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네 다리로 걷다가 그 다음에는 두 다리로 걷고,
더 나중에는 세 다리로 걷는 짐승이 뭘까?’
고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스핑크스가 오이디푸스에게 내었다고 하는 그 유명한 수수께끼다.
웬만한 이들은 익히 들어서 답이 무엇인지 벌써 짐작을 대고 있을 줄 믿는다.
물론 답은 ‘사람’이다.
사람은 처음 세상에 나와서는 두 손과 두 발로 기어 다닌다.
그러니 자연 네 다리이다.
그러다 차츰 자라면 서서 걷게 되니 두 다리로 바뀌고,
늙어서 육신이 부자유스러워졌을 땐 지팡이의 힘을 빌리기에 이르니,
결국 세 다리로 옮겨가는 셈이 되지 않는가.
거기에다가 지금은 네 다리 보조기까지 등장했다.
다름 아닌 유모차라는 물건이다.
유모차(乳母車)는, 말 그대로 당초 어린아이들을 태워서 나들이 다니기 위해 고안된 수레 장치가 아닌가.
그런 용도로 만들어진 이동수단이 본래의 쓰임새를 넘어,
이제 나이 많아 몸놀림이 불편한 노인네들의 자가용으로 변신한 것이다.
이를테면 지팡이의 역할을 유모차가 대신하게 되었다고나 할까.
꼬부랑 할머니가 유모차에 몸을 맡긴 채 달달거리고 있는 모습을 보면,
마치 어린아이 적의 네 다리로 다시 돌아간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아니, 유모차의 네 다리에다 자기 육신의 두 다리까지 합쳐 모두 여섯 개가 되었으니 어린아이 때보다 오히려 더 퇴화되었다고 해도 그다지 무리한 표현은 아니리라.
세상 이치란 영원불변한 것은 없는 법,
그리 살피면 수수께끼도 시대 흐름 따라 바뀌어져야 할까 보다.
요사이 연만한 어르신들의 술자리에서 ‘빠삐따’라는 건배사가 한창 회자되고 있는 모양이다.
얼핏 들으면 무슨 전단지에 적힌 선전 문구같이 여겨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생각처럼 전혀 그런 불온한 사상이 깃들어 있는 말은 아니다.
‘빠지지 말고, 삐치지 말고, 따지지 말자’,
이 세 마디의 머리글자만을 따서 외치는 건배 구호라고 한다.
‘전대협’이니 ‘경실련’이니 ‘노사모’니 하는 식으로,
하도 삼 음절 줄임말이 유행을 타다 보니 그것들을 본떠 생겨난 신조어가 아닌가 싶다.
하여간 그 기발하고 재미난 발상에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다.
농담 속에 진담이 들어 있다고 했던가.
빠삐따 역시 얼핏 들으면 단순한 우스개 같지만,
솜솜 뜯어보면 노인들의 보편적 성향을 썩 그럴싸하게 꼬집어 놓은 풍자어(諷刺語)라는 생각이 든다.
나이 든 이들 일수록 모임 같은 데 잘 빠지고,
별것 아닌 일에도 걸핏하면 삐치며,
대수롭지 않은 사안에도 꼬치꼬치 따지고 들기를 좋아하니 말이다.
사람은 늙으면 도로 아기가 된다는 말이 있다.
밥상머리에 앉아 밥알을 질질 흘리는가 하면,
점잖은 자리에서 콧물을 훌쩍훌쩍 삼키기도 한다.
눈은 침침해지고 귀는 어두워진다.
발음이 어눌해지고 걸음걸이가 굼뜨게 되며,
기억력은 하루가 다르게 뭉텅뭉텅 잘려 나간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였던 이익(李瀷) 선생은,
이러한 늙은이들의 특성을 '성호사설(星湖僿說 )'에서 설득력 있게 그려 놓았다.
대낮에는 꾸벅꾸벅 졸음이 오나 밤에는 잠이 오지 않으며,
곡할 때는 눈물이 없다가도 웃을 때는 눈물이 흐른다.
삼십 년 전 일은 낱낱이 기억되어도 눈앞의 일은 문득 잊어버리며,
고기를 먹으면 뱃속에 들어가는 것은 없이 모두 이 사이에 끼어버린다.
흰 얼굴은 도리어 검어지고 검은 머리는 도리어 희어진다.
<중략>
눈을 가늘게 뜨고 멀리 보면 분별할 수 있는데,
눈을 크게 하여 가까이 보면 도리어 희미하고,
지척의 말은 알아듣기 어려운데,
고요한 밤에는 항상 비바람 소리만 들리며,
배고픈 생각은 자주 있으나, 밥상을 대하면 먹지 못한다.
어찌 육체적인 변화뿐이겠는가.
정신연령도 따라 감퇴되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화 과정일 터이다.
깜빡깜빡 잊고, 벅벅 우기며, 부득부득 성질을 부린다.
남의 말에 귀를 틀어막아 버리고는 옹고집이 된다.
그래서 늙어 갈수록 모임 자리에 적극적으로 참석하고,
주위의 상황을 너그럽게 받아들이며,
여간한 일에는 짐짓 눈감아 줄 줄 아는 아량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뒷방 늙은이 취급 당하지 않으려면,
지갑은 부지런히 열고 입은 꼭꼭 닫으라고 했으니,
따지고 보면 이것 역시 결국 같은 맥락에서 나온 이야기가 아닐까.
나이 들수록 처신하기가 어려워지는 것이 사람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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