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라는 괴물 / 이신구
여행 후 발등이 부어 20일을 방구들을 등지고 천장을 보며 지냈다.
왼쪽 발등에 이유를 모르는 염증이 생기고 부었으니,
발을 높이 쳐들고 밤낮 없이 누워있었다.
걷거나 서 있을 생각을 하지 말라는 의사선생님의 말씀에 옴싹달싹을 못하고 지냈다.
그 옛날 등잔불 밑에서 책을 읽으려면 가끔 천정에서 우르릉 쾅쾅 쥐들의 운동회가 열렸다.
하도 시끄러워 막대기로 툭툭 치다보면 서생원(쥐) 오줌에 젖은 천정이 뚫리기도 했다.
어쩌다가 달리기 시합을 하던 서생원들이, 앉아있는 나의 목덜미로 툭 떨어져 기겁을 한 기억이 떠오른다.
어느 날엔 천정을 물끄러미 쳐다보노라면 바둑판이 그려져 있고,
어느 땐가는 당구대가 되어 당구공이 이리저리 둥글어다니기도 했다.
우리 몸이 어디든 불편하면 마찬가지련만,
발등이 부은 작은 아픔이 나를 이렇게 꼼짝 못하게 묶어 놓을 줄은 미처 몰랐다.
여행 후 생긴 이 증상은 병원에 따라 다른 진단을 내려 어리둥절하게 했고,
여러 병원을 기웃대게 했다.
외과에 가보니, 여행 중 발을 혹사했다면서 신발타령과 양말타령을 하더니,
염증관계를 들어 주저리주저리 주사약을 매달아 놓고 염증 제거를 위해 일주일 내내 혈관주사를 꽂아 놓았다.
염증이 좀 가라앉자 퇴원했는데, 그래도 그 부기는 가라않지 않아 이웃 내과를 찾았다.
내과에서는 피로누적에서 온 현상이거나, 간 기능이 좋지 않은 것 같다고,
혈액검사를 하여 약을 먹고, 추이를 살펴보자더니 검사결과가 명확치 않다며 감염내과 진료를 권했다.
감염내과에서 또 혈액검사 X선검사를 하고, 복약을 권하더니 며칠 있다가 고개를 갸윳하며 신장 내과로 넘겼다.
신장내과에서는 신부전증을 염려하며 투석운운 했다.
그렇지 않아도 오그라든 마음에 근심 걱정이 쌓였다.
혈액검사는 가는 곳마다 다시 한 뒤 무조건 이상없다면서 피부과로 가보면 어떠냐고 했다.
가는 곳마다 피를 뽑으니 차라리 헌혈을 했으면 마음이라도 후련하련만,
피부과에서는 무좀 탓을 하며 근본적으로 무좀치료를 권하여 며칠간 무좀치료를 한 뒤에도 발등의 부기는 남았다.
한의원으로 가볼까 하여 친구 아들의 한의원을 찾았다.
가는 곳마다 환자는 넘쳐나는데, 여기는 시골 노인들이 많이 찾는 것 같았다.
발등 부은 것 때문에 외과, 내과, 감염내과, 신장내과, 피부과, 한의원, 통증의학과 등,
3개월에 걸쳐 찾아다닌 병원 만해도 종합병원급으로 순회를 했다.
그러나 지금도 발등은 따귀 맞은 볼따구니같이 뾰루퉁하면서 볼록하다.
아직도 시원히 원인은 찾지 못한 채, 여기저기 병원을 떠돌다 보니,
몸도 마음도 약한 환자들에게 의사선생님들은 존댓말을 잊은 지 오래였다.
병상에 누워 생각해 보았다.
인간 수명이 점점 늘어난다는데, 만약 사람이 죽지 않고 300-500년간 산다면?
정말 한심할 일이 많을 것 같다.
좋은 일보다는 어려운 일이 엄청 많으리라.
세상사에는 선악이 상존하는데 기쁨은 잠시요, 상처는 오래간다고 한다.
곰곰 생각해 보자.
그동안 먹고 살기위해 해야 할 일에 염증을 낼 테고,
기쁨보다는 복잡한 일을 더 많이 겪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 저기 병원을 찾다보니 인생과 세월에 대한 공부도 많이 하게 되었다.
병원을 섭렵하다 보니 참 오랜만에 반가운 얼굴도 만났다.
그런데 한결같이 반가워하기는 커녕 인상을 찌푸리며 얼굴을 외면하려 했다.
병원이란 그런 곳이다.
젊은 시절 가장 아름답고 날씬하며 지성이 넘친다고 칭송받던 여자 선배를 엘리베이터 속에서 뵈었는데,
그 선배의 미모를 닮은 딸인 듯한 분이 휠체어로 모시고 올라가고 있었다.
그런데 어찌 그렇게 쭈글쭈글하고 깡 마르며 주름투성이던지 한참 후에야 알아보았다.
축 쳐진 눈으로 나를 알아보았는지 힘없이 눈인사만 하고 헤어졌다.
그런 나는 어떤 모습으로 보였을까?
학창시절 친구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먹깨나 쓰고 우리를 쩔쩔매게 했던 용철이는 유치장에서 객사했고,
돈 많고 부유하여 허세를 부리던 철민이는 고물상 리어커를 끌며 산다.
재능과 학식이 뛰어나 박사학위를 몇 개씩 받았다는 최 박사는 요절하지 않았던가.
이것이 부러움의 끝인가?
늙음과 병마는 어쩔 수 없는 것,
그래서 여자 동창들이 모임에 하나둘 안 나오더니 이젠 얼굴도 비치지 않는 까닭을 알 만했다.
그 옛날 늠름한 대장부들을 해골 같은 노인으로 만들어 놓고,
절세가인을 쭈구렁 할망구로 만들어 놓은 것이 누구인가?
세월! 그렇다.
세월이라는 바로 그 괴물이다.
2012. 07. 25. / 전주안골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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