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선생님께 / 목성균
나는 몸이 아프면 Y내과를 찾는다.
Y내과 원장 님의 의술에 대한 믿음 때문이라기보다,
그 분의 찬찬하고 따뜻한 진료 태도와 분명하고 자세한 소견 진술이 마음에 들어서다.
아픈 주제에 의사의 의술보다 인간성을 보고 병원을 찾는다는 게 우스울지 모르지만,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의 주제(主題)를 보면 병을 치료하는데는 의술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의사는 의술이전에 환자에게 투병의지를 부여해 줄 의무가 있다.
그러나 지금 그런 의사가 몇 명이나 되랴.
넘치는 환자에 시달리다 보면 의사도 본의 아니게 기계적일 수밖에 없기 쉽고,
돈독이 오른 의사라면 ‘환우(患憂)가 곧 돈이다’라는 개념으로 장사꾼처럼 돈벌이에 혈안이 될 수도 있다.
나는 모든 의사는 모두 슈바이처 박사와 같은 인류애로 병고를 감싸 안아야 한다고 보지만, 의사 되는데 보탠 것도 없이 슈바이처 박사처럼 믿지는 의사를 하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슈바이처 박사가 믿지는 의사였다고? 천만에-,
그 분이 정신적으로 얼마나 부자였는데-!’
그리 말하면 편견이다.
의사면허를 획득하려고 막대한 돈과 노력과 시간을 들였다.
물론 질 높은 삶을 영위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질 높은 삶’ 이란 종교적 가치냐, 인문적 가치냐, 경제적 가치냐는 순전히 의사가 결정할 문제지 환자가 이거다 저거다 말씀할 계제가 아니다.
나는 의사 앞에 장기가 내장 된 윗몸을 제시하고 앉으면,
약간에 위압감을 느낀다.
돈벌이가 확실한 면허를 가진, 직업적인 자부심 앞에 들어 내놓은 만성질환의 빈약한 몸통 때문이다.
돈 내고 의술을 사는 고객의 입장에서 무슨 당치않은 생각이냐고 할 지 모르지만,
사람이 병약하면 소심해져서 만성질환이 무슨 상습범인 것처럼,
청진기를 드려 대는 의사가 거짓말 탐지기를 드려 대는 검사같이 무서운 것이다.
Y내과 원장은 이 점을 불식한 의사다.
그 분은 체신이 자그만 하고 얼굴은 조용하고 맑다.
손은 여자 손처럼 보드랍고 따뜻하고 예쁘다.
첫인상이 좋다.
첫눈에 착하고 온순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물론 그 것은 선천적인 것으로 의사로서의 천부적 자질을 타고 난 것이지만,
밀려드는 환자에 시달리면서 선천성을 잃지 않았다는 것은,
순전히 그의 후천적인 노력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믿음과 고마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돼지 고기 먹고 체한 것 같아요”
순박한 시골사람이 공자 앞에 문자 쓰듯 의사 앞에서 발병 원인을 들여대도,
그 분은 “그럼 새우젓국 이나 먹지 무엇 하러 병원에 왔오.” 하고,
시골사람들이 항용 쓰는 무식한 민간 요법을 들이대며 퉁명스럽게 대하지 않고,
“그러셔요. 돼지고기 먹고 체한 데 좋은 약이 있지요. 어디 봅시다.” 하고,
조용히 웃으며 히포크라테스가 그의 고향 코스 섬의 가난하고 무식한 환자를 진찰대에 눕히듯 친절이 대할 것 같다.
그리고 그 작고 따뜻한 손으로 간장, 위장, 대장, 소장 등 장기를 하나 하나 빠트리지 않고 공들여 집어 본 다음, 내시경이나 위 투시 등 기계식 진찰을 할 것 같다.
그야말로 인술(仁術)이지 고부가가치 상품으로서의 의술(醫術)은 아니다.
그 의사는 진찰 결과 위염 정도면 기뻐서,
“맞습니다. 돼지고기를 먹고 체했군요.
이 약을 먹으면 틀림없이 날 것이니 안심하세요” 하고 처방을 할 것이고,
암 같은 절망적인 병이면 창가로 가서 눈시울을 적실 것 같다.
집도의(執刀醫)는 어차피 살을 가르고 뼈를 발라서 환부를 적출(摘出)하는,
손에 피 칠갑 하는 기술자니까 할 수 없다지만,
내과의는 우선 환자의 침울을 약방기생처럼 방싯방싯 웃어서 푸는 조치를,
임상조치 전에 마땅히 해야 할 일 아닐까.
‘웃겨-. 대량 생산되는 온갖 병을 신속 정확하게 처치해야 할 의사를 무슨 유치원 보모로 아는 겨-.’ 하고 화를 낼지 모르지만, 말인즉슨 그렇다는 말이다.
우리 어머니는 평생 병원을 가본 적이 없다.
의사라면 공연히 미워하신다.
어머니의 의사에 대한 적개심은 정신과적 병리현상이다.
어머니는 첫아들을 서너너덧 살 적에 잃었다.
여름날 저물 녘에 어두운 부엌에서 늦은 저녁 보리쌀을 앉히고,
화롯불에 장 뚝배기를 올려놓고 바쁘게 돌아치는데,
어린것이 아장거리고 들어와서 미쳐 주의를 기울일 새도 없이,
화로의 끓는 장 뚝배기에 주저앉았다.
한창 천방지축 재롱을 피우는 것이---.
온 동네가 난리가 났다.
어린것은 밤새 울다 새벽에 기가 넘어가는데,
아버지와 건너 마을 당고모부가 안고 지름티 고개를 넘어갔다.
충주 도립병원에 데리고 간 것이다.
어머니는 하루종일 고개만 쳐다보고 계셨다고 한다.
저녁 때 노을이 진 고개를 아버지와 당고모부는 빈손으로 넘어 오셨다.
어린것은 죽어서 충주 공동묘지에 묻고 왔다는 것이다.
여름날 참혹하리 만치 빨간 노을이 진 고개를,
어른 둘이 애를 버리고 덜렁덜렁 넘어왔다.
어머니에게 그보다 더 큰 고통은 없었으리라.
그 후부터 어머니는 의사에 대한 근거 없는 적개심을 갖게 되었다.
나는 의사선생님께는 미안한 일이지만,
어머니의 의사에 대한 적개심을 다행으로 여긴다.
어머니는 당신의 주의부족으로 어린것을 불에 데여 죽인 자책감을,
얼마쯤은 의사에게 전가시키고 아픈 세월을 견뎌 내셨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왜정시대의 충주 도립병원의 일본인 의사가 식민지 백성의 죽어 가는 어린것을 얼만큼이나 정성을 다해서 진료했을까 하는 의문이 가시지를 않는다.
“오이, 가망이노 없어-.” 하고 돌아앉지나 않았는지,
그리 생각하면 눈앞이 흐려지고 피가 거꾸로 치솟는 것만 같다.
나는 람베네 강변에 노을이 질 때 자식을 잃고 밀림으로 돌아가는 원주민의 슬픈 뒷모습을 하염없이 지켜보는 슈바이처 박사를 그려보곤 한다.
앞으로 의술은 더 발전되고, 평균수명은 더 늘 것이다.
인명은 재천이 아니라 얼마든지 고쳐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병원은 1급 자동차정비공장과 같은 인간 수리공장처럼 될지 모른다.
그 때 의사는 “새차로 뽑으시죠. 고쳐 보았자. 별로 차 구실도 못 하겠네요.”
의료수가(醫療酬價)에 비해서 수리가치가 현저히 떨어져서 견적가에 환자 보호자가 불만스러워 하는 경우 그렇게 말하지나 않을지-.
환자가 의사를 존경하지 않는 세상은 의사가 불행한 세상이 아니라,
환자가 불행한 세상이다.
환자는 의사를 우러러보는 기쁨을 가질 권리가 있다.
분명히 의료수가에 포함된 사항일 것이다.
의사선생님들께서는 이점 통촉하여주시기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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