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강을 따라가면 / 정목일
나는 곧잘 섬진강을 찾아 나선다.
지리산과 섬진강이 만나는 하동에서 구례까지의 길을 좋아한다.
대개 쌍계사까지 갈 경우가 많지만 화엄사, 실상사, 연곡사 등 지리산 사찰들을 둘러보고 남원을 거쳐
함양, 진주로 일순하는 길을 택하기도 한다.
왜 이 길을 좋아하는가.
우리 산수의 절경에 푹 빠져서 말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너무 좋으면 말이 소용없는 법이다.
그냥 마음으로 온몸으로 느끼면 될 뿐…….
섬진강을 따라가면 첩첩한 산들이 기러기 날개짓으로 날아오고,
지리산 어느 사찰의 범종 소리가 흘러가는 양하다.
영원의 하늘을 향해 번져가는 그리움의 선형(線形) 같아 보인다.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에서 섬진강 쪽을 바라보면 여덟 겹의 산들이 첩첩으로 드러나 보인다.
거대하고 우람한 산들이 어떻게 난초 한 잎씩으로 허공에 척척 그어져 있는가.
그 능선들을 따라가면 우리 산의 숨결과 가락에 가 닿을 듯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온유하고 부드러운 곡선으로 영원과 이어지는 것이 우리 산 능선들이 아닌가 싶다.
나는 첩첩 산들이 지닌 능선의 아름다움에 빠져 말을 잃는다.
만 년의 침묵을 응축시켜 단 한 줄의 선으로 그어놓은 산 능선,
─ 깊은 계곡과 험준한 산악을 뭉뚱그려 고요하고 섬섬한 대금 가락을 하늘에 띄워놓은 것을 본다.
해가 떠오를 때나 해질녘에 산 능선들은 노을을 배경으로 깊은 명상 속에 잠겨버린다.
눈을 아래로 내리면 섬진강의 곡선은 얼마나 유연한가.
푸른 강물의 유유한 흐름도 기가 막힐 뿐더러,
여인의 속살보다 흰 백사장은 옥양목을 펼쳐놓은 듯하다.
이곳이 아니면 아직도 순결을 지닌 백사장을 좀체 찾아볼 수 없다.
綠, 靑, 白이 어우러진 섬진강 ― 백사장 가엔 산비탈이 이어지고 그 아래로 소나무 숲들이 듬성듬성
풍취를 돋운다.
섬진강 물의 유선(流線)은 부드럽고도 눈부시다.
매화 향기 실어 님에게로 가는 몸짓인가, 맑고 투명한 물결은 은하수처럼 반짝이며 흐른다.
누가 몇만 년 흐르면서 맑아지고 깊어진 명상을 한 줄의 선으로 펼쳐놓았는가.
영원으로 흐르는 유장한 거문고 가락의 선이 아닐까 싶다.
강물을 따라 섬진강의 몸짓으로 첩첩 산들의 능선을 바라보면서 가면,
나도 강물이 되고 산 능선이 된다.
강물로 숨을 쉬고 산 능선으로 하늘에 닿아 있음을 느낀다.
아, 이럴 때 피리나 대금을 불 줄 알면 얼마나 좋을까.
강물에다 풀어서 강물과 함께 가게 하고, 산 능선에 닿아 영원으로 띄워보내고 싶다.
범종 소리도 선이 있다면 강물의 선이고, 산 능선의 선이었음을 알 수 있다.
청자, 백자의 삼삼한 곡선들이 우리 강토를 적시며 흐르는 강물의 허리선이고,
볼수록 부드럽고 친근한 우리 산 능선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섬진강을 보아도 지리산 능선을 보아도 어디서인가 많이도 보아온 그리운 모습을 느끼게 하는
것일까.
우리 누이나 어머니의 눈썹 곡선이 아닐까 싶다.
산을 보아도 종 소리가 들려올 듯싶고, 난초잎의 선이 생각나고 항아리의 곡선을 떠올리게 된다.
첩첩한 산 능선들을 바라보면 나는 그리움의 끝, 영원에 닿아 있는 것을 느낀다.
산중에 사는 사람들이 왜 말수가 적은지 알 만하다.
그들은 산과 얘기하고 계곡 물과 마음을 나눈다.
애써 자신을 알릴 필요도 설명할 이유도 없다.
철 따라 꽃은 피고 진다.
빈 산에 꽃은 피고 달이 떠오른다.
말을 잃게 되지만 마음의 눈과 귀가 밝아진다.
향기는 귀로 듣고 빛깔을 코로 맡는다.
한 마디 말이 없는 산과 강은 어째서 영원한가.
섬진강을 보면서, 지리산 능선들을 바라보면서 말 없이 사는 법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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