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의 눈물 / 구활
간밤에 어머니가 오셨다.
무슨 일로 오신 걸까.
이렇다 할 우환도, 특별한 걱정거리도 없는데, 온종일 궁금했다.
꿈속 방문의 이유를 몰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최근 행적을 되짚어 보니 그럴 한한 꼬투리 하나가 잡혔다.
아하, 이것 때문에 오신 것이로구나.
저승에서도 아버지와 한 집에 살고 계시다면 이런 저런 시중드시느라 몹시 바쁘실 텐데.
나는 일곱 명이 한 달에 한 번 점심을 먹는 모임의 늦깎이 회원이다.
예술을 전공하거나 애호가들로 구성되어 있어,
화제는 문학, 음악, 미술, 조각, 공연, 건축, 음식 등으로 무척 다양하다.
조각하는 분이 “회원들의 흉상을 제작하여 전시회를 열 때 작품으로 내 놓겠다”고 했다.
회원들이 수긍하는 걸로 일단 결론이 났다.
나는 엉거주춤한 상태로 앉아 있다가 오케이 물결에 휩쓸려 떠내려가고 말았다.
흔적을 남기는 일을 좋아하지 않는다.
사진을 찍는 것은 즐기지만 찍히는 것을 탐탁케 생각하지 않는다.
행사의 단체사진 촬영 때도 마지못해 빈자리를 채울 뿐 좀처럼 앞자리에 앉지 않는다.
우리 집 거실에는 사진관에서 찍은 가족사진이 없다.
그러니까 사진에 대한 나의 생각이 이렇다 보니 흉상을 만드는 것 자체가 마음 내키지 않는 일이다.
유월 어느 날, 흉상의 점토원형이 완성됐단 기별을 듣고 회원들과 함께 작업실에 들렀다.
남들이 ‘이만하면 됐다’며 오케이 사인을 하길래 나는 줄래줄래 따라다니다 나온 것이 자동 오케이가
됐나 보다.
그날 밤 어머니가 꿈에 오신 것이다.
어머니는 바람을 타고 오셨는지 두레박줄을 타고 오셨는지 잠시 머물렀다간 어디로 가셨는지 보이지
않았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아무 말씀이 없어서 허전하고 안타까웠다.
삼십 수년 전에 경주의 조각가에게 어머니의 흉상 제작을 의뢰한 적이 있었다.
어머니의 동의를 얻어 점토로 모습을 뜨고 여러 차례 수정 작업을 거친 후에 청동 조상을 완성했다.
어머니 방에 좌대까지 준비하여 안치시켰더니 매우 좋아하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는 제 방에 모시겠습니다.”
“오냐, 그렇게 해라.”
평생 애만 먹였는데 오랜만에 효자 노릇을 한 것 같아 내가 생각해도 무척 기특하게 느껴졌다.
어머니는 서른 초반에 남편을 잃고 아이 다섯이나 딸린 청상이었다.
의지할 곳 없는 당신은 예수그리스도를 남편쯤으로 생각하는 독실한 크리스찬이셨다.
모든 것을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상의하셨고 십계명에 반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효자 흉상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흉상은 토르소와 마찬가지로 다리가 붙어 있지 않아 제 발로 걸어 나갈 수도 없을 텐데,
기이한 일이었다.
식구들에게 물어봤으나 아무도 몰랐다.
어머니께 여쭤 봤으나 대답이 없었다.
해답은 우리 동네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아저씨가 귀띔해 주었다.
“밖으로 끌어내 도끼로 박살내서 갖다 버려요.”
“이건 내다 버릴 물건이 아닌데요.”
“시키는 대로 해요.”
“아드님이 알면 뭐라 할 텐데요.”
어머니의 흉상은 등산장비함에 들어 있는 캠핑용 손도끼로는 쪼갤 수가 없었다.
서툰 어머니의 도끼질로 얼굴에 피탈 칠을 한 조상은 울면서 떠날 수밖에 없었다.
“빨리 싣고 가서 버리세요.”
어머니의 닦달에 못 이긴 아저씨는 청동 쓰레기 하나를 리어카에 싣고 뒤통수를 긁으며 가벼렸다.
주일 낮 예배의 설교 제목이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가 아니었나 싶다.
십계명 둘째에 있는,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하늘과 땅 그리고 물속에 있는 형상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는 목사님의 열띤 설명에 크게 감동하신 것 같았다.
어머니는 자신의 행동이 계율에 반하는 행위라는 걸 설교를 통해 절절하게 느끼신 것 같았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아들이 새겨다 준 흉상’으로 해석했고,
당신이 세상을 버릴 후엔 그 청동 우상 아래 둘러앉은 자식들이 자신을 추모하며 섬길 것이라고 판단했다.
어머니는 아마 예배가 끝나기도 전에 종종걸음으로 집으로 돌아와,
‘빌어먹을’ 우상을 냅다 내동댕이쳐 내다 버린 것이다.
화가 났다. 돈도 아까웠다.
흥건하게 피를 흘리고 있는 우상을 내가 보았더라면 ‘뭉크의 <절규>’는 내다 앉을 정도로 울부짖었을
것이다.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우상을 팽개친 어머니의 행위는 너무나 당당했다.
이슬람교도들이 신앙고백문인 “라일라하 일라 알라(알라 외에 다른 신은 없다)”를 읊조리며 라마단 기간
해가 떠있는 시간에는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계율을 지키는 것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꿈에 만난 어머니가 그냥 가버리신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난 한마디 말씀만은 꼭 전하고 싶은데 연락할 방법이 없다.
저승의 전화번호도, 이메일 주소도 모른다.
하늘을 감동시킬 방법은 없을까.
가만 있자, 천국신문사에 「우상의 눈물」이란 글을 독자란에 투고해야겠다.
모여 사는 영혼들이 귀신같이 알아차리고 내 뜻을 어머니에게 전해 주시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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