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송화 이야기 / 김진수
참 이상한 일이다.
글이 손에 잡히지 않으면 괜히 불안하다.
계절이 자꾸 지나건만 도대체 글이 잡히지 않는다.
그러던 가을 어느 날 밤이었다.
서재에 불을 끄고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는데 책상 위에 걸린 액자 하나가 어렴풋이 눈에 들어왔다.
문단 데뷔 기념으로 선물 받은 채송화 액자였다.
누가 밀어올린 걸까. 돌각사리 틈 사이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액자 속의 채송화.
불을 켜자 수줍고 해맑은 어린 소녀같이 까르르까르르 색동웃음을 마구 토해내는 것 같다.
밤하늘 은하의 별무리 같기도 하고, 어느 여왕이 보석상자를 엎질러 놓은 것 같기도 하였다.
나는 곧바로 컴퓨터 창을 열었다.
옛날 페르시아에 보석을 좋아하는 여왕이 살았다.
얼마나 보석을 좋아했는지 자신의 백성들과 보석을 한 개씩 맞바꾸었다.
보석들이 쌓여 갔으나 여왕의 보석사랑은 그칠 줄 몰랐다.
이제 보석과 맞바꿀 백성은 한 사람도 남지 않았다.
그리하여 여왕은 자기 자신과 보석을 맞바꾸었다.
그 마지막 보석을 손에 받아 쥔 순간 여왕이 갖고 있던 모든 보석들이 폭발해 버렸다.
사방으로 흩어진 보석들은 각기 제 빛깔의 채송화 꽃으로 피어났다.
남의 나라 설화이지만 여러 가지 교훈을 담고 있어 소중해 보인다.
사치를 좋아하는 사람은 반듯이 망한다는 교훈이 담겨 있기도 하고,
백성을 우습게 여기는 왕실은 반듯이 멸망한다는 교훈이 담겨 있기도 하다.
백성은 힘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이 분노하면 세상을 뒤집어 놓는다는 교훈도 담겨 있고,
백성은 채송화 꽃처럼 순진하고 보석처럼 아름답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 같기도 하다.
옛 고향집 뒤란 장독대는 채송화 꽃이 여름 내내 둘러싸고 있었다.
그런 채송화 꽃밭은 얼마나 호사스럽던지 평화스런 천국이었다.
뙤약볕 아래 가지각색으로 얼굴을 익히는 채송화와 어린 계집아이는,
한 꼬투리에서 나온 강낭콩 마냥 닮은꼴이었다.
누가누가 먼저 일어나나 시합이라도 하듯이 아침에 눈 비비며 일어나 채송화 꽃밭으로 나가면,
어느새 햇살은 채송화 꽃밭에서 헤살을 놓고,
채송화 꽃잎은 갓 깨어난 아가의 입처럼 방실거리며 꽃잎을 열기 시작했다.
마치 자기가 먼저 일어났다고 ‘용용 죽겠지’ 하고 놀리는 것 같기고 하다.
진종일 해를 품고 풍구질하던 꽃도 해 지면 살몃이 가슴을 여미고 곤히 잠든다.
그때쯤이면 기다렸다는 듯이 어김없이 날아와 그런 채송화 꽃잎만을 골라 쪼아대던 그 참새들은 왜
그리도 밉던지. 그런 참새를 쫓느라 허수아비처럼 팔을 휘두르던 어린 날의 추억이 아련하다.
사람의 기억이란 참 놀랍다.
내 머리 어디에 숨어 있다가 이 깊은 가을밤에 어둔 하늘의 별처럼 톡톡 튀어나오는 것일까.
그 귀엽고 재롱스러운 꽃들이 어깨를 걸고 납작 엎드려 얼굴 비비며 피어 있는 장독대에서 어머니는
치성을 드렸다.
채송화가 필 때면 나보다 열 살이나 많은 언니도 유독 장독대에 나가 앉는 시간이 많았다.
그때 담장 밖에서 뻐끔뻐끔 피어오르던 연기가 언니를 좋아하던 청년이 피워 올린 담배연기였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내가 그때의 언니 나이가 되고서야 알았다.
세상의 모든 일은 다 때가 있나보다.
빨랫줄에 걸어둔 빨래가 마르는 때,
어부가 어망을 거두어 집으로 돌아오는 때.
시골학교 운동장이 어느 순간 작아 보이는 때,
인연도 잘 가꾸어야 참된 인연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때,
땅으로 기면서 뻗는 채송화 줄기와 거기에서 뿜어내는 냄새로 뱀이 얼씬을 못한다는 사실을 안 것도
그때였다.
사시장철 먹거리가 정갈하게 진열되어 있는 장독대가 신선한 공간이란 생각이 든 것도 그때였다.
참으로 조상분들의 과학적인 지혜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어릴 때 나는 무척이나 옛날이야기를 좋아했다.
밤마다 나는 언니에게 옛날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라대었다.
호랑이보다 무서운 곶감 이야기,
하늘로 올라가 해와 달이 되었다는 오누이 이야기,
혹부리영감 이야기, 도깨비 방망이 이야기, 비단장수 얼간이 이야기, 소금장수 이야기,
칠칠단의 비밀 등 아무리 들어도 물리지 않았다.
밤이 깊으면 깊을수록 언니의 이야기는 너무 재미있었다.
그럴 때면 언니는 ‘아가야 이제 잠 좀 자자꾸나.’ 하고 나를 달래었다.
그날 밤 겨우 잠이 들었다가 다음 날 밤이 오면 세헤라자데에게 재미난 이야기를 천일동안 해 주기를 바라는
포악한 왕처럼 나는 또 졸라대었다.
언니는 이렇게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독수리야 독수리야 우리 집 암탉 채 가지 말고, 밤마다 날 조르는 이 철부지 좀 채가렴.’
그 말이 무슨 말인지도 난 몰랐다.
언니가 얼마나 힘든지도 몰랐다.
다만 언니의 입이 화수분을 닮아서 옛날이야기가 한없이 쏟아져 나오기만을 바랐다.
돌이켜 보면 언니로부터 옛날 이야기를 들은 것이 내 문학의 씨앗이 되었던 듯싶다.
언니도 지금 어디에선가 나를 생각하고 있을까.
모니터의 화면에 불을 꺼야 할 시간이 가까웠나보다.
몸은 피곤하지만 글의 실마리가 풀려서인지 불안한 마음은 가시었다.
명년 봄에는 햇빛 잘 드는 베란다에 텃밭상자를 만들어야 할까보다.
그리고 종묘장으로 달려가야지.
채송화 씨앗을 한 봉지 사 가지고 와서 언니에게서 아직 다 듣지 못한 내 문학의 천일야화 채송화 이야기를
가득 심어야지.
김진수 (金振壽)
강원 강릉 生
1993년 창조문학 수필 부문으로 등단
2015년 창조문학 시 당선
한국창조문학가협회장
충북여성문인협회장
한국문인협회 위원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위원
한국수필 이사
창조문학대상
한국수필문학상
충북문학상(창작)
환경문학대상
수필집 <숨은나> <하얀 숲>
시집 <소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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