈 속 텐트 속에서 한 모금씩 마시면서 몸을 덥혀야지,

열차 안에서 마실 술이 아니라는 걸 늦게 깨달았다.

희말라야 전사 10명은 설악산 눈속에 묻혔다가 17일 후인 3월 3일 전원 인양됐다.

 

헤밍웨이는 럼의 마니아였다.

쿠바 아바나로 들어가기 전에는 미국 최남단 키웨스트에서 두 번째 아내와 살았다.

남국의 하늘과 바다를 즐기며 수제 시가와 럼 칵테일인 모히또와 다이끼리를 입에

달고 살았다.

헤밍웨이는 아바나에 살 때 술 마시기 전후에,

‘My mojito in La Bodeguita, My daiquiri in El Floridita.’

(내 모히또는 라 보데기따, 내 다이끼리는 엘 플로리디따.)라고 자주 말했다.

이 짧은 두 문장은 관광객들이 외우는 주문으로 변한 지 오래다.

그들 역시 헤밍웨이가 그랬던 것처럼 낮에는 라 보데기따로,

저녁에는 엘 플로리디따란 술집으로 몰려가 모히또와 다이끼리를 맛보려고 야단법석이었다.

 

모히또는 럼을 붓고 레몬 덩어리 얼음과 민트와 라임 조각을 첨가하면 멋진 칵테일이 된다.

다이끼리는 럼과 레몬즙, 대패질한 얼음을 적절히 배합하면 쉽게 즐길 수 있다.

레몬 구하기가 번거로우면 럼에 코카콜라를 넣은 ‘럼 앤 콕’을 만들어도 즐길만하다.

헤밍웨이는 다이끼리를 마실 땐 설탕을 넣지 않고,

신맛이 강한 엄청 독한 프로즌 다이끼리를 즐겼다.

그는 소설에서 “다이끼리 술잔을 들고 바다를 생각하고 죽음 같은 고요 속에서 해가 수직으로 오르내리는 바다에 있을 때는 바다 색깔의 술을 마시고 싶어진다”고 쓴 적이 있다.

그는 ‘멕시코 만류의 섬들’이란 소설에서도 다이키리를 마시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장황하게 썼는데, 얼마나 그 술을 좋아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헤밍웨이는 아바나를 찾아온 프랑스 작가 사르트르,

미국 극작가 테네시 윌리엄스,

배우 케리 쿠퍼, 에바 가드너 등과,

유명 바인 엘 프로리디따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며 담소를 나누기도 했다.

올드 아바나의 두 술집 외에도 헤밍웨이가 1932년부터 7년 동안 사용했던,

맘보스 문도스호텔 511호도 작가의 체취와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방 안에는 싱글 침대와 낡은 타자기 한 대가 있을 뿐 다른 장식은 없다.

치장이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이곳에서 배울 수 있다.

 

헤밍웨이는 1899년 7월 21일 미국 시카고에서,

의사 아버지와 성악가 어머니 사이에서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평생을 낚시, 사냥, 투우에 심취한 반면, 술과 담배 그리고 4명의 아내 외에

애인을 여럿 거느린 바람쟁이였다.

첫 아내는 여덟 살 연상인 헤들리 리차드슨,

둘째는 부호의 딸 네살 연상인 폴린 파이퍼,

셋째는 소설가 마르타 겔호른,

넷째 메리 웰시였다.

 

그는 1921년 프랑스 파리에서 특파원으로 일하면서,

‘위대한 갯츠비’를 쓴 작가 스콧 피츠제럴드, 에즈라 파운드 등과 어울려,

본격적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1926년엔 방황하는 젊은이들의 삶을 그린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The sun also rises)라는 소설로 일약 스타덤에 올라 이른바 ‘Lost generation’(잃어버린 세대)을 대표하는 작가 반열에 올라섰다.

이 소설을 시작으로 쓰는 작품마다 베스트 셀러가 되어 엄청난 부자가 되었다.

전쟁의 와중에 사랑을 나누는 ‘무기여 잘 있거라’ ‘킬리만자로의 눈’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등이 이 시기에 쓴 소설이다.

그는 그간 벌어둔 돈으로 아바나 외곽의 농장 주택 ‘핀카 비히아’를 매입,

호화스러운 생활을 즐겼다.

그 후 십여 년 동안 인기가 뜸해졌다가 1952년 ‘노인과 바다’가 대 히트하여,

퓰리처상과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헤밍웨이는 미국 본토에서 금주법이 내려져 있을 때,

쿠바에서 모히또와 다이끼리를 양껏 마시고 즐기다가 1961년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는 두 번의 비행기 사고를 당한 후유증으로,

신경쇠약과 우울증에 걸려 고생하는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우물쭈물하지 말고 빨리 올라와”

“그곳에서도 다이키리를 즐길 수 있는지요”

헤밍웨이는 자택 벽에 걸려 있던 엽총으로 62년 생애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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