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커피 / 정근식.
나는 출근을 하면 습관적으로 밀크커피를 마신다.
밀크커피와 인연은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였으니 한 이십년 쯤 된 셈이다.
오랜 습관 탓에 요즘은 설탕이 들어가 달콤하고 크림이 진한 커피 맛을 희석시킨 자판기 밀크커피가
몸에 맞춘 양복처럼 내 입맛에 꼭 맞다.
그런데 오늘은 자판기를 잘못 눌렀다.
오랜만에 걸려온 고향 친구와 전화를 받으며 블랙커피를 눌렀던 모양이다.
커피를 입에 대니 가공되지 않은 특유한 쓴맛이 다소 낯설다.
단맛도 텁텁한 느낌도 없다.
나는 다시 뽑을까 망설이다가 블랙커피를 입으로 가져갔다.
커피를 천천히 한 모금 삼킨다.
커피는 목을 타고 입속에서 사라졌지만 쓴 향기가 입안에 가득하다.
설탕도 크림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블랙커피의 쓴 향기.
문득,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어린 시절 고향 친구를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처음 블랙커피를 마신 건 철부지 어린 시절이었다.
커피의 존재조차 몰랐던 초등학교 저학년 때였다.
어느 날 아버지는 오일장에서 낯선 먹을거리를 사오셨다.
고급유리병에 갈색 알갱이가 소복이 담겨 있었다.
아버지는 무엇인지 말씀을 하지 않으셨지만,
선반 위에 올려 둔 것으로 보아 분명 귀하고 맛있는 것이라고 짐작을 했었다.
그 무렵, 평소 단짝 친구가 우리 집에 놀러왔다.
한 마을에 살지만 우리 집에서 제법 떨어진 곳에 사는 친구였다.
당시 우리 집 근처에는 내 또래가 없어 나는 친구 집 근처에서 자주 놀았다.
그러다가 날이 저물면 친구 손에 이끌려 저녁을 얻어먹고 밤이 늦도록 놀기도 했었다.
그때마다 친구에게 고마움을 느꼈지만 고맙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하지 못했다.
오랜만에 온 그 친구에게 무엇인가 대접을 하고 싶었다.
친구에게 받은 고마움을 보답하고 싶었다.
광에 들어가 친구에게 줄 만한 것을 찾았다.
그 흔한 곶감 하나도 없었다.
친구에게 마땅히 내 놓을 것이 없었다.
그러다가 며칠 전 아버지가 사 오셨던 것이 떠올랐다.
그것은 선반 제일 위에 있었다.
작은 내 키로는 도저히 내릴 수가 없었다.
친구를 데리고 선반 아래로 가서 엎드리게 했다.
나보다 덩치가 컸던 친구는 등이 평평하고 넓어 내가 딛고 올라가기에 충분히 넓고 높았다.
병뚜껑을 열자 갈색 알갱이가 빼곡하게 들어있었다.
부엌에서 가져온 큰 사발에 우물물을 담고 갈색알갱이를 넣은 뒤 숟가락으로 휘휘 저었다.
갈색알갱이는 찬물에 조금씩 녹으면서 진한 향기를 냈다.
낯선 향기가 우리의 코를 찌르자 우리는 사발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호기심이 가득했다.
서로 마주보며 싱긋 미소를 지으며 입맛까지 다셨다.
친구와 나는 사발을 들었다.
그리고는 마을 회관에서 어른들이 막걸리를 마시는 모습처럼 사발을 부딪치고 마시기 시작했다.
달콤하리라고 여겼던 진한 블랙커피는 나는 몇 모금을 마시지 못했다.
쓴맛에 이내 사발을 내려놓고 말았다.
친구에게 신세진 것을 조금이라도 갚아 보려했던 것이 이렇게 쓸 줄 몰랐다.
그런데 친구는 내가 준 진한 블랙커피를 꿀꺽꿀꺽 모두 마시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맛있다는 듯 나에게 엷은 미소까지 지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빛에서 쓴맛을 애써 참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 일이 있은 뒤 우리는 더욱 친해졌으며 서로 사회생활을 시작할 때까지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아무런 조건 없이 도와주기도 했고 도움을 받기도 했었다.
그렇게 친했던 그 친구를 직장생활을 하면서부터 자주 만나지 못했다.
고향 계모임이나 명절 때 가끔 얼굴을 보는 것이 전부였다.
서로 관심은 있어 만나기만 하면 언제 대구에서 만나자고 약속은 했지만 늘 근성이었다.
그런 탓에 십여 년 동안 같은 지역에 살면서 아직 개별적으로는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오늘 사무실에서 우연히 마시게 된 블랙커피에서 문득 오래 전 쓴 블랙커피를 마시면서도 웃어주던
순수한 친구의 모습이 겹쳐진다.
때 묻지 않은 순수한 모습이다.
여러 종류의 커피가 서로 우열이 있는 것이 아니듯 친구도 마찬가지다.
살아가면서 만나는 친구는 커피처럼 각기 고유한 매력과 특성을 가지고 있다.
직장이나 사회친구는 이해관계가 섞인 것처럼 설탕과 크림이 적당히 섞인 밀크커피를 닮았고,
학교친구나 교회친구는 순수함이 다소 남아 있는 크림이나 설탕커피를 닮았고,
어린 시절 만났던 고향 친구나 첫사랑은 티가 없이 맑은 블랙커피를 닮았다.
블랙커피보다 밀크커피를 많이 마시듯,
내 삶에서 순수한 친구보다 이해관계에 얽힌 직장이나 사회 친구가 더 많다.
그 친구들은 내 삶을 변화를 줄 수 있는 중요한 존재지만,
가끔은 이해관계에 따라 변질되는 모습을 보곤 한다.
며칠 전에도 몇 년 동안 가까이 지냈던 직장 친구가 경쟁관계가 되면서 서먹한 관계가 되었다.
처음 만난 직장동료보다도 불편한 관계가 된 것이다.
이해관계에 따라 변해가는 그런 모습을 볼 때면 순수한 블랙커피 같은 그 친구가 그립다.
내가 친구를 커피로 나누듯 나는 친구에게 어떤 커피로 다가가는 것일까 생각해 본다.
밀크커피일까. 설탕커피일까 아니면 블랙커피일까.
한 가지 커피로 다가가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이에게는 밀크커피로, 어떤 이에게는 설탕커피로,
또 어떤 이에게 크림커피나 블랙커피로 다가갈 것이다.
비록 내가 다른 많은 종류의 커피로 느껴져도 좋지만,
오늘 같이 오래된 직장동료가 낯설어 보이는 날에는 사람 냄새 진한 순수한 블랙커피가 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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