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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이의 틈' / 이해인

아즈방 2023. 8. 24. 16:55

사람 사이의 틈 / 李海仁

 

 

아파트 사이사이

빈 틈으로

꽃샘 분다

아파트 속마다

사람 몸 속에

꽃눈 튼다

갇힌 삶에도

봄 오는 것은

빈 틈 때문

사람은

새 일은

틈에서 벌어진다.

 

김지하 시인의 『중심의 괴로움』이란 시집을 읽다가 만나게 된 ‘틈’이라는 이 시가 요즘 내 마음 안에서

떠나질 않는다.

창 틈으로 스며들어 오는 햇빛, 달빛, 바람,

높은 산에서 바위 틈을 비집고 돋아나는 아름다운 들꽃,

우리 집 장독대 옆, 눈에 잘 띄지도 않는 좁은 돌 틈을 비집고 무성하게 자라나는 풀들,

그리고 바쁘게 일을 하다 잠시 쉬어보는 시간과 시간 사이의 틈,

하루에도 수없이 어떤 틈들과 만난다.

자연과 일상의 시간 사이에 어떤 틈이 있듯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틈이 있다.

상대방을 넉넉히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여백으로서의 밝고 긍정적인 틈이 있는가 하면,

서로를 오해하거나 완강히 거부해서 벌어지는 어둡고 부정적인 틈도 있다.

그래서 어떤 관계가 안 좋을 땐 ‘그들에게 틈이 생겼다’ 또는 ‘틈이 벌어졌다’는 표현을 하는가 보다.

희망과 신뢰를 바탕으로 한 사랑의 틈이야 많을수록 좋고 살아가는 데 힘이 되지만,

서로의 마음이 통하지 않아 빚어지는 불신, 오해, 미움의 틈은 항상 슬픔과 우울함을 안겨준다.

내가 30년 넘는 세월을 수녀원에 살면서 가장 괴롭고 힘들었던 일을 돌이켜보면,

함께 사는 이들과의 관계에 어떤 보이지 않는 틈이 생겼을 때였다.

어느 땐 정말 큰 이유도 없이 평소에 가까이 지내던 이와 사이가 벌어져 한없이 어색해지면서도,

서로 표현을 못할 때가 있는데,

이런 종류의 틈은 큰 소리로 싸우는 것보다 더욱 깊은 괴로움을 안겨준다.

어떻게 이 틈을 메꾸어 가야 할지 방법조차 알지 못해 애를 태우다 보면 ‘연옥이 따로 없다’는 생각도 들고,

‘이래서 공동생활이 어렵구나’ 하고 탄식하며 잠시 절망에 빠지기도 한다.

사실은 좀더 잘해 주고 싶어 좋은 뜻으로 한 행동까지도 곡해되어 어색한 틈을 만들어 버렸을 땐,

울고 싶도록 답답하다.

일반 가정 같으면 금방 툭 터놓고 한 마디해서 그 틈을 메꿀 수도 있을 텐데,

수도원에서는 서로 서로가 너무 조심스럽게 대하다 보니 이 틈이 필요이상으로 오래 벌어져 있는 적도

많은 듯하다.

마냥 내버려두어도 안 되고, 너무 성급히 메꾸려고 해도 안 되고,

기회를 보아 자연스럽고 슬기롭게 메꾸어 가야 할 사람과 사람 사이의 틈.

무엇보다도 용서와 화해로 서서히 메꾸어 가야 할 틈과 틈.

새해를 맞으며 나는 어떤 모양으로든지 그 동안 나의 탓으로 썰렁하게 벌어졌던 친지들과의 틈을,

따스한 사랑으로 메꾸어 가는 노력을 해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가깝다고 너무 만만하게 여겨 예의 없이 굴었던 나의 말과 행동,

장담해 놓고 지키지 못한 작은 약속들,

상대의 마음을 제대로 읽어주지 못한 무분별과 무관심,

그의 기대를 저버린 나의 이기적이고 교만한 태도,

너그러운 이해심과는 거리가 먼 선입견, 고정관념, 편협한 태도 등등.

이 모두는 평소에 잘 지내던 이들과도 조금씩 틈이 벌어지게 하는 원인이 된다.

아마 어떤 틈은 내가 원하는 것처럼 그렇게 금세 메꾸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더구나 내 탓으로 한 번 벌어진 틈은 그만큼의 대가를 치르어야 하리라.

누가 나를 거부하고 나에게 심한 말로 모욕을 주더라도 당황하지 말고 묵묵히 견뎌낼 수 있는 용기와

참을성을 지녀야겠다.

실은 누구보다 나 자신을 위해서도 이 일은 새해 결심으로 뿐 아니라 평소에도 가장 최선을 다해야 할

과제임을 알고 있다.

가장 겸손하고 온유하게 그리고 성실하게 이 틈을 메꾸어 가지 않는 한,

나에겐 결코 참된 평화와 행복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