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에 흐르는 강 / 김선화
누군가 내게 그리움에 대해 말하라면, ‘가슴에 흐르는 강’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잔잔하게, 때론 격정적으로 여울져 흐르는 강줄기를 누구나 가슴 복판에 품고서 살아간다.
그 물살이 그려내는 무늬에 따라 사람들의 삶은 천차만별의 갈래로 흐른다.
친정 선산에서 새해 일출을 맞았다.
아버지 산소 앞에서 온몸 가지런히 하고 절을 하시는 어머니 모습이 풋풋한 소녀 같다.
아니, 나풀거리는 한 마리 나비 같다.
지아비에게 정성을 다하는 여인의 表象이 바로 저런 모습일까 싶을 정도로 뒷모습이 고결해 보인다.
어머니 가슴엔 아마도 뜨거운 강이 흐르리라.
그 출렁임을 어쩌지 못하여 저렇게 춤을 추시는 게다.
아버지 계실 때나 사별 후에나, 그분 앞의 어머니는 귀여우면서도 정갈한 여인이다.
나는 같은 여인으로서 이러한 어머니가 부러움의 실체이기도 하다.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혼인 이야기를 즐겨 들어왔는데, 그때마다 두 분 얼굴에 어리던 빛을 잊지 못한다.
그건 웬만한 일에는 꿈쩍않는 믿음의 빛깔이었다.
평화롭게 번지는 미소 속에 질곡의 삶을 거쳐온 무수한 사연들이 녹아 흐르고 있었다.
일찍이 열네 살에 아버지를 처음 보고 마음이 달뜨셨다는 어머니는 한 마디 대화도 없이 그 情念을 가꾸어 3년 뒤 아버지의 색시가
되었다.
불 같은 성미인 외할아버지 고집을 꺾고 부부의 연을 맺기까지 어려움도 따랐지만, 어머니는 장래의 지아비에 대한 믿음이 더 든든
했다고 하신다.
그러한 부모님의 추억을 나는 매우 소중하게 여겨왔다.
선 한 번 보고 혼인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시절에 두 분의 은근한 로맨스가 부럽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두 분 사이에도 표현 못했던 부분들이 켜를 이루었던 것일까.
아버지 가시기 전 날, 저녁 면회를 마치고 중환자실을 나오는 어머니 얼굴엔 뜻밖에도 미소가 물려 있었다.
거두절미하고 아버지로부터 ‘평생에 딱 한 번 들어보는 말을 들었다’고 하셨다.
오랜 지병 끝에서야, 그것도 이승과 저승의 갈림길에 서서 어머니의 가슴 속을 어루만지는 소리.
“그간 내게 시집와서 자식들 여럿 낳아 번듯번듯 키워줘서 고마워.”
바로 이 말씀에 어머니는 ‘바보처럼 웃었노라’고 하셨다.
그 한 마디가 어머니로 하여금 지아비를 곧 떠나보내야 한다는 사실조차 잠시 잊게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머니는 아버지 1주기 제상을 물리며 혼잣말처럼 뇌이셨다.
“내 진정 너희 아버지를 만나 50여 년 간 행복했나니라…….”
그리움을 저미어대는 소리다.
한 여인이 지아비를 보고 싶어하는 소리다.
행여 나태해질까 싶은 당신의 자녀들을 꾸짖는 매서운 채찍이다.
아울러 이 시대 뭇 사람들에게 보내는 무언의 메시지이다.
언제부턴가 ‘偕老’라는 말이 커다란 의미로 다가온다.
남남이었던 사람들이 만나 하나의 가정을 이루고, 거기서 갖가지 색채의 삶을 일구어가는 행로,
특히 여인으로 태어나 오로지 한 남성에게 마음 다하는 것은 지극히 평범한 것 같지만 평범한 일이 아니다.
그 길에서 흔들리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까닭이다.
그럴수록 한 남성 앞에서 지순한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는 여인이 참으로 성스럽게 비쳐진다.
친구 중에도 남편에게 미쳐본 일 말고는 다른 미칠 만한 일이 없더라는 친구가, 그런 면에서 볼 때 미덥다.
그 정도로 부부라는 정해진 대상을 향해 열정을 다한다는 말이 고귀한 말이 되었다.
민담을 들어보면 조선시대 여인들 사이에도 ‘무덤까지 가지고 갈 비밀’이란 말이 있었다고 한다.
갓 끈을 갖추어 맨 선비는 접어두고라도,
소금 장수를 대상으로 하여 불시에 후끈한 감정이 일었다면 그걸 어찌하겠는가.
그럴 때면 당사자인 여인은, 가슴 속에서 솟구치는 그리움의 형체를 애써 도리질했을 것이다.
다독이고 다독이며 거침없는 心想의 무늬들을 지워댔을 것이다.
걷잡을 수 없이 치오르는 감정의 줄기를 얼른 돌려 잡아 유연히 흐르게끔 물꼬를 텄을 것이다.
만약 그렇지 못했다면 자신이 그려낸 숱한 무늬에 갇혀 영영 헤어나지 못하는 일을 초래했을 게 자명하다.
그러고 보면 엄격하기 그지없던 유교 사상 그늘에서도 여염집 여인네들의 숨구멍은 옹색하게나마 트여 있었던 모양이다.
자신도 모르게 살포시 일어나는 연정을 누르는 데 쓰였던 ‘무덤까지 가져갈 비밀’이란 말이,
여유를 느끼게 하는 방편의 機智로 들린다.
심적 동요를 가라앉히는 과정을 오히려 아름답게 함축시킨 말이 아니고 무엇이랴.
이처럼 사람들 가슴에 흐르는 강은 感情이며 또 理性이다.
숨막힐 듯 뜨겁게 일렁이는 감정의 물줄기를 잔잔히 흐르게 하는 것은 이성의 구실이다.
이러한 조화를 잘 이뤄냈을 때만이 사랑은 더욱 충만할 것이고,
부부는 그 위대한(?) 해로의 반열에 오르게 될 것이다.
그래서일까.
“내 진정 행복했나니라. 애초 마음 둔 곳에 뿌리를 묻고 곡절도 많았다만, 진정 행복했나니라”
하신 어머니 말씀이 그 밤 내내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아니 몇 달이 지난 지금도, 어머니 가슴에 일렁이던 강물이 잔잔한 여음이 되어 나를 가둔다.
金善化 (1960~ )
수필가, 시인
충남 신도안 출생.
예명 金宣和, 호는 지송(遲松)
『월간문학』신인상으로 수필과 청소년소설 등단
한국문인협회, 국제펜클럽, 한국수필가협회, 수필문우회 회원
『選수필』,『한국수필』 편집위원
수상
제4회 대표에세이문학상
제3회 대한문학상(詩부문)
제27회 한국수필문학상
수필집 : 『둥지 밖의 새』 『눈으로 보는 소리』 『소낙비』(국내 최초 단수필 단행본) 『포옹』 『아버지의 성(城)』
『나무속의 나무』
시집 : 『눈뜨고 꿈을 꾸다』 『꽃불』
청소년장편소설 : 『솔수펑이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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