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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文 學/隨筆 .

'느림보 산행' / 이윤애

아즈방 2023. 5. 27. 22:30

 

느림보 산행

 

우리 부부는 시간이 날 때마다 둘이 산에 다니기를 참 좋아한다.

물론 처음에 우리 부부가 산행을 시작할 때, 참 웃지 못 할 일들이 많았다.

우선 내가 그렇게 걷기를 좋아하는 편이 아니고, 

특히 산에 가는 일 따위는 아예 남의 일처럼 생각하는 게으름뱅이였기 때문이다.

 

"죽어라고 땀 빼고, 힘쓰고, 애쓰며 산에 올라갔다. 

 그럼 거기서 살 것이지 또 죽어라고 땀 빼고, 힘쓰고, 애쓰면서 내려올 것인데, 

 무슨 산을 정복한다고 야단법석을 치는 것인지, 그 놈의 산, 산, 산 ...

 말도 말라, 산은 산일뿐이다. 

 인간들에게 쉽사리 정복당할 것이라면 그렇게 턱 버티고 있겠냐.

 산은 산일 뿐, 산을 정복하려고 하는 것은 인간들의 억지와 욕심에 불과하다"는 등, 

괴변까지 늘어놓으며 산에 오르기를 좋아하는 남편의 발목을 잡았다.

 

그런데 유행처럼 등산이 건강에 최고라고 하는 이야기들이 떠돌기 시작했다.

매스컴의 위력에 탄력을 얻은 많은 사람들이 산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후, 

드디어 원래 산에 오르기를 좋아했던 남편에게도 등산 팀을 만들자고 하는 권유가

들어온 모양이다.

아예 이런 일에 시큰둥하는 나였지만, 반 강제로 등산용구를 준비하게 되었고, 

유명한 등산 팀에 끼게 되었다.

남편의 이런 저런 회유로 자신 없다고 앙탈하면서도 드디어 등산팀에 끼기는 했지만,

몇 번의 산행 후, 우리 부부는 용감하게 이 팀에서 탈퇴를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내가 그들과의 산행에서 걸음 속도를 잘 맞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체면이 구겨질 대로 구겨졌겠지만 남편은 그래도 내 편을 들어주었다.

"걱정 마, 나도 당신하고 같이 아니면 산에 안 갈께.

 그러나 저러나 그렇게 걸음을 못 걸어서 큰일이다.

 가까운 운동장부터 돌자.

 평발도 아닌데 어쩌면 그렇게 못 걸을 수 있을까?

 당신 같은 사람이 남자로 태어났더라면 군대 가서 정말 고생 많이 했겠다."

 

비아냥거림인지 아니면 진심으로 나를 위하는 말인지는 몰라도,

아무튼 남편의 절대지지를 받으며 우리 부부는 집단에 끼어서 같이하는 산행이 아닌,

둘만의 산행을 즐겨하게 되었다.

내 속도에 맞추어서 같이 산길을 걸어 줄 사람은 남편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 후다.

시간이 날 때마다, 웬만한 국내의 산들은 둘이서 다 돌아다닌 셈이다.

그런데도 내 걸음에는 속도가 붙지 않는다.

때로는 걷기에 자신 있는 남편이 내 느린 걸음에 지독한 답답증을 느끼면,

혼자서 빨리 앞장서 걷는다.

그래도 나는 내 걸음 속도대로 유유하게 나의 길을 걷는다.

내가 안 가고 있으면 가다 어느 지점에서 기다리겠지.

이렇게 인내심이 길러진 우리 부부의 산행에는 이의가 없다.

걸음이 느린 아내를 기다려주는 일도,

나만 놔두고 빨리 걸어가는 남편의 일도,

우리는 피차 협상되어 있기 때문에 불평하지 않는다.

어찌보면 남편의 입장에서 속 터져 죽을만한 일이겠지만,

형편없이 느린 걸음으로 올라가도 남편이 가고자 하는 정상까지 꼭 같이 간다

그리고 그 산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느낀다.

 

나 같은 사람은 등산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그냥 산에 가는 것이 좋을 뿐이다.

산길을 걷고 있으면 여유가 저절로 생긴다.

깊은 산속에서 풍겨 나오는 오묘한 냄새,

무서울 정도로 소리가 없는 조용한 분위기,

알 수 없는 소리들,

산길에서 느껴지는 한가로움,

높은 산에 올라서 느끼게 되는 인간적 만족감,

그리고 그 산 아래에 펼쳐져 있는 세상에 대한 염려를 다 잊을 수 있어서 좋다.

때론 산에서 만난 낯선 사람들과 반가운 인사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과 속도를 절대 같이 하지 않는다.

내 걸음 속도가 있기 때문에 그냥 길을 비켜주며 가게 한다.

 

남편과 둘이서 이렇게 산에 다니면서 얻은 큰 교훈이 있다.

그것은 산다고 하는 것이 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느리고 빠름의 차이일 뿐,

목적을 이루는 일은 마침내 한 가지라는 사실이다.

 

부부란 삶의 목적을 같이 해서 한 길을 같이 가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같이 목적을 향해서 살아가야 할 사람들인데,

어느 한 쪽이 일방적인 경우가 참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잘 안 되는 사람을 채근해서 내 속도에 맞추라고 하면 싸울 수밖에 없다.

 

내가 잘 하는 것을 상대가 잘 못한다고 해서 나무람만 한다면 싸울 수밖에 없다

부부 뿐만이 아니고,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는 함께 가는 길에서,

느리고 빠름의 문제를 서로 인정 해 줄 필요가 있다.

너와 나와의 다름이 인정될 때,

아름다운 세상, 행복한 세상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