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태에 관한 추억 / 목성균
늦가을이나 초겨울이면 우리 집 부엌 기둥에 명태 한 코가 걸려 있었다.
산골 그을음투성이 초가 부엌 기둥에 걸린, 다소곳한 명태 한 쌍은 '천생연분'이란 제목을 달고 싶은
한 폭 정물화였다.
이슥해서 취기가 도도해진 아버지가 명태 한 코를 들고 와서 마중하는 며느리에게,
"옛다" 하며 건네주는 걸 본 적 있다.
남용이 아닌가 싶은 아버지의 호기가 참 보기 좋았다.
그 날,
"아버님, 저녁 진짓상 차릴까요?" 며느리가 묻자 아버지는,
"먹었다" 하시며 두루마기를 벗어서 며느리에게 건네주고 사랑으로 들어가셨다.
며느리는 두루마기 자락을 추녀 밑에 걸어 놓은 등불에 비춰 보더니,
즉시 우물로 가지고 가서 빨았다.
아버지는 취한 걸음으로 이강들을 건너서, 은고개를 넘어, 하골 산모퉁이 돌아서,
두루마기 앞섶을 휘날리며 오셨을 것이다.
삶 어느 경지에 취해서 맘껏 활개 젓는 아버지 손에 들려온 명태 두 마리가 얼마나 흔들렸으면 두루마기
자락을 더럽혔을까.
아침에 아버지가 "아가, 두루마기 내 오너라" 했을 때, 며느리는 엄한 분부에 차질 없이 대령할 수 있도록,
푸새 다림질해서 횃대에 걸어 둔 두루마기를 내다 드렸다.
그 두루마기 자락에 온통 명태 비린내를 칠해 오셨다.
그러고는 떳떳이 명태를 며느리에게 건네고, 며느리는 공손히 받아서 부엌 기둥에 걸었다.
젊은 날 어느 늦가을, 갈걷이 끝내고 어디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막차에서 내린 나는 종점 건너편 가게 앞에서 발걸음을 멈춰 섰다.
등피 잘 닦은 남폿불 아래 고기 상자.
가지런히 누운 명태가 어찌 그리 정답던지.
사랑채에 모여 놀다가 제사 보고 가려고 가지런히 누워 곤하게 등걸잠 든 마실꾼 같았다.
그 명태를 한 코 샀다.
아버지가 두루마기 자락에 명태 비린내를 묻혀 왔다고 젊은 자식놈도 그러면 불경이다.
옷에 비린내를 묻히지 않으려고 조심해서 명태 한 코 들고 밤길 십 리를 걸어 집에 오니까 팔이 아팠다.
연만하신 아버지가 취중에 두루마기 자락에 비린내를 묻히지 않고 명태 한 코 들고,
십 리 길을 걸어올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아버지는 정성을 다한 며느리의 침선(針線)을 소홀히 여기신 건 아니었다.
다음 날 아침 아내가 명탯국을 끓였다.
아버지가 좋아하시면서,
"웬 명태냐?"고 하셨다.
아내가, "아비가 사 왔어요" 하자 아버지는 잠깐 나를 쳐다보더니,
"우리 집에 나 말고 명태 사 들고 올 사람이 또 있구나!" 하신다.
아버지 그 말씀이 왜 그리 눈물겹게 느껴졌을까.
그 날 아침 햇살 가득 찬 안방에서 아버지와 겸상한 담백하고 시원한 명탯국 맛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릿하다.
내 친구 중에는 명탯국을 안 먹는 놈이 있다.
나는 그를 업신여긴다.
명태는 맛없는 생선이란다.
생선 맛이야 비린 맛일 터인데, 그놈은 비린 맛을 되게 좋아한다.
맨 북어포를 먹어 보면 맛없긴 하다.
그런데 고추장을 찍어 먹으면 숨어 있던 구수한 북어 살맛이 입안 가득 살아난다.
명태가 맛없는 건 우리 입맛에 맞춘 담백성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 담백성을 몰개성적이라고 몰아간다면 잘못이다.
생선은 비린 만큼 건방지다.
비린 생선 개성을 존중하지 않으면 우리가 뜻하는 맛을 내주지 않는다.
명태는 자기주장을 꿰뚫으려 하지 않는다.
줏대 없는 놈이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그건 줏대가 없는 것이 아니고 줏대없는 본성이 명태 줏대다.
나는 여태껏 썩은 명태는 못 봤다.
오늘날 명태 말고, 냉동 산업과 운송 여건을 갖추지 못한 시절,
동해안에서 태산준령을 넘어 충청도 산읍 오일장 어물전까지 실려 온 명태를 두고 하는 말이다.
명태는 썩지 않는 철에만 잡힌다.
수온이 섭씨 1도에서 5도가 되어야 알 낳으려고 북태평양에서 동해로 떼 지어 내려온다.
그때가 명태의 어획기다.
부패 철을 비켜서 어획기를 설정한 주체는 어부가 아니라 명태다.
주검을 썪게 하지 않으려는 명태 의지가 진화한 결과로 보고 싶다.
그물코에 걸릴 수밖에 없는 회유성(回游性)이 운명일 바에는,
사람 손길에 뒤채며 어물전 천덕꾸러기 될 필요는 없다는 결론이었을지 모른다.
'썩어도 준치'란 말이 있다.
참 우스꽝스럽다.
명태가 들으면, '무슨 소리야, 썩으면 썩은 것이지' 하고 비웃을지도 모른다.
섞기 직전 살코기에서 동물녹말이 분해되어 젖산이 생긴다.
구수하고 단맛을 낸다는 설이 있긴 하지만, 그건 숙성을 뜻하지 섞는다는 말이 아니다.
자연에서 생선 숙성은 순식간에 지나가는 과정이다.
숙성을 보전하는 것은 기술이고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요리사 몫이지 준치 몫은 아니다.
썩어도 준치'란 말은 청문회 자리에 나온 사람 뻔뻔한 변명 같아서 섞는 냄새가 코를 찌른다.
준치는 4월에서 7월까지 부패가 성한 철에 잡힌다.
제 주검의 선도(蘚度)에 관한 대책도 없는 주제에 '썩어도 준치'라니, 명태에 비하면 미천한 본성이다.
준치 잡는 철은 보릿고개와 맞닿는다.
배고픈 백성은 준치를 잡아 배를 채웠으리라.
숙성하기보다 섞기 직전 준치를 먹으며 삶을 슬퍼하고 개탄하는 마음으로,
'썩어도 준치'라고 역설했을지 모른다.
얼마나 우리 슬픈 시대를 또렷이 대변하는 감탄 구인가.
명태는 한결같은 무욕으로 제 생의 담백한 육질을 사람에게 보시했다.
명태는 제 속을 비워 창난젓과 명란젓을 담게 하고,
몸뚱이만 바닷가 덕장에서 바닷바람에 말려 북어가 되고,
대관령 너머 눈벌판 덕장에서 더덕북어가 되었다.
제상 왼쪽에 차려지거나, 고사상 떡시루 위에 실타래 감고 누워 사람들에게 절 받는 받는 귀물로
받들어졌다.
명태를 생각하면, 늦가을 텃밭 황토에 하반신을 묻고 상반신은 햇살에 파랗게 드러낸 채 서 있던
청정 무가 떠오른다.
순박하고 건강하기가 나이 꽉 찬 산골 큰아기 같은 조선무가 없으면 담백한 명태의 맛을 살릴 수
없었을지 모른다.
산골 동네 텃밭에서 그 무가 가으내 맛 진수를 보이려고 명태를 기다렸다.
무와 생선이 산해와 진미로 만난다.
문득 아버지 호기가 그립다.
아침 햇살 가득 차오르던 산골 초가 부엌 기둥에 걸린 명태 한 코가, 집안 대주 권위로 바라보이던
시절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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