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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불을 지피며' / 백남일

아즈방 2023. 6. 29. 11:26

불을 땐다.

아궁이에 화목을 밀어넣고 잎나무 불쏘시개로 불을 사른다.

이때 불씨가 자리 잡을 때까진 불집을 쑤석거려선 안 된다.

세상사 어디 뜸들이지 않고 되는 일 있던가.

쌍 도리 채운 남향받이 육간 생가.

칠남매가 성장하여 대처로 떠나고, 이제는 적막공산에 홀로 앉아 그 옛날의 번화를 반추하고 있다.

장손의 책무가 아니더라도 도심의 소음으로 귀가 먹먹해질라치면, 나는 지체 없이 고향으로 향한다.

하루가 다르게 변모하는 첨단 문명의 소용돌이에 표류하는 자존을 붙들기 위해,

벼 배동서는 논두렁길을 걷는다.

아궁이에 불을 지핀다.

빈 솥에 물을 붓고 군불을 때는 것이다.

달포 가까이 비워둔 휑한 아궁이가 불길을 선뜻 받아들이질 못한다.

그러나 마른나무에 불이 붙고 불목이 덥혀지기 시작하면,

마른갈이 논에 물 대듯 이내 방고래가 불길을 터준다.

역풍이 심한 날도 윗목 구들장 밑의 완충 공간의 개자리가 연기의 역류를 막아준다.

사려 깊은 조상님의 배려에 새삼 고개가 숙여진다.

아궁이에 든 땔감은 그 성미에 따라 타는 모습이 천차만별이다.

도리깻열에 작신 얻어맞고 부엌으로 끄덩이 잡혀온 보릿짚은 타는 소리만 요란했지 도시 불땀이 없다.

그러나 지지랑물 찔끔대는 유월 한나절, 무쇠솥에 햇보리 일어 볶는 데는 제격이다.

실하게 영근 쌀보리 톡톡 튀는 소리와 보릿대 마디 타다닥 탁탁 타들어가는 공명도 구성지지만,

그보다도 불 먹은 솥 열 조절하는 덴 보릿짚만 한 것이 없다.

하기야 콩 바심 마당에서 끌어들인 콩깍지나 솔수펑이에서 긁어온 금빛 솔가리가 불발이 순하기는 하다.

하지만 이들 땔감은 아무래도 선들바람이 산 아래로 내려오기 시작하는 늦가을에 맛보는 아궁이의 정취다.

한데, 이들 땔감은 솔바람 소리 그윽한 산마을의 호사일 뿐,

물꼬 살피기 위해 평생 살푸 짚고 논두렁만을 헤매야 하는 들녘에선 언감생심이다.

그곳에선 사시장철 눅눅한 볏짚만을 때야 하니 그 고역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화끈한 불꽃 한번 제대로 사르지 못한 여한인가.

타고 남은 재가 왜 그리도 많이 쌓이는지,

고무래 자루가 휘도록 삼태기에 긁어 넣어야 하니 이의 뒤처리가 만만찮다.

아궁이에 불을 때면서 눈물깨나 쏟을 때가 있다.

엄동설한이 쇠죽 끓이는 아궁이 속에 간혹 청솔가지를 쟁일 때가 있다.

생나무에 불을 붙이자니 자연 오소리 굴속 그을리듯 매캐한 연기 세례를 받아야만 한다.

하지만 생솔가지에 불이 붙었다 하면 괄하게 타는 기세란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화다닥 탁탁 타들어가는 불기운은 산날맹이로 치닫는 산불의 형세다.

부지깽이 장단에 콧노래라도 부르며 불을 땔 수 있는 여유는 그래도 장작불 지필 때이다.

안친 떡시루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기 시작하면,

아낙은 치맛자락 걷어올리고 불 앞에 앉아 한숨 돌린다.

이때 여인의 문으로 밀려드는 부귀다남의 정기는 아궁이불이 마련한 원적외선의 은총이다.

동지가 턱밑으로 다가오면 산골에서 으레 겨우살이 화목으로 장작을 준비했다.

장작을 패는 통나무는 참나무만 한 것이 없다.

결이 대쪽 같아 도끼 날 대기가 무섭게 쩍쩍 갈라지는 품새를 볼작시면,

삼 년 묵은 체증도 후련하게 풀린다.

그러나 우리나라 숲의 주종인 소나무 장작불같이 유려하게 타는 불도 드물다.

진홍색으로 타는 솔불은 안으로 도사린 온기를 배달의 품속에 안겨준 다사로운 불길이었다.

여인네 속살같이 연한 목질이 연소될 때 설핏 풍기는 송진내 또한 선계의 불놀이를 연상케 한다.

이 불꽃의 신비가 고려청자의 깔색을 우려냈으며, 조선백자의 완만한 곡선을 연출해 냈다.

하나, 뭐니뭐니 해도 불꽃이 현란하기론 사과나무 등걸불을 따를 만한 것이 없다.

불꽃이 춤을 춘다.

프로메테우스가 회향나무 가지를 꺾어들고 천상에 올라가 붙여왔다는 불,

이 불이 사대 백여 년의 시공을 데운 고향집 아궁이 속에서 여여히 타들어가는 모습을 응시하노라면,

나도 모르게 불꽃 속에 빨려들고 만다.

하여, 속진의 때가 소진되고 나면 내 영혼의 고갱이엔 황금빛 마알갛게 빛살이 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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