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 박월수
새라고 다 날개를 지녔을까.
우도 섬의 소머리 오름에는 날개가 없어 날지 못하는 새가 산다.
날아가는 새는 바람의 등에 업혀 다니지만 이 언덕에 사는 새는 등줄기를 후려치는 바람 때문에 땅속으로 줄기를 키우고 마디를
짓는다.
나는 아직 땅에 사는 식물이 ‘새’라는 이름을 얻게 된 이유를 알지 못한다.
바람과 한 통속으로 움직이는 새의 물결을 본다.
섬의 바람받이에 속하는 언덕을 향해 해풍은 쉼 없이 불어오고 새는 누웠다가 일어나기를 반복한다.
바람은 일정하게 부는 법을 몰라 수만 갈래의 방향으로 와서 뿌리째 새를 흔들고 벼랑으로 달려간다.
그런 바람에도 새는 제 아랫도리를 꺾이는 일 없이 유연하게 허리를 굽혔다 폈다 할 뿐이다.
섬에 가득한 소금기가 몸에 척척 달라붙어 바람은 항상 몸이 무거웠는지 모른다.
그래 날마다 바다 건너 뭍으로 가기를 꿈꾸었으리라.
그곳에 가면 해풍이 아니라 그저 바람이 될 수도 있을 터이니까.
소금기를 날려버린 바람이란 얼마나 가벼워질 수 있는 존재인가.
멀리 도약하기 위해 섬에서 가장 높은 이 곳 오름을 택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게다.
발등이 부르트도록 기를 쓰고 오른 언덕에는 한가로운 새가 있었다.
바람은 새에게 무거운 제 몸의 소금기를 털어냈다.
섬에서 산 녹록하지 않은 세월만큼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어서 사나운 맹수처럼 자꾸만 비벼댔다.
바람이 이빨을 으르렁거릴수록 키 작은 새는 더욱 낮게 엎드렸다.
땅속 마디줄기를 붙잡고 악착스레 버텼다.
가벼워진 바람은 벼랑 끝으로 가서 힘차게 날아올랐다.
하지만 번번이 바다에 빠지고는 해서 좀체 뭍으로 가 닿지는 못했다.
바람은 무거운 몸을 이끌고 날마다 헐떡이며 언덕을 올랐다.
새는 땅속 마디 줄기에 잔털을 키우며 바람의 횡포에도 거뜬하게 견디는 법을 배웠다.
그런 날이 거듭되면서 새는 바람이 오는 길을 볼 줄 아는 눈이 생겼고 마음이 미리 마중을 했고, 몸이 알아서 먼저 누웠다.
누군가를 이해하게 된다는 건 사랑한다는 것이다.
바람의 위안이 되어 주는 새처럼 뭍을 꿈꾸는 바람도 언젠가는 새의 마음을 눈치 채게 될 것이다.
새에게 몸 비비던 그때 이미 한없이 가벼운 자유의 몸이 되었던 걸 바람은 미처 몰랐다.
내게도 그런 바람 닮은 남자가 있다.
예전에 그는 떡갈나무 잎을 흔드는 미풍이거나 고샅을 지나는 산들바람처럼 부드러웠다.
남의 집 울타리 너머 핀 목련을 꺾어 와 내게 건네주던,
다리가 후들거려 혼이 났다고 말 할 때의 취기 가득한 그는 향기로운 바람이었다.
나는 그에게서 어릴 적 먹던 바람사탕의 달콤한 냄새를 킁킁거리며 맡곤 했다.
그토록 여린 그도 간절히 불어 가길 원하던 뭍이 있었다.
그 뭍에 자신의 깃발을 꽂고 승자의 나팔을 불기위해 아등바등 하던 때가 있었다.
깃발에 갈증 난 사람처럼 어둠속에서도 쉬지 않고 자맥질을 했지만 쉬이 나아가지 못했다.
거친 물살 속에서 그를 보호해 줄 어떤 도구도 그는 가진 것이 없었다.
허술하기 짝이 없는 그의 유영하는 몸짓은 물속의 것들에겐 어쩌면 좋은 먹이였는지 모른다.
그는 이 곳 저 곳에서 자신의 살점을 떼어먹혔다.
그럴 때면 그는 물속에서 아주 오래 나오질 않았다.
숨 쉬는 일마저 귀찮아 져서 아예 물 아래로 가라앉고 싶었는지 모른다.
제동장치가 필요치 않은 조각배라도 있었다면 어찌어찌 해 보았겠지만 그는 언제나 빈 손 이었다.
세상은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게 아니란 걸 알아버린 그는 언제부턴가 멎어있는 바람이 되었다.
그 속에 상처가 곪아 자라고 있는 걸 몰랐다.
그가 언제부턴가 낯선 빛깔을 하고 여기저기 나부끼기 시작했다.
덧난 상처는 모난 바람이 되어 면도날처럼 나를 헤집었다.
내가 한 가지 바람에만 집착했을 때 내 삶의 모든 마디에선 수시로 서걱대는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환장할 돌풍도 바로 곁에서 불어갔다.
예측할 수 없는 바람의 색깔과 갈래에 맞춰 적응하는 법을 익혀야했다.
세상에 상처받은 그가 치대고 할퀴고 후려쳐도 좋은 그의 새가 되어야 했다.
대궁이 비어있는 새처럼 속엣 것 다 비우고 날마다 그를 기다렸다.
내 속을 그의 푸념과 한숨으로 채워도 좋았다.
바람처럼 비틀거리며 떠도는 그가 가정이란 울타리 안에, 내 안에 머물러 주었으면 했다.
사는 건 흔들리는 일이고 흔들리는 건 부러지지 않는다.
마음을 나누면 슬픔조차도 감미롭다.
내 것 아닌 절망에 귀 기울여 주지 않는 세상을 향해 통곡하느라 목이 쉬어 터질 필요도,
투신하느라 허리가 꺾일 필요도 없다.
그의 속에서 소용돌이치던 바람이 번져 내게로 가만히 불어오기를 나는 기다렸다.
그가 부는 법을 잊어버린 바람처럼 풀죽어 들어 온 새벽이었다.
등 돌려 누운 그의 어깨가 들썩이고 있었다.
절뚝이며 벼랑 끝으로 간 그가 숨죽여 울고 있었다.
날지 못하는 새에게도 목소리가 있다는 걸 나는 그때 절감했다.
바람의 맘을 이해하고 품기까지 바람의 흔적을 빌려 비명 같은 노래를 불렀음도 알았다.
나는 눈 먼 바람 같은 그 남자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의 든든한 바람벽이 되어주고 싶었다.
키만 멀쑥하고 야윈 그는 순한 아이처럼 내게 기대왔다.
나부끼다 지쳐 안주하고 싶은 그의 눈과 마주쳤다.
그는 이미 내 울타리 안에서 눅눅해져 있었다.
언덕을 훑고 지나던 바람이 곁을 주었나 보다.
한 곳에 머무는 법을 모르던 바람이 새와 사랑을 나누었나 보다.
햇살마저 다사로운 날, 새는 한결 나긋하고 바람은 전에 없이 살랑이더니,
소머리 오름에서는 무더기로 산통이 시작되었다.
머지않아 새가 피워 올린 꽃은 바람의 등을 타고 새처럼 훨훨 날아오를 걸 믿는다.
*새 - '띠'라고 하는 벼과의 식물, 제주 방언
박월수
1966년 대구 출생.
수필문학 초회 추천(2004)
부산일보 신춘문예 수필부문 당선(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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