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pot of Jeju azbang

제주아즈방의 이런 저런 여러가지 관심사 창고

🤍 文 學 237

'왈바리' / 주인석

왈바리 / 주인석 사는 일은 뚜렷한 공식도 방법도 없다. 스스로 부딪히고 깨지며 웃고 우는 가운데 버려지기도 하고 선택되기도 하여 쌓이는 것이다. 삶의 조각이 크다고 좋은 모양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작다고 쓸모없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작은 조각 하나가 인생을 무너지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얘는 기형이라요.” 쿵하는 소리로 기겁하는 내게 금방 해산한 사람답지 않게 싱글싱글 웃으며 말한다. 끄응 힘을 주며 일어서는 남자 엉덩이 밑에 시커먼 것이 툭 떨어진다. 여자 몸의 진통 끝에 탄생은 보았어도 남자 밑으로 뭣이 쑥 빠지는 일은 생전 처음이다. 정말로 머리와 몸이 한 덩어리다. 여자들의 손에서 짭짤하고 매콤한 대우를 받아야 할 것이 제구실을 못하니 남자 엉덩이를 붙잡고 있나 보다. 말 못하는 것일지라..

'맷돌' / 주인석 (1970~ )

맷돌 / 주인석 - 2009 제주 영주신문 신춘문예 수필당선작 눈이 보살이다. 친정 뒷마당 응달에 측은하게 머리를 박고 있는 맷돌을 발견했다. 박박 얽은 피부에는 집밖에 산 고생의 흔적으로 이끼가 군데군데 나있다. 음식 한 번 제대로 못 얻어먹어 그런지 아가리에는 백태처럼 흙이 끼었다. 몰골은 엉망이었지만 아랫돌과 웃돌이 껴안고 있는 모습이 왠지 사람 같아 가엾기 그지없다. 비가 올 때마다 튀어 오른 흙덩이가 곰보 자국에 붙었고 거기에서도 행복할 수 있다고 이끼가 뿌리를 내렸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전을 폈다. 편리한 믹서기를 두고 쓸데없는 짓한다며 어머니는 잔사설이 많았지만 그런 소리보다 내 마음이 더 앞섰다. 어머니는 구경만 하시라 큰소리치며 옛날 기억을 떠올려 남편과 나는 어설픈 두부 만들기..

'새' / 박월수 (1966~ )

새 / 박월수 새라고 다 날개를 지녔을까. 우도 섬의 소머리 오름에는 날개가 없어 날지 못하는 새가 산다. 날아가는 새는 바람의 등에 업혀 다니지만 이 언덕에 사는 새는 등줄기를 후려치는 바람 때문에 땅속으로 줄기를 키우고 마디를 짓는다. 나는 아직 땅에 사는 식물이 ‘새’라는 이름을 얻게 된 이유를 알지 못한다. 바람과 한 통속으로 움직이는 새의 물결을 본다. 섬의 바람받이에 속하는 언덕을 향해 해풍은 쉼 없이 불어오고 새는 누웠다가 일어나기를 반복한다. 바람은 일정하게 부는 법을 몰라 수만 갈래의 방향으로 와서 뿌리째 새를 흔들고 벼랑으로 달려간다. 그런 바람에도 새는 제 아랫도리를 꺾이는 일 없이 유연하게 허리를 굽혔다 폈다 할 뿐이다. 섬에 가득한 소금기가 몸에 척척 달라붙어 바람은 항상 몸이 무..

'가슴에 흐르는 강' / 김선화 (1960~ )

가슴에 흐르는 강 / 김선화 누군가 내게 그리움에 대해 말하라면, ‘가슴에 흐르는 강’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잔잔하게, 때론 격정적으로 여울져 흐르는 강줄기를 누구나 가슴 복판에 품고서 살아간다. 그 물살이 그려내는 무늬에 따라 사람들의 삶은 천차만별의 갈래로 흐른다. 친정 선산에서 새해 일출을 맞았다. 아버지 산소 앞에서 온몸 가지런히 하고 절을 하시는 어머니 모습이 풋풋한 소녀 같다. 아니, 나풀거리는 한 마리 나비 같다. 지아비에게 정성을 다하는 여인의 表象이 바로 저런 모습일까 싶을 정도로 뒷모습이 고결해 보인다. 어머니 가슴엔 아마도 뜨거운 강이 흐르리라. 그 출렁임을 어쩌지 못하여 저렇게 춤을 추시는 게다. 아버지 계실 때나 사별 후에나, 그분 앞의 어머니는 귀여우면서도 정갈한 여인이다. 나는..

단편소설 '학(鶴)'(1953) / 황순원

학(鶴) / 황순원 삼팔 접경의 이 북쪽 마을은 드높이 개인 가을하늘 아래 한껏 고즈넉했다. 주인 없는 집 봉당에 흰 박통만이 흰 박통만을 의지하고 굴러 있었다. 어쩌다 만나는 늙은이는 담뱃대부터 뒤로 돌렸다. 아이들은 또 아이들대로 멀찌감치서 미리 길을 비켰다. 모두 겁에 질린 얼굴들이었다. 동네 전체로는 이번 동란에 깨어진 자국이라곤 별로 없었다. 그러나 어쩐지 자기가 어려서 자란 옛마을은 아닌 성싶었다. 뒷산 밤나무 기슭에서 성삼이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거기 한 나무에 기어올랐다. 귓속 멀리서, 요놈의 자식들이 또 남의 밤나무에 올라가는구나, 하는 혹부리할아버지의 고함소리가 들려 왔다. 그 혹부리할아버지도 그새 세상을 떠났는가, 몇 사람 만난 동네 늙은이 가운데 뵈지 않았다. 성삼이는 밤나무를 안은..

단편소설 '역마(驛馬)'(1948) / 김동리

역마(驛馬) / 김동리 '화개장터'의 냇물은 길과 함께 흘러서 세 갈래로 나 있었다. 한 줄기는 전라도 구례(求禮)쪽에서 오고 한 줄기는 경상도쪽 화개협(花開峽)에서 흘러 내려, 여기서 합쳐서, 푸른 산과 검은 고목 그림자를 거꾸로 비치인 채, 호수같이 조용히 돌아, 경상 전라 양도의 경계를 그어주며, 다시 남으로 남으로 흘러내리는 것이, 섬진강(蟾津江) 본류(本流)였다. 하동(河東), 구례, 쌍계사(雙磎寺)의 세 갈래 길목이라 오고가는 나그네로 하여, '화개장터'엔 장날이 아니라도 언제나 흥성거리는 날이 많았다. 지리산(智異山) 들어가는 길이 고래로 허다하지만, 쌍계사 세이암(洗耳岩)의 화개협 시오 리를 끼고 앉은 '화개장터'의 이름이 높았다. 경상 전라 양 도 접경이 한두 군데일리 없지만 또한 이 '..

단편소설 '메밀꽃 필 무렵'(1936) / 이효석

메밀꽃 필 무렵 여름 장이란 애시당초에 글러서, 해는 아직 중천에 있건만 장판은 벌써 쓸쓸하고 더운 햇발이 벌여놓은 전 휘장 밑으로 등줄기를 훅훅 볶는다. 마을 사람들은 거의 돌아간 뒤요, 팔리지 못한 나무꾼패가 길거리에 궁깃거리고들 있으나, 석유병이나 받고 고깃마리나 사면 족할 이 축들을 바라고 언제까지든지 버티고 있을 법은 없다. 칩칩스럽게 날아드는 파리떼도 장난꾼 각다귀들도 귀찮다. 얽음뱅이요 왼손잡이인 드팀전의 허생원은 기어이 동업의 조선달을 나꾸어보았다. "그만 거둘까?" "잘 생각했네. 봉평장에서 한 번이나 흐뭇하게 사본 일이 있었을까? 내일 대화장에서나 한몫 벌어야겠네. " "오늘 밤은 밤을 새서 걸어야 될걸." "달이 뜨렷다." 절렁절렁 소리를 내며 조선달이 그날 산 돈을 따지는 것을 보고..

단편 - '동백꽃'(1936) / 김유정

오늘도 또 우리 수탉이 막 쫓기었다. 내가 점심을 먹고 나무를 하러 갈 양으로 나올 때이었다. 산으로 올라서려니까 등 뒤에서 푸드득푸드득 하고 닭의 횃소리가 야단이다.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려 보니 아니나다르랴 두 놈이 또 얼리었다.점순네 수탉(대강이가 크고 똑 오소리같이 실팍하게 생긴 놈)이 덩저리 작은 우리 수탉을 함부로 해내는 것이다. 그것도 그냥 해내는 것이 아니라 푸드득 하고 면두를 쪼고 물러섰다가 좀 사이를 두고 푸드득하고 모가지를 쪼았다. 이렇게 멋을 부려 가며 여지없이 닦아 놓는다. 그러면 이 못생긴 것은 쪼일 적마다 주둥이로 땅을 받으며 그 비명이 킥, 킥, 할 뿐이다. 물론 미처 아물지도 않은 면두를 또 쪼이며 붉은 선혈은 뚝뚝 떨어진다. 이걸 가만히 내려다보자니 내 ..

단편 - '봄봄'(1935) / 김유정

봄봄 / 김유정 “장인님! 인젠 저…….” 내가 이렇게 뒤통수를 긁고, 나이가 찼으니 성례를 시켜 줘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면 대답이 늘,“이 자식아! 성례구 뭐구 미처 자라야지!”하고 만다.이 자라야 한다는 것은 내가 아니라 장차 내 아내가 될 점순이의 키 말이다. 내가 여기에 와서 돈 한푼 안 받고 일하기를 삼 년 하고 꼬박이 일곱 달 동안을 했다. 그런데도 미처 못 자랐다니까 이 키는 언제야 자라는 겐지 짜장 영문 모른다. 일을 좀더 잘해야 한다든지 혹은 밥을 (많이 먹는다고 노상 걱정이니까) 좀 덜 먹어야 한다든지 하면, 나도 얼마든지 할 말이 많다. 하지만 점순이가 아직 어리니까 더 자라야 한다는 여기에는 어째 볼 수 없이 그만 벙벙하고 만다.이래서 나는 애최 계약이 잘..

단편소설 '발가락이 닮았다'(1932) / 김동인

발가락이 닮았다 / 김동인 노총각 M이 혼약을 하였다. 우리들은 이 소식을 들을 때에 뜻하지 않고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습니다. M은 서른두 살이었습니다. 세태가 갑자기 변하면서 혹은 경제문제 때문에, 혹은 적당한 배우자가 발견되지 않기 때문에, 혹은 단지 조혼(早婚)이라 하는 데 대한 반항심 때문에, 늦도록 총각으로 지내는 사람이 많아 가기는 하지만, 서른두 살의 총각은 아무리 생각하여도 좀 너무 늦은 감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친구들은 아직껏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에게 채근 비슷이, 결혼에 대한 주의를 하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M은 언제나 그런 의론을 받을 때마다 (속으로는 매우 흥미를 가진 것이 분명한데) 겉으로는 고소로써 친구들의 말을 거절하고 하였습니다. 그러던 M이 우리의 모르는 틈에..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 이상국 (1946 ~ )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 이상국 1. '사랑을 쓸쓸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뒤돌아보고 있는 사람이다. 사랑의 현기증이 지나간 마음의 흉터들을 어루만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것이 시작되던 순간의 설레임과, 그것이 익어가던 날의 황홀과, 그것이 못 견딜 그리움이 되던 날과, 그것이 무너져 내리던 날의 절망과, 긴 그림자까지 사랑의 전경(全景)을 아주 멀리에 깔린 노을처럼 천천히 고개 들어 바라보는 사람이다. 이제야 사랑의 진상(眞相)이 보인다. 그 피의 광기들이 뿜어 올린 과장법과 신기루가 거기 실감나는 영상이 되어 서성거린다. 문득 이런 생각이 따라 올라온다. 정말 그 사람은 나를 사랑했던 것일까? 혹시 내가 내 사랑에만 취해 그 사람을 괴롭히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그는 다만 내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

'어머니' / 오세영(1942~ )

吳世榮 (1942~ ) 인간 존재의 실존적 고뇌를 서정적·철학적으로 노래하는 중견 시인이자 교육자. 전남 영광(靈光) 生. 1961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국어국문학과 입학. 같은 대학의 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 충남대학교 교수(1974-1981), 단국대학교 교수(1981-1985), 1985년부터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문학과에서 한국현대문학을 강의한 뒤 2006년 정년퇴임.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버클리 캠퍼스에서 강의(1995-1996). 체코 까렐대학 방문학자, 미국 아이오아대학교 국제 창작프로그램의 참여자로 초빙. 전 한국시인협회 회장, 현재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소월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만해 대상(문학 부문), 시인협회상, 김삿갓문학상, 공초문학상, 녹원문학 상, ..

🤍 文 學/詩 . 2022.02.19

'욕설의 리얼리즘' / 신영복

욕설의 리얼리즘 / 신영복 교도소에 많은 것 중의 하나가 '욕설'입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우리는 실로 흐드러진 욕설의 잔치 속에 살고 있는 셈입니다. 저도 징역 초기에는 욕설을 듣는 방법이 너무 고지식하여 단어 하나하나의 뜻을 곧이곧대로 상상하다가, 어처구니 없는 궁상(窮狀)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기 일쑤였습니다만, 지금은 그 방면에서도 어느덧 이력이 나서 한 알의 당의정을 삼키듯 이순의 경지에 이르렀다 하겠습니다. 욕설은 어떤 비상한 감정이 인내력의 한계를 넘어 밖으로 돌출하는, 이를테면 불만이나 스트레스의 가장 싸고 '후진' 해소 방법이라 느껴집니다. 그러나 사과가 먼저 있고 사과라는 말이 나중에 생기듯이, 욕설로 표현될 만한 감정이나 대상이 먼저 있음이 사실입니다. 징역의 현장인 이 곳이 곧 욕설의 ..

'속리산기(俗離山記)' / 목성균

속리산기(俗離山記) / 목성균 1. 正二品松 속리산(俗離山). 속세와 떨어진 산이란 말일 것이다. 그러나 다 옛날 말이다. 지금의 속리산 자락은 여느 관광지와 다를 바 없이 시끌벅적한 저잣거리와 흡사하다. 세속을 떠난 산아래 잡다한 현대문화가 다 밀려 와서 혼탁한 세속의 먼지를 마구 털어놔도, 산은 미간을 찡그리지도 않고 한결 같이 탈속의 품위를 잃지 않고 있다. 꼬불꼬불한 말티재를 넘어 가면 산 어귀에 정이품(正二品) 벼슬을 한 소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수령이 600년 가량 되었다는 나무의 기품이 하도 높아 보여서, 과연 정이품 벼슬에 합당한 나무구나 싶다. 그런데, 정이품 벼슬을 제수 받은 경위가 세조 임금의 속리산 복천암 행어(行御)의 논공행상이라는 게 아무래도 마땅치 않다. 나는 나무가 임금의..

춘설이 난분분허니 ..

靑丘永言에 실려 있는 평양기생 가 지은 시조.매화는 名妓  九人 중의 한 사람으로 '해동가요'에 기록돼 있는 평양 기생이다. 유춘색이 평양감사로 부임해와 매화와 가까이 지냈으나, 나중에 춘설(春雪)이란 기생과 가까이하자, 이를 원망하며 지었다는 유래가 전한다.의 다른 시조와 함께 보면 그럴 만도 하다. 죽어 잊어야 하랴 살아 그려야 하랴죽어 잊기도 어렵고 살아 그리기도 어려워라저 님아 한 말씀만 하시라 사생결단 하리라 평양기생답게 똑 부러진 여자다. 매화라는 자기 이름과 꽃의 이름, 자신의 늙어진 몸과 고목이 된 매화. ***** 靑丘永言에 실려 있는 時調를 신위(申緯)가 한역(漢譯)                                                       *楂枒(사야) ; 그루터..

'초승달이 질 때' / 許世旭 (1934~2010)

초승달이 질 때 / 허세욱 소쩍새가 피를 쏟듯 구슬프게만 울던 늦은 봄 초저녁으로 기억된다. 산과 산이 서로 으스스하게 허리를 부비고 그들끼리 긴 가랭이를 꼬고 누운 두메인지라, 해만 지면 금시 어두워졌고 솔바람이 몰고 오는 연한 한기로 미닫이를 닫아야 했다. 40리 밖 읍내에 가셨다가 돌아오시지 않은 아버님을 마중하러 나는 세 살 아래 동생을 데리고 재를 넘었다. 한참 걷다 보니 속눈썹 같던 초승달이 지고 어디를 보나 까만 어둠이 밀려오는데, 열대여섯 살 소년은 갑자기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무서움에 질려 있었다. 나는 동생의 손을 꼭 잡고 뚜벅뚜벅 걸음을 옮겼다. 주먹만한 차돌을 주웠다. 그리고 그것을 땀이 나도록 쥐고 동생더러 뒤를 따라오라 했다. 여느 때같이 쇠죽 냄새가 물씬한 머슴의 등짝을 앞세..

수필 - '야래향(夜來香)' / 지교헌

야래향(夜來香) / 지교헌 내가 야래향(夜來香: Telosma cordata)을 기르는지는 꽤 여러 해가 되는 것 같다. 공동주택단지 내에서 산책을 하다가 우연히 야래향을 발견하여, 가느다란 가지를 한 줄기 얻어다가  화분에 심어서 기른 것이다.그런데 처음 몇 해 동안은 관심을 가지고 자주 들여다 보았지만, 그 후로 나의 관심은 점점 멀어져 갔다. 그것은 야래향이 내가 기대한 만큼 탐스럽게 자라서 꽃을 피우지 않은 까닭이었다. 야래향은 가지가 너무 가늘고 연약해 보일 뿐만 아니라, 너무 길게 뻗어서 축축 늘어지는 모습이 달갑지 않은 것이었다. 나는 비좁은 베란다에 여러 개의 화분을 늘어놓은 형편인지라, 위로 향하여 꼿꼿하게 커 오르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데, 야래향은 나의 기대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

'甲寺로 가는 길' / 이상보 (1927~ )

갑사(甲寺)로 가는 길 / 이상보 지금은 토요일 오후, 동학사(東鶴寺)엔 함박눈이 소록소록 내리고 있다. 새로 단장(丹粧)한 콘크리트 사찰(寺刹)은 솜이불을 덮은 채 잠들었는데, 관광 버스도 끊인 지 오래다. 등산복 차림으로 경내(境內)에 들어선 사람은 모두 우리 넷뿐, 허전함조차 느끼게 하는 것은 어인 일일까? 대충 절 주변을 살펴보고 갑사(甲寺)로 가는 길에 오른다. 산 어귀부터 계단으로 된 오르막길은 산정(山頂)에 이르기까지 변화가 없어 팍팍한 허벅다리만 두들겼다. 그러나 지난 가을에 성장(盛裝)을 벗은 뒤 여윈 몸매로 찬 바람에 떨었을 나뭇가지들이, 보드라운 밍크 코트를 입은 듯이 탐스러운 자태로 되살아나서 내 마음을 다사롭게 감싼다. ​흙이나 돌이 모두 눈에 덮인 산길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은행나무 이야기' / 정창희 (1920~2022 )

은행나무 이야기 / 정창희 은행나무는 자랑스러운 것들을 많이 가졌다. 곧고 튼튼하고 깨끗한 줄기, 굵고 싱싱한 가지들, 부드럽게 살랑이는 부채꼴의 잎들, 그리고 은빛의 은행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자랑스러운 것은 열매인 은행이다. 그 속씨가 포도알처럼 둥글게 생겼다면, 그것에 매력을 느낄 이는 그리 많지 않으리라. 둥글납작하면서도 예리한 칼날이 한 바퀴 휘이 둘러져 있는 그 꼴은 깜찍해 보이기까지 한다. 곧, 입술을 나불거리면서 무엇인가 지저귈 것만 같다. 사람들은 은행을 본떠서 마고자 단추를 만든다. ​ 은행이 영글어갈 무렵에는 사람들이 그의 나래 밑을 빠른 걸음으로 지나간다. 숫제 아주 멀찍이 떨어져서 활모양을 그리며 숨가쁘게 달리기도 한다. 은행나무가 은행들에 최후의 정열을 부어넣을 때에 뿜어낼 수..

'멋있는 사람들' / 김태길

멋있는 사람들 / 김태길 사람의 평균 수명이 크게 늘었다고는 하나, 80세를 넘기기는 지금도 역시 쉬운 일이 아니다. 짧게 제한된 이 시간 속에서 뜻있고 보람찬 삶을 이룩하고자 사람들은 저마다 설계와 실천에 여념이 없다.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멋있게 사는 것일까? 멋있는 길이 오직 한 줄기로만 뻗어 있는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는다. 개인의 소질과 취향 그리고 형편에 따라서 각각 다른 길이 모두 뜻과 보람으로 아름다울 수도 있음직하다. 예술가의 생활은 언제 어느 모로 보아도 멋과 보람으로 가득 차 있다. 명성이 높은 예술가라면 더욱 좋을 것이며, 비록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경우라 하더라도 심혈을 기울여 창작의 길로 정진하는 모습에는 부러움을 느끼게 하는 귀한 분위기가 따라다닌다. 참된 예술가는 아..

'멋없는 세상 멋있는 사람'/ 김태길

버스 안은 붐비지 않았다. 손님들은 모두 앉을 자리를 얻었고, 안내양만이 홀로 서서 반은 졸고 있었다. 차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달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남자 어린이 하나가 그 앞으로 확 달려들었다. 버스는 급정거를 했고, 제복에 싸인 안내양의 몸뚱이가 던져진 물건처럼 앞으로 쏠렸다. 찰나에 운전기사의 굵직한 바른팔이 번개처럼 수평으로 쭉 뻗었고, 안내양의 가는 허리가 그 팔에 걸려 상체만 앞으로 크게 기울었다. 그녀의 안면이 버스 앞면 유리에 살짝 부딪치며, 입술 모양 그대로 분홍색 연지가 유리 위에 예쁜 자국을 남겼다. 마치 입술로 도장을 찍은 듯이 선명한 자국.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운전기사는 묵묵히 앞만 보고 계속 차를 몰고 있었다. 그의 듬직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그가 멋있는 ..

'山村餘情(산촌여정)' / 李 箱 (1910~1937)

山村餘情 / 李 箱 1 향기로운 MJB의 미각을 잊어버린 지도 이십여일이나 됩니다. 이곳에는 신문도 잘 아니오고 체전부는 이따금 하도롱빛 소식을 가져옵니다. 거기는 누에고치와 옥수수의 사연이 적혀 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멀리 떨어져 사는 일가 때문에 수심이 생겼나봅니다. 나도 도회에 남기고 온 일이 걱정이 됩니다. 건너편 팔봉산에는 노루와 멧도야지가 있답니다. 그리고 기우제 지내던 개골창까지 내려와서 가재를 잡아먹는 곰을 본 사람도 있습니다. 동물원에서밖에 볼 수 없는 짐승, 산에 있는 짐승들을 사로잡아다가 동물원에 갖다 가둔 것이 아니라, 동물원에 있는 짐승들을 이런 산에다 내어 놓아준 것만 같은 감각을 자꾸만 느낍니다. 밤이 되면 달도 없는 그믐 칠야에 팔봉산도 사람이 침소로 들어가듯이 어둠 속으로..

'엽차와 인생과 수필' / 윤오영 (1907~1976)

엽차와 인생과 수필 / 윤오영 애주가는 술의 정을 아는 사람, 음주가는 술의 흥을 아는 사람. 기주가(嗜酒家),탐주가(耽酒家)는 술에 절고 빠진 사람들이다. 이주가(俐酒家)는 술맛을 잘 감별하고 도수까지 알지만, 역시 술의 정이나 흥을 아는 사람은 아니다. 같은 술을 마시는 데도 서로 경지가 이렇게 다르다는 것이다. 누구나 생활은 하고 있지만 생활 속에서 생활을 알고, 생활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가 않다. 누구나 책을 보고 글을 읽지만 글 속에서 글을 알고 글을 말할 수 있는 사람 또한 드물다. 민노자(閔老子)의 차를 마시고 대뜸 그 향미와 기품이 다른 것을 알아낸 것은, 오직 장대(張岱) 뿐이다. 그는 낭차(閬茶)가 아니고 개차(岕茶)인 것을 알았고, 봄에 따 말린 것과 가을에 따 말린 것을..

'산(山)' / 김소월 (1902~1934)

金素月 본명은 김정식(金廷湜) 본관은 공주. 서구 문학이 범람하던 시대에 민족 고유의 정서에 기반을 둔 시를 쓴 민족 시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생애 1902년 8월 6일에 평북 구성에서 태어났다. 1904년 처가로 가던 부친 김성도는 정주와 곽산을 잇는 철도 공사장의 일본인 목도꾼들에게 폭행당한 후 정신 이상자가 되었다. 이후 김소월은 광산을 경영하는 조부의 손에서 컸다. 김소월에게 이야기의 재미를 가르쳐 주어 영향을 끼친 숙모 계희영을 만난 것도 이 무렵이다. 남산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5년 오산학교에서 조만식과 평생 문학의 스승이 될 김억을 만났다. 김억의 격려를 받아 1920년 동인지 《창조》5호에 처음으로 시를 발표했다. 오산학교를 다니는 동안 김소월은 왕성한 작품 활동을 했으며, 1925년에..

🤍 文 學/詩 . 2022.01.26

'벙어리 냉가슴' / 이희승

말하기 좋다 남의 말 말을 것이 남의 말 내 하면 남도 내 말 하는 것이 말로써 말이 많으니 말 말을까 하노라 전해 오는 옛 시조로서 누구의 작인지는 알 수 없으나, 말을 삼가야 한다는 교훈조로 지은 것이 아닌가 한다. ​ ‘고기는 씹어야 맛이요, 말은 해야 맛이라’는 속담대로 생각한다면, 당치도 않는 작품이요, ‘문 바른 집은 써도 입 바른 사람은 못 쓴다’든지, ‘수구여병(守口如甁 ; 입 다물기를 병마개 막아 두듯함)’란 격언 편으로 본다면, 인생 처세의 진체(眞諦; 깨달음에 관한 진리)를 때려 맞힌 훌륭한 옥조(玉條)가 아닐 수 없다. ​ 벌써 7년 전이나 된다. 수필집을 엮어서 책자로 발행할 적에 그 이름을 《벙어리 냉가슴》이라고 붙인 일이 있다. 그랬더니, 몇몇 친구로부터 무슨 이유로 그런 제명..

'佛國寺紀行' / 玄鎭健 (1900~1943)

'佛國寺紀行' / 玄鎭健  7월 12일, 아침 첫 차로 경주를 떠나 불국사로 향했다. 떠날 임시에 봉황대(鳳凰臺)에 올랐건만, 잔뜩 찌푸린 일기에 짙은 안개는 나의 눈까지 흐리고 말았다. 시포(屍布)를 널어 놓은 듯한 희미한 강줄기, 몽롱한 무덤의 봉우리, 쓰러질 듯한 초가집 추녀가 눈물겹다. 어젯밤에 나를 부여잡고 울던 옛 서울은 오늘 아침에도 눈물을 거두지 않은 듯. 그렇지 않아도 구슬픈 내 가슴이어든 심란한 이 정경에 어찌 견디랴? 지금 떠나면 1년, 10년, 혹은 20년 후에나 다시 만날지 말지! 기약 없는 이 작별을 앞두고 눈물에 젖은 임의 얼굴! 내 옷소매가 촉촉이 젖음은 안개가 녹아 내린 탓만은 아니리라.장난감 기차는 반 시간이 못 되어 불국사역까지 실어다 주고, 역에서 등대(等待)했던 자동..

'딸깍발이' / 이희승 (1896~1989)

딸깍발이 / 이희승 ‘딸깍발이’란 것은 ‘남산(南山)골 샌님’의 별명이다. 왜 그런 별호(別號)가 생겼느냐 하면, 남산골 샌님은 지나 마르나 나막신을 신고 다녔으며, 마른 날은 나막신 굽이 굳은 땅에 부딪쳐서 딸깍딸깍 소리가 유난하였기 때문이다. 요새 청년들은 아마 그런 광경을 못 구경하였을 것이니, 좀 상상하기에 곤란할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일제 시대에 일인들이 ‘게다’를 끌고 콘크리트 길바닥을 걸어다니던 꼴을 기억하고 있다면, ‘딸깍발이’라는 명칭이 붙게 된 까닭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남산골 샌님이 마른 날 나막신 소리를 내는 것은 그다지 얘깃거리가 될 것도 없다. 그 소리와 아울러 그 모양이 퍽 초라하고 궁상이 다닥다닥 달려 있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인생으로서 한 고비가 겨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