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준령을 오르며 / 변종호
가기 싫다고 아니 갈 수도 미룰 수도 없다.
정해진 길이 아니라 예측 불가하며 가는길이 서로 다르니 끝까지 함께할 이도 없다.
더러 주저앉지만 다시 일어서 가야 하는 길고도 지루하며 험준한 산행이다.
폭염에 덕유산을 낙점했다.
“어제는 한 치 앞도 안 보였는데 오늘은 잘 보이겠네요,”
곤돌라 승선권을 체크하는 서른 중반의 덩치 큰 여직원 말이다.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기분이 좋아진다.
장소와 날씨가 잘 맞아떨어진 셈이다.
문명의 이기로 몸이 호사한다.
걸어서 오르면 세 시간은 족히 걸린다.
설천봉이 가까워지자 주목 군락지가 눈에 들어온다.
고산의 운치는 역시 노거수인 주목이다.
살아 천 년 죽어서 천 년을 간다는 고사목이 생의 역사를 모두 털어내고 마들가리로 서 있다.
저리 되기까지 겪어낸 시련은 얼마나 혹독했을까.
산행이야말로 인생 여정과 같다는 생각을 한다.
어떻게 오르느냐보다 산을 오르겠다는 의지만 불태웠던 이십 대에는 자신을 과대평가해 어디서든 열심히만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달려들었기에 겸허함이 없었다.
어떤 것도 해낼 수 있고 오를 수 있다는 자만심에 잇단 오류를 범하기도 했다.
삼십 대 가장에게 하나둘 식구가 불어나니 조급증이 났다.
오직 앞만 보며 남보다 빨리 오르겠다는 욕심이 앞서 스치는 풍광이며 새소리 물소리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아 소품에 지나지 않았다.
산이란 그렇게 단거리 달리듯 해서는 안 된다며 쉬엄쉬엄 오르라는 인생 선배의 충고는 가벼이 무시하던 시기였다.
불혹의 산행은 염천지절 소금강에서 오대산 노인봉을 올랐던 구간처럼 하늘조차 보이지 않는 깊고 깊은 계곡 산행이었다.
머리가 커가는 아이들의 갈 길이 어렴풋이 그려질 무렵,
전쟁터 같은 밥벌이는 더욱 어깨를 짓눌렀다.
오르고 또 올라가도 비슷한 등산로만 끝없이 이어졌다.
어지간히 왔다고 여겼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맥이 풀렸고 포기하고 싶었다.
등산 지도는 물론이요, 경험자의 조언도 듣지 못한 채 걷고 걸었다.
한 통의 물로 6시간 강행군에 다섯 명 중 세 명이 탈진한 등정길이 타자의 하산길이라는 것을 몰랐으니 얼마나 무지했던가.
천명에 들어서니 가야 할 방향과 올라야 할 산정이 겨우 빠끔히 보였다.
이만큼 달려오느라 고단했던 몸이 여기저기 고장 신호를 보내왔지만 목표가 보이니 견딜만했다.
살아보니 비틀거리게 만드는 건 희망이 없던 시기였다.
답답한 계곡 산행을 벗어나니 반기는 꽃들이 비록 키는 작았지만 색은 짙었고 향기 또한 진했다.
조금 트이는 시야로 천근만근의 무거웠던 몸이 다시 기운을 얻는다.
돌아보니 발치 아래 올라온 길이 까마득하다.
정상 가까이 오르면 오를수록 길은 험준했다.
때로는 암벽이, 어떤 곳은 낭떠러지의 조붓한 등산로가 겸허 하라며 엎드려 기어갈 것을 강요했다.
달리 우회로도 없다.
제 몸 하나 간수하기 힘든 바위 날망에서는 생사고락을 함께한 부부라도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신체의 변화도 가장 큰 시기의 지명에는 겪어야 할 난제가 가로막았다.
쉽게 풀 수도 없고 도와줄 수도 없는 아이들의 취업과 혼사였다.
누구나 넘어야 할 고산준령인 셈이다.
가장 고달프다는 천명을 넘어서 이순이 되니 이제는 완만한 능선이다.
연화봉을 거처 비로봉에 이르는 소백산이나,
중봉 향적봉 설천봉으로 이어지는 덕유산처럼 사방이 트였다.
길게 늘어선 평탄한 등산로가 여태껏 고단한 산객을 반겨 맞는다.
산야가 하나의 풍경이 되었다.
함께 부부가 담소하며 걸을 만큼 여유도 생겼다.
이제는 주어진 여건과 자연을 느끼고 즐길만하다.
건강도 어느 정도 허락되고 자식도 저희끼리 잘사니 걱정거리도 부족함도 느끼지 못한다.
한껏 즐기고 누릴 수 있는 인생의 황금기라는 생각이다.
위험하다는 하산을 걱정 않는다.
이미 산정을 밟는 순간 마음의 준비를 끝냈다.
설령 급작스레 닥친다 해도 당황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을 참이다.
아쉬움 없는 인생이 있겠냐마는 이만큼 이루고 산 것도 잘했다고 도닥여주고 싶다.
해발 1,600미터의 덕유평전에 올라서니 바람조차 달곰하다.
자연의 혹독한 시련을 견디느라 키를 늘리지 못한 앉은뱅이 나무와 강풍에도 굴하지 않고 잠시 굽혔다 일어섰던 씨방을 매단 원추리 군락도 정겹기만 하다.
7~8월의 덕유산은 쉽사리 볼 수 없는 진귀한 야생화의 천국이다.
탄성이 절로 나온다.
가히 이런 고산의 능선을 밟아보지 않은 사람과 인생에 대해 논할 일이 아니지 싶다.
인생 준령을 오르려면 서둘러도 안 되며 늑장을 부리거나 지레 겁먹은 의기소침도 곤란하다.
교만은 더욱더 금물이다.
걷다 보니 제아무리 금슬 좋은 부부라도 함께 갈 길이 있고 도움을 줄 수도 받을 수도 없어 홀로 가야 할 길이 불쑥 나타나기도 했다.
고산 등정 같은 인생을 살아보니 어려운 길만 이어지는 것도 아니고,
순탄한 길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굽이도는 길에서는 숨을 고르다 가풀막에서는 가쁜 숨도 몰아쉬고 고통을 참아가며 기를 쓰고 올라야만 세상을 여유롭게 관조할 수 있는 능선에서 잠시 머물며 인생의 참맛을 느낄 수 있지 않겠나.
서녘 산정에 어둠이 집어삼킬 노을 하나 길게 걸려있다.
변종호
수필가
2006년 '수필과 비평' 등단, 신인상.
<섶다리>, <마음을 메우다> 등 2권의 수필집, 선집 <주천강의 봄>
13회 홍은문학상, 15회 수필과비평문학상 등.
수필과비평작가회의 16대 전국회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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