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몇 점,토기 몇 점 / 구활
나는 동성바지들이 모여 사는 문중에서 태어나지 않았다.
집성촌 어른들로부터 가문의 전통과 가례의식을 배우지 못한 채 유년을 보냈다.
그도 그럴 것이 네 살 되던 해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셔서,
유가(儒家)의 예절과 법도를 전수받을 길이 없었다.
어머니는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
나는 태중 교인으로 기독교 교육을 받으면서 자랐기 때문에,
오로지 ‘하나님 아버지’만 알았지 ‘공자 어른’은 몰라 뵈었다.
계명을 철저하게 지키셨던 어머니는 아버지 묘소 앞에서 큰절 올리는 것도,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계율로 적용하여 엄격히 금지했다.
고향의 무학산 기슭 산소에는 아들의 큰절 한번 받아 보지 못한 채,
‘다른 신’으로 취급되고 있는 아버지가 수십 년째 그곳에 누워 계신다.
성장하면서 힐긋힐긋 어깨너머로 배우긴 했어도,
지금도 큰절할 때 어느 손등을 위에 올려야 하는지는 여전히 헷갈린다.
또 종택(宗宅)이나 반가(班家)의 어른들을 만났을 때,
고어(古語)투의 물음에 대한 적절한 답변을 드리기가 어려워 여러 가지로 미숙함을 느낀다.
어릴 적부터 외톨이였다.
먼 윗대 할아버지는 농사일이 싫었던지,
시골의 문중을 떠나 대구란 도시 근교에 정착하셨다.
슬하에 태어난 자녀들은 다시 뿔뿔이 흩어졌는데,
그 중 한 분이 나의 고향이 된 하양에 터를 잡았고,
그 후론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듯’,
마태복음 제일장에 쓰여 있는 것과 같이,
아버지가 아들을 낳고 아들이 또 아들을 낳고 낳아 이렇게 내가 존재하는 것이다.
고향에는 구(具)가 성을 가진 집은 단 세 집뿐이었다.
우리 집만 농사에 매달렸을 뿐,
한 집은 참기름 가게를 했고,
또 한 집은 시장의 쌀가게 안에서 국밥집을 열고 있었다.
그들의 웃대 어른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다 이곳까지 흘러왔는지 궁금하긴 했지만 물어 볼 수는 없었다.
그래도 같은 피를 타고 난 일족(一族)의식이 작용한 탓인지,
만나면 반가웠고 항렬이 높으면 “아제요.” 하고 불렀다.
활(活)이란 내 이름에서 바람의 기운을 느낀다.
때론 불의 기운도 함께 느낀다.
그건 아마 조상의 혼이 서려 있는 문중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웃어른들의 유전자 탓이라 생각한다.
바람처럼 떠돌아다니면서 낯선 곳에 발붙여 살려면,
불과 같은 강인한 에너지가 반드시 필요했으리라.
나는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내 이름인 활 자 한 자만 지니면 자갈밭에 붉은 장미를 꽃 피울 수 있으리라고.
그런데 살면서 주위를 살펴보니 모자라는 게 많았다.
웃어른들의 손 때 묻은 추억의 물건이 너무 없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이사를 서른 번쯤 했다.
요즘처럼 아파트에서 아파트로 이사를 가는데도 많은 물건을 버려야 하지만,
시골에서 도회지 셋방으로 터전을 옮기려면 이불과 숟가락을 빼곤 죄다 버려야 한다.
어머니는 자식들의 교육을 위해 논을 팔아 도시로 진출했고,
다시 낙향했다 재도전 끝에 고향 집을 팔아 이곳 대구에 정착한 아픈 기억을 갖고 계셨다.
철이 들고 나서 온 집을 뒤져 아버지의 혼이 서려 있을 물건들을 찾아봤지만,
낡은 구두, 숟가락 한 개와 실패로 변한 송판 쪼가리로 만든 문패뿐이었다.
그 구두 주걱과 문패에는 일제 강점기 때 창씨개명의 흔적인 요시다(吉田)란 일본 성씨가 날카로운 칼날로 홈이 파져 있었다.
자칫 나라를 빼앗겼으면 ‘빼앗긴 들의 봄’처럼 내 이름도 구활이 아닌,
요시다 상의 아들 요시다활(吉田活)이 될 뻔했다.
다행하게도 빼앗긴 들을 되찾아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하루를 절며 걸을 수 있듯이 내 이름으로 이 글을 쓰고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가.
두 점의 소품 외에 아버지께서 땅문서를 넣어 보관하던 가죽 가방 하나가 내 서재에 보물처럼 버티고 있어 그나마 위안을 얻는다.
그 가방은 실용적이어서 항상 버리는 물건에서 제외되는 영광을 얻어,
오늘까지 나와 함께 같은 길을 가고 있는 도반 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다.
나도 그 가방 속에 땅문서를 비롯하여 유가증권들을 차곡차곡 쟁여두고 살았으면 좋으련만, 옛 선인(先人)들의 문자향(文字香)이 나는 서첩 몇 권만 빈 공간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한다.
나중 아이들이 자라서 아버지를 기념할 만한 추억의 물건들이 없다면,
그것 역시 몹시 슬픈 일일 것 같았다.
그래서 역사 만들기 작업을 시도했다.
역사라고 하니 너무 거창한 것 같지만,
사실은 추억이 될 만한 잡동사니들을 여기저기 흩어 놓는 일을 시작해 보기로 한 것이다.
첫 작업은 고서화를 수집하는 일이었다.
수집하는 일에도 공부가 필요했다.
화가들의 화첩을 뒤적이며 그들의 생애와 작품을 두루 살펴보는 것도 보통 힘드는 일이 아니었다.
남들이 주식시장에서 서성거릴 때, 나는 화랑을 돌아다니며 문인화 한 점, 글씨 한 폭 챙기고는 좋아라 했다.
욕심이 과해지기 시작했다.
고서화 취미가 한국화로 건너뛰었다가,
급기야는 서양화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푼돈 몇 닢으로 해결되던 문화의 허기가 서양화에 눈뜨기 시작하자,
보너스 전액을 던져도 마음에 드는 소품 한 점 얻기가 어려웠다.
그 와중에 민속품과 토기까지 눈에 밟히는 것은 무리를 해가며 손에 넣었으니,
주머니는 만날 빈털터리였다.
좁은 내 집에는 이런 옛 물건들이 군데군데 숨어있다.
나는 그걸 소중한 추억의 물건들이라고 귀하게 여기고 있지만,
아내와 아이들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최근에는 거실의 장 속에 들어 있는 ‘토기들을 치워버리면 어떻겠느냐.’는 압력을 받았다.
나는 살 줄은 알지만 팔 줄은 모른다.
정말 큰일이다.
다락방에는 적금을 들다 해약하여 매입한 글씨와 그림들이 널려 있는데,
그걸 정리해 달라니 이것 참 큰일 났다.
죽기 전에 책과 사진은 미리미리 없애고 가는 게 좋다는 글이 인터넷에 돌아다니더니, 그게 슬금슬금 내 앞으로 닥쳐오고 있으니 보통 문제가 아니다.
신문기자 아버지를 둔 후배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보니 땅문서는 한 쪽도 없고 양복 오십 벌에 외제 넥타이 백 개 정도가 남았습디다.”란 말이 문득 생각난다.
나는 죽을 욕을 봐가며 이룬 추억의 물건을 두고 우리 집 아이들은 뭐라고 말할까.
“그림 몇 점, 토기 몇 점 외엔 아무것도 없어요.”
일본 쓰나미 현장에선 추억의 물건 찾기가 한창인데,
우리는 한복이 호텔에서 쫓겨나고 있으니 이를 어쩌나.
그림 몇 점, 토기 몇 점이라,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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