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pot of Jeju azbang

제주아즈방의 이런 저런 여러가지 관심사 창고

🤍 文 學 236

'커피 한 잔'

음악의 아버지라 불리는 바흐가 커피 광고 음악을 작곡했다고? 뚱딴지같은 소리로 들리겠지만 사실이다. 근엄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바흐지만 커피를 소재로 칸타타를 만들어 커피 하우스에서 초연을 했다. 오페라를 작곡한 일이 없는 바흐지만 커피를 지독하게 사랑했거나, 당대에 커피가 대유행 중이어서 커피를 소재로 한 음악이 충분히 흥행할 수 있었거나 둘 중의 하나다. 악성 베토벤이 작곡한 곡의 8할은 커피 덕이라고? 이건 더더욱 거짓말로 들리겠지만 개연성이 있다. 커피를 지독히 사랑한 베토벤은 매일 아침 원두 60알을 일일이 세어 커피를 끓여 마셨다. 놀랍게도 오늘날 에스프레소 한 잔에 들어가는 원두의 양이다. 매력적인 커피의 향과 쓰고, 시고, 달고 한 복합적인 맛이 영감을 불어 넣었겠지만, 무엇보다 카페인이 주..

틀리기 쉬운 한글 102가지

틀리기 쉬운 한글 102가지 1. 아기가 책을 꺼꾸로 보고 있다.(꺼꾸로 → 거꾸로)2. 소가 언덕배기에서 놀고 있구나.(언덕배기 → 언덕빼기)3. 딱다구리가 쉴새없이 나무를 쪼고 있다.(딱다구리 → 딱따구리)4. 땀에서 짭잘한 맛이 났다.(짭잘한 → 짭짤한)5. 오늘은 페품을 내는 날이다.(페품 → 폐품)6. 김건모의 핑게라는 노래가 인기있다.(핑게 → 핑계)7. 내 작품이 교실 계시판에 붙어있다.(계시판 → 게시판)8. 5학년 1반으로 가면 국기계양대가 있다.(계양대 → 게양대)9. 백화점 휴계실에서 만나자.(휴계실 → 휴게실)10. 성적표를 보니 씁슬한 기분이 들었다.(씁슬한 → 씁쓸한)11. 나와 내 동생은 연연생으로 태어났다.(연연생 → 연년생)12. 늠늠한 항도의 남학생들을 보라!(늠늠한 → ..

틀리기 쉬운 한글 맞춤법 6가지

틀리기 쉬운 한글 맞춤법 6가지우리가 인터넷에서 사용하고 있는 신종어, 희귀어들을, 최근 입사지원을 하는 젊은이들이 이력서나 자기소개서에도 그대로 적어서 제출하고 있다고 한다.그 것을 직접 받아보는 사람들은 정말 얼마나 황당할까?재미로 쓰는 것은 좋지만, 그래도 때와 장소, 공과 사는 구분해서 사용해야 되지 않을까? 틀리기 쉬운 한글 맞춤법 6가지1. 요 / 오“꼭 답장 주십시요.”, “수고하십시요” 이런 말들은,모두 마지막의 “요”를 “오”로 바꿔 써야 맞다.반면, “꼭 답장 주세요”, “수고 하세요”에서는 “요”가 맞는데,세상만사가 그렇듯이 원리를 따지면 복잡하니 간단히 암기하자.말의 마지막에 “-시요”를 적을 일이 있을 때는, “-시오”로 바꿔 쓴다.2. 데로 / 대로“부탁하는 데로 해 주었다”, ..

'바람이 소리를 만나면' / 고임순

바람이 소리를 만나면 / 고임순 때로 우리는 낯선 땅을 밟고 그곳의 분위기에 젖다보면 잠시 나를 잊을 때가 있다. 강, 달, 배, 숲, 시(詩)가 있는 풍경, 분강촌(汾江村)의 하루가 그러했다. 마치 5백 년을 거슬러올라간 듯한 신비스러움을 느꼈다.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에 있는 농암(聾巖) 종택은 퇴계 이황(李滉)의 스승이신 이현보 선생의 생가로, 그의 17대손이 살고 있었다. 둘레에 아름드리 소나무가 운치를 더해주는 예스런 기와집, 따스한 온돌방에서 문풍지 우는 소리에 잠을 설쳤지만, 새벽 대기는 폐부를 찌르는 상쾌함이었다. 이곳에서 아침식사를 마치고 근처 청량산(淸凉山)으로 향했다. 2월 하순의 산은 황량했지만 세상사에 찌든 등산객들을 포근히 안아주었다. 훤히 뚫린 시야, 가물가물 안개처럼 서리는 나..

'곰장어는 죽지 않았다' / 정성화

늦은 밤 일을 마치고 들어와 전등 스위치를 위로 탁 젖힐 때, 그 순간 집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볼 때, 혼자라는 사실을 실감한다. 가족들이 각자 자신의 일로 집을 떠나간 뒤, 나는 그야말로 대소쿠리 안을 구르는 땅콩 한 알의 신세가 되어버렸다. 그다지 쓸쓸하지 않으니 이상한 일이다. 나의 가족을 별로 사랑하지 않거나 원래 냉정한 사람, 아니면 외로워질 준비를 미리 해온 사람, 그 셋 중에 하나일 텐데 어느 형인지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나는 그 3종 세트에 해당하는 인간일지도 모른다. 오전 내내 멍한 상태로 거실에 앉아 있었다. 그때 창 밖의 새 한 마리가 거실 바닥에 제 그림자를 드리우며 날아갔다. 가슴을 할딱거리며 새는 날아갔을 테지만 지상에 남긴 흔적이란 없다. 직선으..

'첫맛과 끝맛' / 정봉구

첫맛과 끝맛 / 정봉구 “끝맛이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아셔?” 깔끔한 다방이었다. 자리에 앉아서 커피를 시키고 난 다음에 건네온 송 박사님의 질문이었다. “아쇼?” 해도 좋을 텐데 “아셔?” 하고 말을 낮추어 부드러운 어감으로 상대방의 기분을 살피는 말솜씨. 송 박사님, 벌써 칠십을 넘은 고령이니까 ‘님’ 자를 붙여야 옳을 것 같다. 숱이 많은 머리가 위로 치솟은 것으로 미루어 비록 백발이긴 하지만 기(氣)가 왕성하리란 추측이 간다. 밝고 명랑한 기상(氣象)만 보아도 그분이 아직 건강하고 여유 있음을 짐작케 한다. 끝맛이 좋은 것? 자리가 다방인데다 시킨 것이 커피였으니까. 그 수수께끼의 답이 쉽게 짐작되었다. 마침 주문한 커피도 배달되었고 구수한 향내가 한층 더 우리의 분위기를 따뜻하게 한다. “첫맛이 ..

'간시궐(幹屍厥)' / 맹난자

간시궐(幹屍厥) / 맹난자 수세식 변기를 쓰면서부터 물을 내리기 전, 마주하게 되는 것이 있다. 자기가 내놓은 배설물이다. 사십여 년 동안 무의식적으로 지속된 이러한 행동, 그러다 어느날 문득 '나는 기껏해야 똥싸는 기계가 아닌가'하는 회의가 들었다. 그러나 그것을 내놓지 않으면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그때 별안간 운문(雲門)선사의 '똥막대기'가 생각났다. '부처가 무엇입니까?' 하고 제자가 물었을 때, 운문은 거침없이 '간시궐(幹屍厥:똥막대기)' 이라고 답했다. 그는 왜 존귀한 분〔世尊〕이시며 청정한 분을 더러운 똥막대기라고 했을까? 궁금해 하다가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의 차별이나 편견을 갖지 말라는 것쯤으로 넘기고 말았다. '부처와 똥막대기' 그 후 '간시궐'의 화두가 나의 발목은 잡은 것은, '몸..

'미역귀' / 김영식

미역귀 / 김영식 미역귀는 귀가 많다. 귀속에 귀가, 그 안에 또 귀가 잔뜩 들어있다. 꺼내도 꺼내도 자꾸 나오는 마트료시카 인형처럼. 귀가 많다는 건 마음이 선량하다는 것. 귓밥처럼 넓고 두터운 잎을 들추면 속살 깊숙이 갈색의 파도 소리가 켜켜이 쌓여 있다. 소쿠리에 소복이 담긴 미역귀에서 물씬 바다 향이 끼쳐온다. 미역 줄기 위에 달린 씨앗 주머니를 미역귀라 하는데, 통상 한줄기에 한 개씩 열린다. 경상도 사투리로 ‘꾸다리’라고도 하며, 모양은 흡사 탐스럽게 핀 장미나 국화 같다. 마르기 전에는 루비, 마른 후엔 흑요석 색깔과 비슷하다. 갓 채취한 것을 생으로 초고추장에 찍어 먹으면 밥도둑이 따로 없다. 말린 후 무치거나 바삭하게 튀각을 만들어 반찬으로 먹기도 한다. 동해안 구룡포에선 해마다 3, 4..

靑山兮要我(청산은 나를 보고) / 懶翁禪師

懶翁禪師 (1320~1376) 고려 말기의 고승으로 휘는 혜근(慧勤), 호는 나옹(懶翁), 본 이름은 원혜(元慧)이다. 속성은 아(牙)씨인데 고려 말 예주부(지금의 경북 영덕군 창수면 갈천리)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원나라 유학을 했고 인도의 고승 지공스님의 제자로서 인도불교를 한국불교로 승화시킨 역사적 인물로서 朝鮮太祖의 왕사였던 無學大師의 스승 이었다.

'옛날식 다방' / 한상렬

궂은 비 내리는 날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앉아, 도라지 위스키 한 잔에다 짙은 색소폰 소릴 들어보렴 ... 어디선가 최백호의 구성진 가락이 들려오는 듯하다. ‘낭만에 대하여', 그래, 낭만이었다. 어쩌다 만날 약속이 되어 있는 날, 층계를 한참이나 내려가야 하는 컴컴한 다방. 미로처럼 칸막이가 서 있고 자그마한 탁자에 의자가 둘러쳐진 다방에는 최백호의 노래가 구성지게 울려 퍼졌다. 젊은 아가씨가 엽차를 나르면 인생살이에 쓴맛 단맛 모두 섭렵한듯 여겨지는 기미투성이의 늙은 마담은, 오랜만에 온 손님을 함박웃음으로 맞이했것다. 이쯤 되면 하릴없는 중늙은이의 입이 반쯤은 찢어진다. 석유난로 위에는 시커멓게 찌든 1,5리터 주전자에서 물이 설설 끓고 있었지. 하루 종일 앉아 노닥거려도, 엽차만 주문하여 벌칵벌..

'옛날식 다방을 생각하며' / 이병식

사라져 가는 것은 아쉽다. 더구나 그것이 우리의 일상과 밀접했던 것이라면 그 아쉬움은 더 커진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다방이 사라지고 있다. 시내를 걷다가 어쩌다 다방이란 간판을 보면 스러져가는 폐가의 택호를 보는 듯 애잔하다. 그래도 가슴을 따스하게 하는 정겨움이 있어 다시 한번 쳐다보게 된다. 내가 다방을 처음 들어가 본 기억은 고등학생 때인 것 같다. 어떤 행사가 있어 친구들이 모였는데 시간이 많이 남았다. 그래서 몇몇이 어울려 주위를 한 바퀴 돌기로 했다. 조금 걸으려니 다방이 보였다. 그런데 다방에서 시화전을 한다고 한다. 다방이 어떤 곳인지 궁금해하던 차에 떳떳하게 들어가 볼 수 있는 구실이 생긴 것이다. 오전이라 그런지 손님은 없었고 예쁘고 세련된 아가씨가 혼자 있었다. 우리는 시화전보다 예..

'젓갈 예찬' / 정호경

젓갈 예찬 / 정호경 ‘젖’은 엄마 품에 안긴 어린애가 꼬막손으로 미래의 꿈을 주무르며 빨아먹는 사랑의 밥인가 하면, ‘젓’은 나이가 든 어른들이 밥숟가락에 얹거나 걸쳐서 먹는, 짜고 고소한 감동의 반찬이다. 이와 같이 ‘젖’과 ‘젓’은 맞춤법과 뜻과 정서가 각각 다른데도, 우리는 일상의 글에서 우리말을 조심성 없이 붓 가는 대로 마구 써버리니 글의 문의파악에 잠깐이나마 혼동이 일어 우리의 머리를 어지럽게 만든다. ‘젖’이나 ‘젓’이나 둘 다 눈을 지그시 감고 먹는 얼굴표정은 비슷하지만, 각각 맛의 깊이와 색깔이 다르니 하는 말이다. 속담사전에 보면, ‘젓갈가게에 중이라’, ‘눈치가 빠르면 절에 가도 젓갈을 얻어먹는다’, ‘절이 망하려니까 새우젓 장수가 들어온다’는 등, 젓갈에 관계되는 속담이 더러 올라..

'어깨 너머' / 최원현

어깨 너머 / 최원현 궁금했다. 무엇일까? 아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사람들이 성처럼 둘러선 보이지 않는 그 중심에서 어떤 일이 생긴 것일까. 그러나 위급하고 위험한 일은 아닌 것 같다. 사람들의 표정이 호기심이고 기대인 것으로 보아서 어떤 재미있고 신기한 일인 것이 분명하다. 나는 그 중심의 무엇인가를 확인하기 위해 우선 깨금발로 키 높이를 조정해 보았다. 하지만 그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사람들이 쌓은 성이 다섯 겹도 넘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조금 느슨해 보이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틈을 뚫고 들어갔다. 그러나 이내 앞사람에 막히고 말았다. 키는 나보다 큰 것 같지 않은데 덩치가 커서 내 눈이 뚫고 들어갈 틈까지 아예 차단해 버렸다. 그때였다. 와! 하고 사람들이 환성을 질렀다. 도대체 ..

'발을 잊은 당신에게' / 김만년

1. 이날까지 당신만 바라보고 살아왔어요. 당신의 육중한 무게에 눌려 숨죽이며 살아왔죠. 십 문반, 당신의 완고한 성채에 갇혀 퀴퀴한 생각만 키워왔어요. 별이 뜨는지 바람이 부는지 문밖의 세월은 몰라요. 젖은 길, 가시밭길, 발바닥 부르트도록 앞만 보고 걸어왔어요. 당신이 휘파람을 불며 들판을 지날 때나 파장 술에 업혀 뒷골목을 휘청거릴 때도 언제나 내 자리는 당신의 바닥이었죠. 젖은 바닥 노천탁자 밑에 쭈그리고 앉아 당신의 생각 없는 발장단에 비위 맞추며, 늦은 귀가시간 기다려 왔어요. 긴 세월 당신의 보폭에 순응하며 살아왔죠. 그런데 오늘은 문득 억울한 생각이 드네요. 오늘밤에도 당신 손은 애지중지 살구비누로 씻어주었죠. 발을 발로 씻는 당신의 습관은 세월이 가도 고쳐지질 않네요. 취중이었다고요? 늘..

'몽돌' / 김만년

몽돌 / 김만년 한 바탕 격류가 휩쓸고 간 뒤라서 그런지 강가에는 지층 깊숙이 숨어 있던 햇돌들이 많이 나와 있다. 돌의 온기를 느끼며 자근자근 맨발로 걷는 이 시간을 나는 좋아한다. 돌들의 형상은 하나같이 닮은꼴이다. 마치 갓 입문한 동자승들이 절간 뜨락에 앉아 재잘재잘 일광욕을 즐기는 듯 모두가 개구지고 정겹다. 느린 발끝에 유독 둥글고 반짝거리는 돌 하나가 채였다. 작은 몽돌이었다. 유심히 살펴보니 나이테 같기도 하고 사람의 귀 모양 같기도 한 몇 가닥의 문양이 고지도처럼 흐리게 새겨져 있다. 회색빛 결이 무척 단단해 보였다. 돌에도 나이테가 있을까. 이 돌은 어느 먼 시간에 살다가 여기까지 흘러 온 것일까? 문득 돌의 여정이 궁금해진다.돌의 문양 속으로 억겁의 풍화가 느껴진다. 흐릿한 돌의 등고선..

'맛있는 술잔' / 김만년

맛있는 술잔 / 김만년 아마 고1 여름방학 때쯤으로 기억된다. 우리 네 명의 깨복쟁이 친구들은 일찌감치 저녁을 먹고 방천 둑으로 내걸었다. 주머니에 딸랑거리는 몇 푼의 동전을 십시일반 모아서 인디안밥, 쥐포, 참외 몇 개, 그리고 생전 처음으로 샴페인 두 병을 샀다. 고등학교를 각자가 다른 도시로 유학(?) 갔다가 방학을 계기로 만났기 때문에, 반갑기가 그지없었다.우리는 건달처럼 제법 의기양양해 하면서 긴 방천 둑을 끼고 뿌연 달밤을 걸어갔다. 어디선가 여인네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농사일을 마치고 저녁상을 물린 여인네들이 정미소 앞 냇가에서 멱을 감는 모양이다.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힐끔거리며 걸어가는데, 친구 한 녀석이 느닷없이 논두렁을 낮은 포복으로 기어가는 게 아닌가. 고재종 시인의 “그 ..

'여보게 좀 쉬어가자구나' / 안재진

여보게 좀 쉬어가자구나 / 안재진 오랜만에 산행을 떠났다. 그 동안 말로는 소백산을 가자느니 지리산을 가자느니 혹은 치악산, 동대산, 청량산 등, 수없이 주워 챙겼지만, 실지로는 코앞에 닿아있는 채약산 보현산도 한번 오르지 못했다. 세상살이가 눈코 뜰 사이 없도록 바빠서 그런 것도 아닌데, 공연히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며 살다 보니 마음의 여유를 갖지 못한 것뿐이다. 아니, 그보다는 게으른 탓이었다고 하는 게 옳겠다. 수도사 계곡에서 치산폭포로 오르는 팔공산 등산로는 무척 가파른 길이었다. 비탈밭 긴 이랑을 갈아 넘기는 소처럼 숨을 헐떡이며 올라가다가, 때로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장승처럼 굳어져 있는데, 동행인 k형과 l교수는 어쩜 그렇게도 활기차게 올라가는지 신기하기까지 했다. 두 사람은 느릿느릿..

'소나기' / 황순원(黃順元)

소년은 개울가에서 소녀를 보자 곧 윤 초시네 증손녀(曾孫女)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소녀는 개울에 다 손을 잠그고 물장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서울서는 이런 개울물을 보지 못하기나 한 듯이. 벌써 며칠째 소녀는,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물장난이었다. 그런데, 어제까지 개울 기슭에서 하더니, 오늘은 징검다리 한가운데 앉아서 하고 있다. 소년은 개울둑에 앉아 버렸다. 소녀가 비키기를 기다리자는 것이다. 요행 지나가는 사람이 있어, 소녀가 길을 비켜 주었다. 다음 날은 좀 늦게 개울가로 나왔다. 이 날은 소녀가 징검다리 한가운데 앉아 세수를 하고 있었다. 분홍 스웨터 소매를 걷어올린 목덜미가 마냥 희었다. 한참 세수를 하고 나더니, 이번에는 물 속을 빤히 들여다 본다. 얼굴이라도 비추어 보는 것이리라. 갑..

'밤하늘의 트럼펫' / 견일영

밤하늘의 트럼펫 / 견 일 영 나팔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려왔다. 부리나케 밖으로 뛰어 나가보니 곡마단 선전 악대가 동네 안으로 들어오고 있지 않는가. 얼마 전부터 마을 앞 공터에 높다란 천막을 올리더니 이제 곡마단이 들어온 것이다. 우리 면에 곡마단이 들어오면 전체 분위기가 들떠 오르게 된다. 그 중에도 아이들을 열광의 도가니로 빠져들게 하고, 트럼펫 소리는 그들의 넋을 빼앗아 놓는다. 곡은 언제나 단조 음으로, 애수에 젖은 고음의 선율을 내면서 아이들 가슴을 통째로 비워놓게 한다. 큰 천막 안에 높이 매달아놓은 그네 위에서 온갖 묘기를 부리는 어린 소녀는 관중의 가슴을 죄어놓는다. 트럼펫은 슬픈 왈츠 곡으로 관람자의 가슴을 애달프게 해놓고는 그네에 매달린 소녀에게 더욱 연민의 정을 느끼게 분위기를 만든..

'만남' / 지교헌

만남 / 지교헌 사람은 항상 만남을 통하여 살고 있다. 죽은 사람이라면 몰라도 산 사람이 사람을 만나지 않고 산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우리는 우선 나면서부터 부모를 만나고, 형제자매를 만나고, 친인척과 이웃을 만날 뿐만 아니라, 거리에서나 학교에서나 직장에서나 사회에서나 항상 사람을 만나게 된다. 이따금 문 밖엘 나가지 않고 집안에 들어앉아 있어도, 전화를 주고받고 편지도 주고받으면서 간접적으로 사람을 만난다. 살아 있는 사람만 만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사람도 만난다. 자식이 조상의 제사를 지내고 공부하는 사람들이 옛 선현을 사숙하는 것이 모두 하나의 만남이니 말이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일은 우연히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어느 한 쪽에서 적극적으로 행동함으로써 이루어지기도 한다. 다시 말하..

'비워서 채우는 즐거움' / 최장순

며칠째 속이 더부룩하다. 과식한 탓인가. 소화 안 된 오후가 거북하다. 적당히 내 속사정을 헤아렸어야 했다. 그전처럼 술술 받아들이는 위가 아니다. 수년간 몸담은 집이 언제부터인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발 디딜 공간이 점점 줄어든 것 같더니 아예 숨 쉴 공간조차 없어 보였다. 방은 방대로, 거실은 거실대로, 발코니마저 짐으로 가득 찼다. 나는 이미 주인의 자리를 잃은 듯했다. 그러고도 자꾸 들여놓기만 했다. 과식인 내 속처럼. 서재, 옷장, 부엌 등 집안 곳곳이 호흡곤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웬만한 처방은 먹힐 것 같지도 않았다. 물건 몇 개 정리한다고 만성 소화불량이 해결될 일은 아니었다. 처방은 두 가지. 더 넓은 집으로 이사 가든지 눈 딱 감고 물건을 버리는 일이었다. 지금 거주하고 있는 아파트에 열..

'상사화(相思花)' / 장태윤

'이룰 수 없는 사랑' / alto sexopone 상사화(相思花. Lycoris squamigera). 수선화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 개가재무릇이라고도 한다. 봄철에 비늘줄기 끝에서 잎이 모여 나는데, 길이 20~30cm, 나비 16~25mm의 선 모양을 하고 있다. 꽃줄기가 올라오기 전인 6~7월이면 잎이 말라 죽으므로, 꽃이 필 무렵이면 살아있는 잎을 볼 수 없다. 잎이 있을 때는 꽃이 없고, 꽃이 필 때는 잎이 없으므로, 잎은 꽃을 생각하고 꽃은 잎을 생각한다 하여, 상사화(相思花)라는 이름이 붙었다. 7~8월에 꽃줄기가 길게 자라 고, 그 끝에 4~8개의 꽃이 산형 꽃차례를 이루며 달려 핀다. 빛깔은 연한 홍자색이고 길이는 9~10cm이다. 지방에 따라서는 개난초라고도 한다. 열매를 맺지 못한..

🤍 文 學/詩 . 2022.07.29

'대추나무' / 손광성

대추나무 / 손광성 대추나무 같이 볼품이 없는 나무가 또 있을까? 마당을 서성거리다가 우연히 대추나무와 마주칠 때마다 늘 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 벚나무와 같이 화사함도 없고 느티나무나 은행나무 같은 위용도 없다. 그렇다고 가을이면 다른 나무들처럼 곱게 단풍이 드는가 하면 그렇지도 못해서, 언뜻 보기에 아카시아나무로 착각하기 십상이다. 게다가 가지는 고집스럽게 뻗어서 조화와 균형을 잃고 말았다. '나무처럼 사랑스런 시는 없으리'. 이렇게 노래한 시인이 있지만 아무리 뜯어보아도 대추나무에는 시를 찾을 수가 없는 듯싶다. 대추나무는 계절 밖에 없다. 봄이 와도 봄을 모르고 가을이 되어도 여름으로 착각하는 나무이다. 개나리가 피고 진달래가 지고, 벚나무며 라일락 같은 꽃나무들이다. 불꽃놀이라도 하듯 온통 분홍..

[손성진 칼럼] 대통령 지지율의 양면

"지지율에 연연하지 않겠다." 흔해 빠진 레퍼토리가 윤석열 대통령의 입에서도 나왔다. 윤 대통령의 지지율은 32%까지 폭락했다. "입덧하는 기간이라 생각하시라." 낮은 지지율에 속앓이를 하던 이명박 전 대통령을 부인 김윤옥 여사는 이렇게 위로했다. 입덧은 고사하고 허니문도 지금은 없다. 지지율은 조작 가능한 것이긴 하다. 전임 문재인 대통령이 보여줬다. 75% 지지의 이면에는 '와이셔츠 바람의 테이크아웃 커피잔'과 '집무실의 일자리 상황판'이 있었다. 솜씨 좋은 포장에 국민은 속았다. 무심한 대중은 갈대처럼 나부낀다. 최고권력자는 '대중 사용법'을 안다. 10월 유신에 찬성표를 던진 국민은 90%를 넘었었다. 지도자가 높은 지지율에 도취할 때 국가는 오히려 위험해질 수 있다. 지나치게 집착하면 포퓰리즘의..

'커피에 관한 추억' / 목성균

커피에 관한 추억 / 목 성 균 커피 잔을 들고 그윽하게 말하는 안성기의 커피 시에프 대사를 나는 실감하지 못한다. 커피의 참 맛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커피의 참 맛을 모르는 것은 물론, 알려고 하지도 않는 커피문화의 무뢰한이다. 그러면서 하루 서너 잔의 커피를 마신다. 물론 인스턴트 커피다. 카페인 중독증상인지 모른다. 소위 말하는 "Heart or Coffee‘는 아라비카종 마일드급 원두를 정성껏 볶아서(焙煎) 갈은 미세한 커피 분말을, 에스프레소 방식으로 추출해 낸 레귤러 커피라고 한다. 그 뛰어난 커피 향은 유럽 문화인들의 취향에 따라서 발전해 온 것이다. 안성기의 시에프 연기가 유럽문화인의 취향을 다 표현한 것인지 모르지만, 그 표정이 커피문화의 감응도 같아 보이긴 한다. ‘음-. 이 맛-...

'세월이라는 괴물' / 이신구

세월이라는 괴물 / 이신구 여행 후 발등이 부어 20일을 방구들을 등지고 천장을 보며 지냈다. 왼쪽 발등에 이유를 모르는 염증이 생기고 부었으니, 발을 높이 쳐들고 밤낮 없이 누워있었다. 걷거나 서 있을 생각을 하지 말라는 의사선생님의 말씀에 옴싹달싹을 못하고 지냈다. 그 옛날 등잔불 밑에서 책을 읽으려면 가끔 천정에서 우르릉 쾅쾅 쥐들의 운동회가 열렸다. 하도 시끄러워 막대기로 툭툭 치다보면 서생원(쥐) 오줌에 젖은 천정이 뚫리기도 했다. 어쩌다가 달리기 시합을 하던 서생원들이, 앉아있는 나의 목덜미로 툭 떨어져 기겁을 한 기억이 떠오른다. 어느 날엔 천정을 물끄러미 쳐다보노라면 바둑판이 그려져 있고, 어느 땐가는 당구대가 되어 당구공이 이리저리 둥글어다니기도 했다. 우리 몸이 어디든 불편하면 마찬가지..

'어영부영하다가' / 김상립

흔히 찰나를 누적시키면 겁이 되고, 겁을 세분하면 찰나가 된다고 말한다. 찰나 속에도 영원성이 포함되어 있고, 영원의 내면은 찰나의 속성으로 채워져 있다는 뜻이기도 할 게다. 잠깐도 계속 이어지면 영원이라 불릴 것이고, 영원이라는 시간을 나누고 또 나누면 순간이 되리라는 것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하여 순간을 잘 써야 바람직한 일생이 꾸며질 것이고, 훌륭한 삶은 최선을 다한 순간순간의 모임일 터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짧은 인생길도 지루하다고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하고, 돈벌이에 정신이 팔려 주어진 시간을 돈돈하며 모두 써버리기도 한다. 권력투쟁에 일생을 바치는 사람도 있지만, 막강한 지금의 권력이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며 몸부림치는 사람도 있다. 부모 잘 만나 호의호식하며 인생이 꿈속인 듯 사는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