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온밥통 뚜껑을 열고 공깃밥을 뜬다.
정수기 찬물을 내리며 몇 번 가신다.
두레박으로 퍼 올린 우물물에 말아 먹던 꽁보리밥 맛이랴.
장독 속에서 누렇게 숙성된 된장을 떠올리며 풋고추로 쌈장을 찍는다.
밑반찬도 동나고 입맛도 깔깔하다.
배는 허전한데, 먹어도 그만 안 먹어도 그만이라는 어정쩡한 생각이 들 때,
담백하고 개운한 뒷맛에 끌려 혼자 먹는 점심(點心)이다.
우량아로 태어났다 하나 잔병치레를 하도 많이 해서 그랬는지 어릴 때 나는 골골했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음식을 대하면 괜히 트집을 잡았다.
입이 짧아 두 살 위아래 누나나 여동생 몰래 챙겨주시던 고기반찬도 비위에 거슬려 마다하고는,
김치나 나물반찬에 젓가락을 대며 깨작거렸다.
그뿐 아니라, 어머니가 만든 음식이 아니면 꺼림직한 생각이 들어 아예 먹지 않았고,
집안 음식이라도 입에 댄 날이면 꼭 탈을 냈다.
편식(偏食), 소식(小食), 소찬(素饌), 나쁜 식생활습관은 다 안고 있었다.
6월 마지막 주말에 대구수필 1박 2일 담양 문학 기행이 있었다.
진하게 고아낸 국물에 구수하면서도 고들고들하게 씹히는 창평의 돼지머리국밥도 엄청 맛있었지만,
창평 전통시장 통로 난전에서 맛본 할머니의 점심을 잊지 못한다.
없는 것이 없을 만큼 온갖 생활용품들이 다양하게 널려 있는 죽공예품 구경에 정신을 팔다가,
난전 할머니들의 점심 식사에 시선이 멎었다.
참 맛있게 드신다고 건넨 한마디에 한 할머니가 먹어 보겠느냐며 숟가락을 내민다.
너른 양재기에 삶은 시래기 숭숭 썰어 넣고 된장국 놓아 쓱쓱 비빈 비빔밥이다.
한 숟갈 떠서 입에 넣고는 천천히 씹으며 음미했다.
한 술은 정이 없다며 숟가락을 빼앗아 삽으로 뜨듯 뜨고는 묵은 김치를 걸쳐서 격의(隔意) 없이 내밀었다.
구수하고도 풋풋이 다가오는 그리운 맛, 무미(無味)의 별맛이었다.
고희에 가까울 할머니들의 깊은 주름 속에서 잔잔히 피는 삶의 웃음,
지난날 그 시대를 살다 가신 할머니의 어머니 모습을 본다.
중학교 다니던 70년대 초, 모두가 어려웠던 시절이었고 우리집 형편도 다를 바 없었다.
시내 중심가를 벗어나면 백색전화기 한 대 값으로 집 한 채를 쉽게 살 수 있었던,
웬만한 부잣집 아니고서는 고가의 흑백 TV나 냉장고를 두기가 어려웠던 때였다.
여름에는 보리밥을 대소쿠리에 담아 삼베 보자기로 덮고는 부엌에 걸어두었다.
별 재료가 없어도 어머니는 남다른 손맛을 내셨고, 특히 가지냉채 요리를 잘하셨다.
적당하게 삶은 가지를 가늘게 찢고 볶은 참깨를 넣은 다음 참기름을 둘러 조물조물 버무린 후,
찬물을 붓고는 간을 하셨다.
오이채를 곁들인 어머니의 가지냉채는 시원하고도 깔끔했다.
여기에 보리밥을 말아 뚝딱 비우던 우리 남매들이었다.
여러 해 전 초가을에 시공무원 불자들의 설악산 대청봉 산행이 있었다.
새벽 4시, 오색약수터 입구에서 출발하여 대청봉을 오르고 중청을 거쳐 봉정암에 이르러 점심공양을 했다.
‘시장기를 넘어선 허기, 봉정암의 절경과 함께 끝없이 펼쳐지는 설악의 대자연.
- 하얀 플라스틱 그릇의 맑은 미역국, 밥 두 주걱과 오이지 몇 조각.’ 더없이 넉넉한 부처님 진짓상이었다.
재작년 선거 때다.
대부분의 후보가 회피하는 중구 도원동을 늦은 시각에 찾았다.
현실 가능한 그곳의 복지원을 약속하며 어깨띠를 메고 들른 것이 그날로 세 번째였다.
앳된 얼굴에 짙은 화장을 하고 붉은색 불빛 우리방 속에 갇혀 손님을 기다리는 홍등가.
가치와 현실의 충돌이 상존하는 곳, 포용과 소통의 단절이 속성처럼 굳어버린 곳.
냉랭했던 처음의 분위기와는 달리 다소의 변화가 보였다.
대부분 무관심한 무표정이었으나 더러 박수로 응해주는 아주머니도 있고 손을 흔드는 아가씨도 있었다.
유세차를 세워두고 걸어서 도는데, 어느 모퉁이에서 몇몇 아주머니들이 모여 밤참을 먹고 있었다.
물에 담가놓았다가 행군 묵은 김치에 식은 밥과 멸치젓갈을 찍어 싼 쌈밥인데,
그렇게나 맛있게 먹을 수가 없어 보였다.
“한 쌈 싸 드릴까요?”
한 아주머니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저런 분이 여기서 이런 음식을 드시겠냐는 핀잔이 나왔다.
“주실래요?” 편견을 벗어버리자, 의외라는 듯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내 식성과 맞다거나 한껏 시장한 상태여서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찌 그리나 감칠맛 나던지.
기꺼이 두 쌈 더 얻어먹었다.
맛있게 먹어 주어서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중학교 이후로 틈만 나면 축구나 야구를 하면서 운동장에서 살다시피 했다.
건강이 회복되면서 까다롭던 내 식성은 어느새 확 바뀌어져 있었다.
한 끼에 두 그릇은 쉽게 비웠으며 개고기 이외에는 가리는 음식이 없었다.
편식과 소식, 소찬이 끼일 틈새가 없었던 까닭이다.
그럼에도 바람 불면 날려갈 호리호리한 체격, 176 키에 62 체중으로 입대했다.
세상이 많이도 변했다.
있는 집에서는 보리밥을 즐겨 먹고, 없는 집에서 이밥을 먹는다.
넉넉한 몸매가 아니가, ‘쭉쭉빵빵’ 체형의 아가씨가 부잣집이나 재벌의 며느리감이다.
적당히 나온 배가 인격의 척도라던 때도 있었지만,
팔순의 할아버지가 TV화면을 통해 보디빌딩으로 연마한 초콜릿 복근을 자랑하는 시대다.
최소한 10킬로그램은 빼야 할 체중이지만, 이게 어디 쉬운 일인가.
어렵사리 조금 뺐다가 잠시 방심하면 곧바로 요요현상이 덮친다.
편식(偏食)과 소식(小食), 그리고 소찬(素饌),
최소한 내게 있어서만은 나쁜 식생활습관이었던 이것이 바른 식생활습관으로 인식되기까지
반세기가 흘렀다.
찬물에 만 공깃밥과 쌈장, 청양고추 두어 개와 육 쪽 마늘, 오늘 점심상 앞에 앉았다.
타는 적막 속 매미소리에 더 달구어지던 여름 한낮.
대청 뒷문도 열어젖히고 사발에 얼음물보다 찬 시골 집 앞 우물물로 보리밥 말아 생된장에 풋고추 찍어서
버석 깨무시던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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