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술잔을 입에 대기 시작한 건 갑년(甲年)이 지나서였다.
소싯적엔 밀밭만 스쳐도 얼굴이 화끈대는 것 같아 술과는 인연을 맺지 못했다.
더구나 아버님이 간경화로 일찍 타계하신 그 원인이 알코올 중독에서 비롯됐기 때문에,
나로선 술이 저주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종갓집 기제사는 어찌도 그리 자주 찾아오던지,
아랫목에 들여 논 술독에서 뽀르륵 소리가 나기 시작하면 애주가이신 당신은 기다렸다는 듯,
용수 박아 웃국을 시음하시곤 했다.
지금도 향가(鄕家) 대숲에 오르면, 일제말의 악랄한 수탈 행위의 눈길을 피해 파 놓은 밀주 항아리
구덩이가 피압박 민족의 아린 상흔(傷痕)으로 남아 있다.
그땐 밀주 단속반원과 산림감수가 서낭당 재빼기에 나타났다 싶으면 온 동네 사람들의 입술이 퍼렇게
질려버리고 말았다.
술은 기쁠 때 마시고, 또 슬퍼서도 마시는 양면성을 지녔다.
경사가 나면 환호작약(喚呼雀躍)하며 축배를 들고,
덧없는 인간사에 설움이 복받쳐도 폭음을 한다.
그러나 때론 극기(克己)의 활력소가 되기도 한다.
독일군이 ‘독소(獨蘇) 불가침조약’을 깨고 소련을 침공한 것이 1941년 여름이었다.
겨울이 오기 전에 소련을 점령하려던 나치의 계산은 두 겨울이 지나도록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한겨울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독일군은 혹독한 추위에 결국은 무릎을 꿇고 말았다.
이때 소련군은 하루에 100g씩 지급되는 독주 보드카로 한파를 견디며 싸움에 승리했다.
술의 위력이 나라를 지킨 원동력이 된 셈이다.
그래서 요즘도 러시아 사람들은 술에 너그러운 편이라고 한다.
영하 40도 아래는 추위도 아니고, 알코올 40도 미만은 술도 아니라는 말이 그래서 나왔는지도 모른다.
‘시름을 잊게 하는 술’이란 뜻의 망우물(忘憂物)을 유독 즐겨 마셨던 연암(軟巖)의 ‘술 낚시’ 일화는
호방한 문장가의 기개(氣槪)가 엿보여 만인에 회자된다.
귀한 손님이 왔을 때에만 술을 받아오는 가난한 아내를 회유하기 위해,
그는 오늘도 한길로 나가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마침 사인교 타고 지나는 낯선 이가 있어 연암은 무조건 길을 막고
“영감, 누추한 집이나마 잠시 들러 약주나 한 잔하며 쉬어가십시오.”
하고 막무가내로 사랑채에 모셔 들인다.
그런데 괴이쩍게도 조촐한 주안상 위의 놓인 두 술잔을 주인 혼자서 벌컥벌컥 다 마셔버리곤,
껄껄 웃으며,
“영감! 뭐 이상히 여길 것 없소. 오늘은 귀인이 내 ‘술 낚시’에 걸려들었소.”
하고 호탕하게 웃어 제쳤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시오. 그리고 ‘술 낚시’는 무슨 뜻이오?”
연암은 그제야 술 낚시에 대한 내력을 이야기 했다.
그날 밤 이 승지는 정조에게 이 사실을 아뢰었다.
상감은 그 말을 듣고,
“그 사람은 분명 연암 박지원일세. 자기 재주만 믿고 방약무인이 지나쳐 벼슬을 내리지 않았는데,
그다지도 궁하다니 참, 안됐어!”
하고 며칠 뒤 안의(安義) 현감으로 내려 보냈다.
공자가 술을 사양하지 않았듯,
평생 술을 가까이 하셨으면서도 결코 발걸음 흐트러뜨리지 않으셨던 선고(先考)!
이왕 그리도 서둘러 가실 줄 알았으면 왜 벽장 속에 감추어 두고 자시는 소주병을 꺼내다 버렸으며,
요즈음 그 흔해빠진 삼겹살 술안주 한번 푸지게 올려드리지 못했던가?
어차피 유한의 삶을 꾸리다가 덧없이 가는 게 인생이거늘...
두고두고 한 맺힌 멍울만 가슴에 응어리로 남았다.
미움도 세월의 마모에 날이 무디어지는 걸까?
나이 들수록 불면의 밤이 깊어지고,
그 때마다 자작자음(自酌自飮)하며 무심히 지나친 이웃들의 표정을 하나하나 짚어 본다.
요즘은 매일같이 술을 먹다시피 하지만,
‘사람이 술을 마시고, 술이 술을 마시고, 술이 사람을 마신다.’는 법화경의 말씀을 내 주도(酒道)의
좌우명으로 삼고 있다.
러시아의 문예사조에 ‘거꾸로 보기’란 용어가 대두된 적이 있다.
허나 나는 필을 들고 궁싯대다 글이 막히면 습관처럼 술잔을 잡는다.
한 잔 술 거우르고 먼 하늘 끝 응시하노라면 거기 우주의 실상이 오련히 나타나기 때문이다.
'🤍 文 學 > 隨筆 .'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군불을 지피며' / 백남일 (0) | 2023.06.29 |
---|---|
'숭늉' / 백남일 (0) | 2023.06.29 |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 / 원영 (0) | 2023.06.06 |
'호랑이눈깔뺀파리' / 안도현 (0) | 2023.06.06 |
수필 - '느림보 산행' / 이윤애 (0) | 2023.05.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