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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 '야래향(夜來香)' / 지교헌

아즈방 2022. 2. 14. 06:57

 

야래향(夜來香) / 지교헌

 

내가 야래향(夜來香: Telosma cordata)을 기르는지는 꽤 여러 해가 되는 것 같다.

공동주택단지 내에서 산책을 하다가 우연히 야래향을 발견하여,

가느다란 가지를 한 줄기 얻어다가  화분에 심어서 기른 것이다.

그런데 처음 몇 해 동안은 관심을 가지고 자주 들여다 보았지만,

그 후로 나의 관심은 점점 멀어져 갔다.

그것은 야래향이 내가 기대한 만큼 탐스럽게 자라서 꽃을 피우지 않은 까닭이었다.

야래향은 가지가 너무 가늘고 연약해 보일 뿐만 아니라,

너무 길게 뻗어서 축축 늘어지는 모습이 달갑지 않은 것이었다.

나는 비좁은 베란다에 여러 개의 화분을 늘어놓은 형편인지라,

위로 향하여 꼿꼿하게 커 오르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데,

야래향은 나의 기대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내가 기르는 야래향의 모습은 변태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은 좋지 않은 환경 탓이라고 생각하였다.

야래향은 해마다 꽃이 피기는 하지만,

가냘픈 가지에서 안간힘을 하고 겨우 버티고 있는 인상을 주었다.

나도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지 못하고 다른 식물들 틈에 간신히 끼어 자라는 것이

은근히 가엽게 여겨지기도 하고,

그 책임은 나에게 있는 까닭에 미안한 마음도 들곤 하였다.

나의 속셈으로는 야래향이 굵직하고 탐스런 줄기를 보이며 꽃도 탐스럽게 피어 주기를 바랐지만, 그것은 다만 나만의 헛된 기대에 지나지 않았다.

아무리 들여다보고 고개를 갸우뚱거려도 소용이 없었다.

넓고 넓은 세상에는 부귀(富貴)를 상징하는 모란이 있고,

은일(隱逸)을 상징하는 국화가 있으며,

청렴을 상징하는 난초와 연꽃이 있고,

고귀하고 순결함을 상징하는 목련이 있으며,

정렬을 상징하는 진달래가 있고,

사치와 화려를 상징하는 장미가 있으며,

은근과 끈기를 자랑하는 무궁화가 있고,

나에게 항상 미련을 던져주는 물망초(勿忘草)가 있으며,

애련한 순결을 상징하는 에델바이스(Edelweiss)도 있다.

헤아릴 수도 없이 많기도 많은 꽃들은,

그 언제 어느 곳에서 피어나든지 창조주의 뜻을 나누어 받들고,

인간계를 아름답게 꾸며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요즘에 와서 야래향에 대하여 새삼스럽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내가 산책하는 거리와 개울가에 늘어선 온갖 나무들이,

찬 서리를 못 이겨 형형색색으로 물들어 장관을 이루다가,

속절없이 비명을 지르며 헐벗는 모습을 보면서,

서글픈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는 나는,

거실의 유리문을 열자마자 난데없는 아름다운 향기를 맡게 된 것이다.

해는 서산에 지고 가로등이 반짝이는 저녁,

어리둥절하여 가만히 살펴보니,

무성한 고무나무 옆에 바짝 놓인 야래향의 화분에서 밀려오는 향기였다.

향기는 은근하고 달콤하였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다가가서 가만히 살펴보았다.

가늘게 뻗은 덩굴 끝에는 분명히 새하얗고 작은 꽃송이들이 거꾸로 매어 달려,

수줍은 듯이 향기를 내뿜고 있었다.

봄도 아니고 여름도 아니고 가을은 지나가고,

이제 겨울로 접어들어 유리에는 성에가 끼기도 하는 차디찬 베란다에서,

어느 누가 들여다보거나 말거나 다소곳이 가지 끝에 매달려 향기를 내뿜는,

그  자디잔 꽃송이가, 마치 신비로운 요정(妖精)처럼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큼직하고 화려하고 사람들의 눈에 확 뜨이는 모습이 아니고,

너무나 가냘프고 초라하고 작은 꽃잎을 펼치고 매어달린 야래향은,

도대체 어떻게 창조된 것일까

궁금하기도 하다.

나는 1970년대부터 오랫동안 이름을 날렸던 타이완(臺灣)출신 여자 가수,

떵리쥔(鄧麗君; Teresa Teng)의 노래 “예라이샹(夜來香)”을 떠올렸다.

한국어로 번역된 가사는 다음과 같다.

 

“남풍 불어 시원한데 밤꾀꼬리 우는 소리 처량하구나

 달빛 아래 꽃들은 벌써 꿈속으로 들었는데

 다만 야래향만이 향기를 뿜고 있네

 아늑한 밤의 풍경도 좋고 밤꾀꼬리의 노래도 좋지만

 꽃 같은 꿈속에서 나는 야래향과 입 맞추리라

 야래향! 나는 너를 위해 노래하고 너를 그리워하마

 아! 너를 위해 노래하고 너를 위해 그리워하마“

 

떵리쥔의 얼굴도 아름답고 목소리도 아름답지만 노래 말은 더욱 아름답다.

“소쩍새의 울음소리도 달빛 아래 꽃들도 좋지만 나는 야래향과 입 맞추리라.

 그리고 너를 위해 노래 부르고 너를 그리워한다”는 가사가 참으로 아름답다.

불세출의 어느 시성(詩聖)도 창작하기 어려운 아름다운 예술의 수준이다.

나는 오늘도 베란다에 나가서 ‘기다리는 사랑’이라는 꽃말을 생각하며,

야래향의 향기를 맡으며, 또 하나의 행복과 소망을 가져본다.

야래향이 남모르게 향기를 내뿜듯이 자식을 위하여, 형제를 위하여,

부모와 조상을 위하여, 이웃과 겨레와 나라와 인류를 위하여 향기를 내뿜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깨우치게 된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고귀한 존재를 쉽사리 인식하거나 발견하지 못하고,

오히려 눈을 감고 귀를 막고 고개를 돌리고 심지어는 증오하고 적대시하며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자문하게 된다.

 

오오!

천사 같은 야래향이여!

나의 야래향이여!

지란(芝蘭)의 향기가 멀리멀리 날아가고 야래향의 향기가 멀리멀리 날아가듯,

인간의 따뜻하고 달콤한 향기도 멀리멀리 날아가기를 간절히 바란다.

 

* 지교헌(1933~ )

철학박사.

수필가.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