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있는 사람들 / 김태길
사람의 평균 수명이 크게 늘었다고는 하나, 80세를 넘기기는 지금도 역시 쉬운 일이 아니다.
짧게 제한된 이 시간 속에서 뜻있고 보람찬 삶을 이룩하고자 사람들은 저마다 설계와 실천에 여념이 없다.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멋있게 사는 것일까?
멋있는 길이 오직 한 줄기로만 뻗어 있는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는다.
개인의 소질과 취향 그리고 형편에 따라서 각각 다른 길이 모두 뜻과 보람으로 아름다울 수도 있음직하다.
예술가의 생활은 언제 어느 모로 보아도 멋과 보람으로 가득 차 있다.
명성이 높은 예술가라면 더욱 좋을 것이며, 비록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경우라 하더라도 심혈을 기울여 창작의 길로 정진하는 모습에는 부러움을 느끼게 하는 귀한 분위기가 따라다닌다.
참된 예술가는 아름다움을 창조하여 우리들에게 즐거움을 준다.
예술에서 오는 즐거움은 관능(官能)의 만족에서 오는 즐거움보다 깊이 가슴 속으로 파고 들어 긴 여운을 남긴다.
관능의 쾌락은 뒷맛이 어두우나 예술의 즐거움은 뒤가 맑아서 좋다.
그래서 우리는 예술가에게 감사를 느낀다.
예술이 한갓 상품으로 전락할 때, 예술가의 값도 떨어진다.
가난은 예술가의 경우에도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예술은 예술을 위해서 있어야 하며,
돈을 목적으로 삼는 순간 그것은 생명을 잃는다.
예술가가 권력의 시녀(侍女)가 될 때,
그의 모습은 장사꾼이 되었을 경우보다도 더욱 보기에 흉하다.
장사꾼도 아니요 권력의 심부름꾼도 아닌 그를 우리는 ‘예술가’라고 부르는 것이며,
그 앞에 마음의 꽃다발을 바친다.
학자의 생활은 남의 눈에도 별로 멋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젊어서 화려하고 활달한 기질을 뽐내던 사람도 학자 생활 30년만 하면 초췌한 영감으로 변한다.
그러나 학자의 생활에는 그 겉모습만으로는 짐작하기 어려운 내면의 세계가 있다.
학자로 행세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 깊고 넓은 세계를 보는 것은 아니지만,
그 세계를 향하는 외길로 생명을 불사르는 사람들에게는 그들 나름의 멋과 기쁨이 있다.
학자도 남의 눈에 멋있어 보일 때가 있다.
그의 학문이 한갓 전문적 지식에 머물지 않고, 자연과 인간을 바라보는 깊은 통찰이 그를 확고한 세계관 또는 인생관의 고지로 안내했을 경우이다.
그토록 거창한 경지가 아니더라도 신념과 지조를 갖춘 사상가로서의 면모가 뚜렷한 학자는 그 나름의 멋을 풍긴다.
학자의 모습이 가장 돋보이는 것은 돈이나 권력의 유혹을 뿌리치고 꼿꼿이 자기 자신에게 충실할 경우이다.
여러 사람들의 비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소신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모습도 감동을 자아낸다.
백만 대군을 지휘하여 적진으로 돌진하는 장군의 모습도 멋이 있지만,
총칼 앞에서도 소신을 굽히지 않는 학자의 용기는 더욱 멋이 있다.
내 한 몸을 돌보지 않고 남을 위해서 봉사하는 사람들은 정말 멋이 있는 사람들이다.
만원 버스에 시달리면서도 얼굴에 미소를 지을 수 있도록 건강하고 여유가 있는 안내양은 아주 멋이 있어 보인다.
할머니를 도와서 부축하기도 하고,
엄마 대신 어린이를 번쩍 들어서 차 밖으로 내려 놓는 그의 모습은,
반코트를 입고 부츠를 신은 명동의 아가씨보다도 더 멋이 있다.
병원의 간호사들 가운데도 멋있는 사람들이 있다.
백옥같이 흰 가운을 입고 고깔 같기도 하고 모자 같기도 한 것을 뒤통수에 얹은 그 청순한 외모도 멋이 있지만,
환자를 위하여 정성껏 돌봐 주는 고마운 마음씨가 더욱 멋이 있다.
모든 간호사가 누구나 그렇게 친절한 것은 아니다.
대개는 사무적으로 환자를 대하는 가운데 어쩌다 특별히 착한 간호사가 있어서 더욱 돋보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간호사들이 친절하다 하더라도 그 진가가 줄어들지는 않을 것이다.
남을 위해서 봉사를 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노력하는 사람도 있지만,
특별한 결심보다는 천성이 착해서 남에게 좋은 일을 많이 하는 사람도 있다.
내 욕심을 눌러 가며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존경의 감정을 느끼고,
천성이 착한 사람에게는 친근감을 느낀다.
남을 위해서 또는 공동체를 위해서 헌신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감탄을 느끼며 머리가 수그러지는 것은,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내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남이 하는 것을 보았을 때,
우리는 그에 대하여 감탄과 존경을 느낀다.
직업이나 지위와는 관계 없이 여기저기에 멋있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
같은 직업에 종사하고 같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도 멋있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문제는 가치관의 차이에 있는 것일까.
장관이나 그 밖의 이른바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들 가운데도 더러는 멋있는 사람들이 있다.
보통 같으면 교만스럽거나 거드름을 피우기 쉬운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소탈하고 겸손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들을 나는 멋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보기 드문 미모를 갖추고도 잘난 척하는 기색이 전혀 없는 여자의 경우도 감탄을 금하기 어렵다.
보통 같으면 비굴하기 쉽고 때로는 아첨도 되는 불우한 자리에 있으면서도 항상 자존심을 간직하고 당당한 사람은 더욱 멋이 있다.
소아마비의 불행을 겪고 절름거리면서도 늘 명랑하고 쾌활한 친구도 멋있는 사람이다.
세상 인구는 날로 늘어가지만 멋있는 사람은 점점 줄어가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러나 더러는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희망을 안겨 준다.
이해와 감상
김태길의 수필은 따뜻한 시선으로 생활 속에서 하나의 문제를 붙잡아 이를 인생의 문제와 관련시켜 음미하고 소화시켜 그 결과까지를 제시하는 사색적이고, 철학적인 경향을 띤다.
특히 깊은 ‘인생 철학’을 제시하여 독자의 지적 수준을 높여 준다.
늘어만 가는 세상 인구 속에서 멋있게 사는 사람이 점점 줄어 가는 듯해 안타깝지만,
더러는 멋있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희망을 가져다 준다고 말하는 작자의 따뜻한 시선과 사색적인 태도가 잘 드러나는 수필이다.
사람의 멋이란 직업이나 지위의 높고 낮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인간의 가치관에 있다는 내용이 강조되어 나타난다.
사람의 겉모습으로만 모든 것을 판단해 버리는 현대인들의 생활 자세에 일침을 가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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