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사(甲寺)로 가는 길 / 이상보
지금은 토요일 오후, 동학사(東鶴寺)엔 함박눈이 소록소록 내리고 있다.
새로 단장(丹粧)한 콘크리트 사찰(寺刹)은 솜이불을 덮은 채 잠들었는데,
관광 버스도 끊인 지 오래다.
등산복 차림으로 경내(境內)에 들어선 사람은 모두 우리 넷뿐,
허전함조차 느끼게 하는 것은 어인 일일까?
대충 절 주변을 살펴보고 갑사(甲寺)로 가는 길에 오른다.
산 어귀부터 계단으로 된 오르막길은 산정(山頂)에 이르기까지 변화가 없어 팍팍한 허벅다리만 두들겼다.
그러나 지난 가을에 성장(盛裝)을 벗은 뒤 여윈 몸매로 찬 바람에 떨었을 나뭇가지들이, 보드라운 밍크 코트를 입은 듯이 탐스러운 자태로 되살아나서 내 마음을 다사롭게 감싼다.
흙이나 돌이 모두 눈에 덮인 산길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오르는 우리들은,
마치 북국의 설산이라도 찾아간 듯이 아취(雅趣)에 흠씬 젖는다.
원근을 분간할 수 없이 흐릿한 설경을 뒤돌아보며,
정상에 거의 이른 곳에 한일자(一字)로 세워 놓은 계명정사(鷄鳴精舍)가 있어,
배낭을 풀고 숨을 돌린다.
뜰 좌편가에서는 남매탑이 눈을 맞으며 먼 옛날을 이야기해 준다.
때는 거금(距今) 천사백여 년 전,
신라 선덕 여왕 원년인데,
당승(唐僧) 상원(上原)대사가 이 곳에 와서 움막을 치고 기거하며 수도할 때였다.
비가 쏟아지고 뇌성벽력(雷聲霹靂)이 천지를 요동(搖動)하는 어느 날 밤에,
큰 범 한 마리가 움집 앞에 나타나서 아가리를 벌렸다.
대사는 죽음을 각오하고 눈을 감은 채 염불에만 전심하는데,
범은 가까이 다가오며 신음하는 것이었다.
대사가 눈을 뜨고 목 안을 보니 인골(人骨)이 목에 걸려 있었으므로, 뽑아 주자,
범은 어디론지 사라졌다.
그리고 여러 날이 지난 뒤 백설이 분분하여 사방을 분간할 수조차 없는데,
전날의 범이 한 처녀를 물어다 놓고 가 버렸다.
대사는 정성을 다하여, 기절한 처녀를 회생시키니,
바로 경상도 상주읍에 사는 김화공(金和公)의 따님이었다.
집으로 되돌려 보내고자 하였으나,
한겨울이라 적설(積雪)을 헤치고 나갈 길이 없어 이듬해 봄까지 기다렸다가,
그 처자의 집으로 데리고 가서 전후사를 갖추어 말하고 스님은 되돌아오려 하였다.
그러나 이미 김 처녀는 대사의 불심에 감화(感化)를 받은 바요,
한없이 청정한 도덕과 온화하고 준수한 풍모에 연모의 정까지 골수(骨髓)에 박혔는지라, 그대로 떠나 보낼 수 없다 하여 부부의 예(禮)를 갖추어 달라고 애원하지 않는가?
김 화공도 또한 호환(虎患)에서 딸을 구원해 준 상원 스님이 생명의 은인이므로,
그 은덕에 보답할 길이 없음을 안타까워 하며, 자꾸 만류(挽留)하는 것이었다.
여러 날과 밤을 의논한 끝에 처녀는 대사와 의남매의 인연을 맺어,
함께 계룡산(鷄龍山)으로 돌아와,
김 화공의 정재(淨財)로 청량사(淸凉寺)를 새로 짓고,
암자(庵子)를 따로 마련하여 평생토록 남매의 정으로 지내며 불도에 힘쓰다가,
함께 서방 정토(西方淨土)로 떠났다.
두 사람이 입적(入寂)한 뒤에 사리탑(舍利塔)으로 세운 것이 이 남매탑이요,
상주(尙州)에도 이와 똑같은 탑이 세워졌다고 한다.
눈은 그칠 줄 모르고, 탑에 얽힌 남매의 지순한 사랑도 끝이 없어,
탑신(塔身)에 손을 얹으니 천년 뒤에 오히려 뜨거운 열기가 스며드는구나!
얼음장같이 차야만 했던 대덕(大德)의 부동심과,
백설인 양 순결한 처자의 발원력,
그리고 비록 금수라 할지라도 결초심(結草心)을 잃지 않은 산중 호걸(山中豪傑)의 기연이 한데 조화를 이루어, 지나는 등산객의 심금을 붙잡으니, 나도 여기 며칠 동안이라도 머무르고 싶다.
하나, 날은 시나브로 어두워지려 하고 땀도 가신 지 오래여서,
다시 산 허리를 타고 갑사로 내려가는 길에, 눈은 한결같이 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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