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돌 / 김만년
한 바탕 격류가 휩쓸고 간 뒤라서 그런지 강가에는 지층 깊숙이 숨어 있던 햇돌들이
많이 나와 있다.
돌의 온기를 느끼며 자근자근 맨발로 걷는 이 시간을 나는 좋아한다.
돌들의 형상은 하나같이 닮은꼴이다.
마치 갓 입문한 동자승들이 절간 뜨락에 앉아 재잘재잘 일광욕을 즐기는 듯 모두가
개구지고 정겹다.
느린 발끝에 유독 둥글고 반짝거리는 돌 하나가 채였다.
작은 몽돌이었다.
유심히 살펴보니 나이테 같기도 하고 사람의 귀 모양 같기도 한 몇 가닥의 문양이
고지도처럼 흐리게 새겨져 있다.
회색빛 결이 무척 단단해 보였다.
돌에도 나이테가 있을까.
이 돌은 어느 먼 시간에 살다가 여기까지 흘러 온 것일까?
문득 돌의 여정이 궁금해진다.
돌의 문양 속으로 억겁의 풍화가 느껴진다.
흐릿한 돌의 등고선을 따라 세찬 눈발이 흩날린다.
먼 태허에서 불어 온 백악의 바람이 만져진다.
모든 산맥들이 허공으로 융기할 때 미명의 하늘로 폭죽처럼 분출하던 돌들의 장엄한
군무가 그려진다.
수면을 박차고 하늘을 나는 익룡의 불울음 소리도 들린다.
발등 까맣게 타도록 돌탑을 돌던 아사녀의 한숨소리도 들리는 것 같다.
유목민의 돌팔매에 매달려 핑핑 석기의 숲을 날다가 어느 시원(始原)의 강가에 뚝
떨어진 돌이라고, 그렇게 물 따라 바람 따라 정처 없이 굴러 온 생이라고,
참 멀고도 고단한 여행이었다고……,
마치 먼 시간의 행간 속에 오래 묵혀두었던 서책을 펼치듯이 수억 년 앙다문 돌의
내력을 나에게 넌지시 일러주는 것만 같다.
그랬을 것이다.
수십억 년 전 지구가 처음 생성될 때 아득한 심층부로부터 마그마가 분출하여 불쑥
솟아 오른 것이 바위산이 되었고,
바위는 다시 수억 년의 풍화를 거듭하면서 차츰 무르고 금이 갔을 것이다.
그 금간 부분들이 모암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비로소 삐죽한 돌이 되고,
다시 장구한 세풍에 탁마되어 이처럼 둥근 몽돌이 되었으리라.
격류를 타고 흘러온 시간들,
물 밖을 그리며 강바닥에서 잠든 세월은 얼마였을까.
풍우에 뭉개지고 짓이겨지면서 숱한 각들을 버리고 이렇게 둥근 몽돌이 되기까지
또 얼마나 많은 상처를 안으로 삭이며 인고의 시간을 살았을까.
손바닥에 올려 진 돌을 가만히 내려다본다.
참 과묵하다.
회색빛 문양이 선맥(仙脈)처럼 아득하다.
절절함도 아쉬움도 없는 마치 벽관에 돌아앉아 묵언하는 선승의 모습처럼 비정하고
초연하다.
귀는 있되 말이 없다.
바람소리 물소리 어느 먼 하늘 밑을 흐르던 운석의 소리까지 다 알아채고도,
끝내 시치미를 뚝 떼고 한 마디도 내뱉지 않는다.
모서리들이 떨어져나가고 다시 상처가 아물던 긴 세월 동안 허공으로 튕겨 오르던
수많은 생각들,
그 생채기들을 온전히 제 속으로 들여앉혀 마침내 야무진 입 하나 품은 것일까.
여전히 돌은 말이 없는데,
단단하게 결속된 돌의 심층 속으로 내 온갖 잡다한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스쳐간다.
내 안에 모난 돌 아직 많아서일까.
미쳐 털어내지 못한 삶의 예각들이 아까부터 명치끝을 뭉긋이 짓누른다.
한 무리의 새들이 강 상류를 거슬러 오른다.
저 새들은 강물의 속살에 수없이 많은 상처를 새기지만,
강물은 상처로 여기지 않는 듯하다.
천연덕스럽게 열 두 폭 새파란 가슴을 열어 놓고 만상의 사물들을 궁굴려 간다.
각진 둔덕들을 보듬으며 숱한 지류를 하나로 모아간다.
둥근 산 둥근 집들을 제 속으로 품어 안고 무장무장 바다로 흘러간다.
물결이 몽돌을 다스리던 장구한 시간에 누워 강물은 저렇게 제 몸 뒤척이며 흐르고
또 흐른다.
애초에 지향점이 낮으니 굽어 흐를 줄 알고,
결이 부드러우니 큰 바위도 능히 따라간다.
강물이 직각으로 꺾이지 않고 곡선으로 에둘러 가는 이유를 이쯤에서야 짐작해 본다.
돌은 여전히 묵언 중이다.
‘나의 과거를 탐문하려 들지 마라.
그냥 물 따라 바람 따라 흘러왔을 뿐이니,
흐르다 보면 이렇게 둥글어지기도 할 것이니,
종국에는 바람처럼 흩어지기도 할 것이니……,’
천년의 시간을 쪼아 만든 금강경이 마치 결가부좌를 틀고 한 말씀 하시는 것만 같다.
그럴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이 돌도 자갈이 되고 모래가 되고 마침내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풍진의 세월을 떠돌다가 다시 바위의 역사를 쓸 것이다.
순류(順流)처럼, 그렇게 티끌 같은 나의 삶도 언젠가는 풍진으로 돌아가 먼 훗날엔
바위의 시간에 의탁할 것이다.
그렇게 둥글어지기도 할 것이다.
가을바람 소슬히 불어 어느덧 한 잎 더 붉어지는 나이에 와 있다.
짧았던 봄밤도 삶의 격류에 휩쓸리던 여름도 지나갔다.
스물이나 서른 즈음의 패기도 강물처럼 흘러갔다.
격렬하고 완강하던 시간이 떠난 자리에 어느새 순한 햇살이 내린다.
흐르는 강물에 생각을 맡기니 나뭇잎에 이는 바람소리도 들리고,
한 뼘 땅도 과분하다고 하늘로만 귀 열어 둔 나무들의 청정한 마음도 보인다.
갈수기에도 좀체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묵묵히 흘러가는 저 깊고 유려한 강심에서
어머니의 마음도 읽힌다.
하 세월 강바닥을 구르며 제 몸피를 닦고 있을 돌의 안부도 궁금해진다.
사는 게 그런가 싶기도 해 발걸음이 자꾸만 강심으로 기우는 해거름,
하나 둘 각을 버리니 거슬릴 것 없어 오히려 반짝 빛나는 몽돌,
그 둥근 말씀 하나 가만히 품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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