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수하고 시원한 된장국과 생태찌개 / 유혜자
어느 명사가 일류음식점에 손님들을 초대하고,
“보잘 것 없는 음식으로 모셔서 죄송합니다만 많이 드십시오” 했다.
그 말을 들은 음식점 주인이,
“지금한 말 취소하십시오. 우리 집 음식은 시내에서 가장 맛있다고 소문난 집입니다.”고 항의했다 한다.
내가 소개하고자 하는 신선한 배추 넣은 된장국과 생태찌개도 맛은 좋지만 평범한 음식이다.
그러나 ‘보잘 것 없는 음식’이라고 폄하하면 아마 그 음식점 주인도 화를 낼 것이 분명하다.
정동, 러시아공사관 건물 한쪽이 남아 있는 광장에서 신문로로 나오는 골목에 야트막한 한식집이 있었다.
점심시간이면 샐러리맨들로 꽉 차서 문 바깥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때는 고층빌딩이 가려 있지 않아서 멀리 보이는 인왕산의 미끈한 바위와 그 둘레의 나무빛깔에서 사계의
변화를 가늠하며 기다리기도 했다.
먹는 것이 활력이 되고 기쁨으로 승화하는 것 같았고,
편식하던 어렸을 때의 습관이 고쳐진 것에 대한 나대로의 대견함을 느끼기도 했다.
어렸을 때, 우리 집은 커다란 장독대에 항아리마다 고추장, 간장, 된장이 꽉 차 있었고,
온갖 젓갈도 익고 있었다.
어머니의 표현대로 ‘입이 짧아서’였는지 된장, 고추장 같은 재래음식은 입에 대지도 않고,
계란찜, 일제 어묵, 오징어, 멸치조림, 깻잎조림 등이 없으면 밥상을 본척만척했었다.
쇠고기, 돼지고기도 싫어했고, 생선이 흔한 지역에 살았건만 기름기 없고 담백한 생태만 먹었다.
어느 날엔가 동네 아주머니들이 우리 집에서 된장, 고추장을 맛보고 달다면서 내게 이런 맛있는 것을
매일 먹으니 얼마나 좋으냐고 하며 조금씩 얻어갔다.
그들이 간 뒤 한번 먹어보고픈 마음이 일었다.
집안 어른들이 권할 때는 외면했었는데 남들이 맛있게 먹는 현장에서 나도 비로소 그 맛들과 친해질 수
있었다.
그 뒤로는 찬밥에 물에 말아 굴비를 쭉쭉 찢어먹는 맛과,
새콤한 깍두기 국물에 밥을 비벼 먹고,
뜨거운 밥에 날 달걀을 깨어 넣고 일본간장으로 비벼먹는 등 색다른 미각도 즐기게 되었다.
집을 떠나 객지에서 학교를 다니는 동안 기피하고 혐오하던 식품들과도 차차 화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대학에 들어가서 소설가 김광식 교수의 단편 중 신입사원을 뽑는 대목에서 강한 충격을 받았다.
두 명을 놓고 최종심을 하는데,
임원이 함께 식사를 하며 맛있게 보기 좋게 식사하는 사람을 뽑는 장면이었다.
그 뒤로 나는 의식적으로 편식을 고치고 식사를 맛있게 하려고 노력했었다.
직장생활 거의 20년 만에,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21년 전,
나는 정말 싫증나지 않고 구수한 배추 된장국과 시원한 생태찌개 등이 입에 맞는 한식집,
‘안성또순이집’을 발견했던 것이다.
신세대 후배들이 함께 가면 별로 맛있는 줄 모르겠다고 하다가도,
몇 년 지나면 그 참 맛을 알게 되던 집이다.
지금은 교통 좋은 광화문 교보빌딩 뒤로 이사해서 딸이 솜씨를 전수 받아 운영하지만 맛은 변함이 없다.
시내에 나가면 자주 들르는데 깔끔하고 맛있는 반찬 때문에 과식하게 되어 주저하기도 한다.
여느 한식집처럼 낙지볶음, 오징어볶음, 북어양념구이, 간장게장, 동그랑땡 외에
깔끔한 개성 보쌈김치도 맛있지만 우거지 된장과 생태찌개를 시킨다.
솎음배추보다 약간 큰, 푸르게 데친 배추를 넣어서 끓이기 때문에 우거지 된장으로 부르는데,
실상 이 배추는 큰 배추의 겉대를 떼어낸 우거지가 아니라 겉절이 해먹을 만큼 연하고 싱싱한 배추를 쓴다.
곱게 빻은 멸치가루를 노랗게 잘 익은 된장에 넣어 주물러 놨던 것에 물을 붓고 끓이다가,
데친 배추, 잘게 썬 유부와 기름기 없는 쇠고기를 조금 넣는다.
얇은 양은 냄비에 오래 끓이지 않은 것을 상에 내놓는다.
배추에 들어 있는 비타민류는 국으로 끓여도 파괴되지 않고 비교적 남는다는 것을 생각하며,
아삭아삭한 배춧잎을 건져먹고 여느 된장처럼 짜지 않은 국물도 듬뿍 떠먹는다.
일식집 매운탕처럼 텁텁하지 않고 맑고 시원한 맛이 이 집 생태찌개의 자랑이다.
생태는 상등품을 구하기 위해 전담직원이 새벽 두시에 수산시장에 나간다.
새우 등 부 재료도 반드시 신선한 것만 쓰고 국물은 조미한 육수 대신 맑은 생수에 크지 않게 썬 무를 넣고
끓인 후 갖은 양념을 한다.
큰 냄비에 어느만큼 끓여서 나오기 때문에 식탁에서는 식지 않을 정도의 불을 켜두고 내장이나 알, 새우 등
기호대로 나눠 먹으며 가족끼리, 친구끼리 정을 돈독히 할 수 있다.
이따금, 생태 눈알이 눈에 좋다고 권하던 어른들의 배려가 생각나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 당황하기도 한다.
같이 간 친구가 맵지않고 시원한 국물에 웬 눈물인가 의아해 할까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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