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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트 단상(斷想)' / 강승택

아즈방 2024. 9. 22. 21:06

 

트로트 단상(斷想) / 강승택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르고 늦바람이 용마름을 벗긴다더니,

광풍도 이런 광풍이 없다.

평생 가정과 일밖에 모르던 여자가 트로트 광풍에 갇혀 헤어날 줄을 모른다.

아내는 24시간 녀석을 끼고 산다.

잠을 잘 때나 화장실에 갈 때, 심지어 샤워할 때조차,

곁에 두지 않으면 허전해 못 견딘다.

어느 날 밤에는 코까지 골아 가며 자고 있기에,

슬그머니 쥐고 있던 유튜브의 스위치를 꺼준 적이 있다.

순간 얼마나 격렬하게 반응하던지,

나는 그만 데인 손 거둬들이듯 황급히 녀석을 내주고 말았다.

좌견천리, 앉아서 천리를 본다지만,

과연 아내는 자면서도 노래를 듣고 감상하는 신통함이 있는 줄 그때 처음 알았다.

 

요즘 공중파 방송을 통해 등극한 어느 남자 가수에 대한 아내의 관심이 도를 넘었다.

티브이는 물론 유튜브 동영상까지,

그가 나온 프로라면 하루에도 몇 번씩 보고 또 본다.

이럴 때 아내의 얼굴은 구름 위에 떠 있는 소녀의 얼굴처럼 행복한 미소가 떠나질

않는다.

그러다 혼자 보기 아까운 장면이라도 등장하면 나에게까지 감동을 강요하는데,

이럴 때 반응이 신통치 않으면 당신처럼 멋대가리 없는 사람은 처음 본다며,

오금을 박기도 한다.

 

일찍이 이런 아내의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일제 강점기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많은 대중가요가 부침했어도,

온전히 부를 줄 아는 노래가 없는 사람이다.

평소 애절한 가사와 곡의 분위기에 취해 내가 그토록 노래하고 다녀도,

번번이 귀를 막던 사람이 어느 날, 한 젊은 가수의 구성진 트로트 요술에 꽂혀

정신을 못 차리다니 이런 불가사의가 없다.

 

무릇 세상사 모든 일이 증상이 있으면 원인이 있는 법.

대체 아내의 이 같은 변신은 어디서부터 비롯되는가.

나름대로 곰곰 생각해보면 낌새가 전혀 없던 건 아니다.

어느 날 아내는 말했다.

살아온 세월이 허무하다고.

한 번도 자기의 삶을 산 적이 없다고.

그러면서 결정적으로 한마디 보탰다.

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지금처럼 살지는 않을 거라고.

이 말을 듣는 순간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른다.

아내의 모든 후회가 나로부터 비롯됐다는 자책에 심장이 멎는 서늘함을 느꼈다.

 

생각하면 아내만큼 희생으로 점철된 삶을 산 경우도 흔치 않으리라.

능력 없는 남편 뒤치다꺼리와 아이들 뒷바라지야 그렇다 쳐도,

없는 살림 일군다고 평생을 일 속에 파묻혀 지냈다.

변변한 취미생활 한번 못해보고 세상 나들이 못한 채 갇혀 지냈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순간,

가슴속에 일렁이는 신산함이 어찌 작을 수 있을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아내도 늙는구나 하는 생각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트로트는 우리 정서에 꼭 맞는 노래다.

어두운 골목길, 귀갓길의 사내가 조금 전 마신 술의 취기를 빌려 자기도 모르게

흥얼거리는 것이 트로트요,

이별한 청춘 남녀가 사랑의 아픔을 풀어내는 것도 트로트를 통해서다.

기쁠 때나 슬플 때 우리 곁엔 늘 트로트가 있었다.

 

아내의 말을 빌리자면 요즘 트로트를 들으면 힐링이 된다고 한다.

이보다 더 반가운 소식이 있을 수 없다.

이제 바라기는, 이왕 새로운 세계에 눈을 떴으니,

모든 시름을 노래에 담아 날려버릴 수 있게 되기를,

그래서 나의 마음의 짐도 덩달아 가볍게 되기를 나는 간절히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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