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수아비의 독백 / 백승분
친정집에 들렀다.
가을걷이가 대충 끝나 햅쌀을 찧어 놓았으니 가져가라는 어머니의 전화를 받고서다.
아직 밭작물이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지 어머니는 보이지 않고,
허수아비가 텃밭을 지키고 있다.
그도 가을걷이에 힘이 들었나보다.
남루한 옷자락을 여밀 생각도 않고 낯익은 사람을 대하듯 편안한 표정이다.
지나가던 바람이 어루만지고 옷매무새를 바로 잡아주자,
그의 독백이 귓전에 사운댄다.
바쁘다.
가을엔 다들 그렇겠지만 나는 잠시도 한눈을 팔 수가 없다.
주어진 땅을 지키려면 밤잠까지 설쳐야 될 때도 있다.
주인님이 봄부터 여름까지 잘 키워서 맡긴 걸 상품이 되게 돌봐야 한다.
비록 몸은 자유롭지 않지만 최선을 다한다.
한낮에는 내리쬐는 열기가 뜨겁다.
옷을 다 벗어던져도 시원찮은데 그럴 수는 없다.
밤에는 느닷없이 나타난 초겨울이 말을 걸어도 따뜻한곳으로 자리를 옮기지 못한다.
온기 없는 달빛과 대화하며 스스로 몸을 데운다.
혹 비가 내리는 날은 처량하기 그지없지만 오히려 필요한 곳에 찾아 쓴다.
목을 축이고 먼지 앉은 몸을 씻으며 자신을 다잡는다.
바람도 잘 구슬려야한다.
거세게 몰아쳐 모든 걸 다 쓰러뜨린 지난여름의 아픔을 호소하며,
부드러운 사이가 되자고 먼저 고개를 숙인다.
종일 벌판에 홀로 서 있자면 귓속말만하는 햇빛과 바람보다는 참새가 낫다.
온 동네 소식을 물고 와서 재잘거 리는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세상과의 통로가 되는지라 잠시 외로움을 잊는다.
여러 가지로 고맙기는 한데 사실 주된 임무는 이 녀석들을 쫓는 것이다.
먹성이 여간 아니라 진퇴양난(進退兩難)이다.
그래도 내 일이 우선이니 대책을 세우는 수밖에 없다.
차림새가 맘에 걸린다.
외모를 챙길 처지가 아닌 걸 알지만,
몸집보다 턱없이 크고 낡은 옷이 영 남세스럽다.
하지만 겉이 무슨 소용일까.
실속이 있으면 되지, 자위하며 개운치 못한 마음을 한곳으로 눙쳐둔다.
녀석들이 깔보고 설치는 꼴이 기고만장이다.
허름한 외모만으로도 이미 눈 아래 보일 텐데 몸까지 자유롭지 못한 걸 알고 있으니
말해 무엇 하랴.
머리에다 똥을 싸고 팔에 걸터앉는 것도 예사다.
실컷 배불리 먹고 졸리면 어깨에서 잠까지 잔다.
예전엔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해가 갈수록 영악해져서 감당하기가 힘들다.
괘씸하지만 큰 소리도 내지 못하고 한 대 쥐어박을 수도 없어 분통이 터진다.
원래 이렇게 타고난 것을 수원수구(誰怨誰咎)하겠는가.
들머리집 아저씨는 고개를 떨어뜨린 지 오래다.
녀석들의 횡포에 두 손을 들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보고 기가 더 세졌다.
나도 질세라 오기가 생겼다.
부자유스런 몸이 장벽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니 통로가 보인다.
올해는 주인님에게 반짝이 줄을 매어달라고 했다.
번쩍 거리는 줄을 바람에게 부탁해 세차게 흔들어 댔다.
찧고 까불 때는 언제고 놀라서 줄을 피해 이리저리 우르르 날아다니는 모습이
가관이다.
배를 불리기는커녕 굶주린 뱃속에서 나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는 듯하다.
분탕질한 대가를 혹독히 치른다. 깨소금 맛이다.
때로는 바람이 대식구를 이끌고 이동하느라 피해를 줄 때도 있지만 이런 날은
무척 고맙다.
주인님의 발자국소리가 요란하다.
이젠 임무가 끝났다.
황금빛 영역을 오롯이 지켜 주인님께 바치니 떳떳하다.
텅 빈 들판이 허전하기도하고 성취감에 힘이 쏟기도 한다.
최선을 다했기에 흐뭇하다.
그런데 가슴한쪽으로 스며드는 시린 바람의 정체는 무얼까.
고단한 눈꺼풀이 의지와 상관없이 내려앉는다.
어머니의 삶이 허수아비를 닮았다.
자식들을 위해서라면 눈비를 맞는 건 예사였으리라.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날이 어디 하루 이틀이었으며,
어느 하루 편히 귀잠 든 날이 있었을까.
참새떼보다 더한 자식들을 건사하느라 몸과 마음은 성한 곳이 없을 것이다.
허수아비의 너덜너덜한 옷차림과 무엇이 다르랴.
지금도 자식들에게 보탬이 될 궁리만 하시는 모습에 마음이 쓰리다.
멀리 들판 길을 서둘러 걸어오시는 어머니의 모습이 보인다.
급한 몸짓과 달리 속도를 내지 못하는 걸음걸이가 어둔하다.
긴 세월 이고 오신 삶의 무게가 이젠 힘에 부치는 모양이다.
콧등이 시큰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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