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샷, 추가하기 / 이상수.
비어버린 잔이 아쉬워 샷을 추가한다.
첫 잔은 나른한 오후를 깨우느라 허겁지겁 마셔버렸다.
급한 갈증이 가시고 나니 한결 여유가 생겨 그제야 가만히 향을 맡는다.
나르시스처럼 에스프레소에 빨려 들어간다.
커피를 추출할 때 마치 총구에 달린 레버를 당기는 것과 흡사하다고 샷이라 부른다.
한 잔의 에스프레소를 만들기 위해서 한 번을 당기므로 1샷이 되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싱글, 이탈리아에서는 솔로라 한다.
커피는 동아프리카에서 처음 발견된 이래로 중동지역을 통해 유럽에 전래 되었다.
'빈 포위전'에서 패배한 무슬림 군대가 수 톤에 달하는 커피콩을 남겨둔 채 도주하자,
주민들이 그 콩을 이용해 번창하는 사업을 만들어냈다고 한다.
예멘에서는 종교인들이 각성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중동지역에서는 질병을 치료하는 약으로 쓰이다가,
영국에서 처음 음료로 자리 잡았다.
대학 도서관의 커피자판기는 졸업할 때까지 단골카페였다.
희붐한 새벽, 기숙사를 나와 도서관에 자리를 잡고 나면 맑은 정신을 위하여 첫 잔을 빼들었다.
두 번째 잔은 강의가 시작될 때쯤 찾아왔다.
친구의 초록색 투피스 자락을 따라 밖으로 나가면 아련하게 커피 향이 풍겼다.
하루의 강의가 모두 끝나면 인문관 옆 잔디밭에 앉아 쓰린 속에 마지막 잔을 털어 넣었다.
달콤하고 쌉싸름한 블랙은 불확실한 미래를 살아가던 청춘에겐 희망의 샷이었다.
윙~~ 콩 가는 소리가 들린다.
바리스타는 포터필터에 가루를 채우고 꼭꼭 다져 커피를 내릴 것이다.
알싸한 향을 따라 주문한 커피가 나왔다.
잔이 두껍고 굽이 있는 이유는 온도를 유지하고 바닥의 한기를 막기 위해서다.
사람들은 대체로 에스프레소를 기본으로,
우유를 넣은 카페라테,
코코아를 추가한 카페모카,
아이스크림을 섞은 아포가토를 즐겨 먹는다.
바흐의 '커피 칸타타'가 흘러나온다.
플루트의 경쾌한 음색이 흐르는, 커피에 관한 짧은 성악곡쯤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가사엔 커피에 중독될 것을 염려한 아버지가 그만 마시라 말리고,
딸은 수천 번 입맞춤이나 달콤한 와인보다 부드럽다며 더 마시겠다고 실랑이한다.
1732년 당시, 유럽에서 커피가 크게 유행하자 의사들은 불임이 되거나 얼굴빛이 검게 변한다며,
여성은 못 마시게 했다.
볼테르와 루소를 빼고 커피를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그들은 하루에 적어도 50~100잔을 마셨고,
마시는 양이 늘어날 때마다 위대한 저술과 사상은 이루어졌다.
루소는 집 근처에서 커피를 볶을 때면 서둘러 창문을 열어 그 향기를 모두 받아들였다고 한다.
눈을 감을 땐 더는 커피 잔을 들 수 없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베토벤이 정확히 60개의 알갱이를 세어 커피 한 잔을 만든 것도,
어쩌면 그의 독특한 음악과 맞닿아 있다 하겠다.
설탕 스틱을 집어 잔에 넣고 잘 젓는다.
이내 쫀득한 액체가 만들어진다.
어릴 때 자주 해 먹던 쪽자처럼.
향을 음미하며 한 스푼을 입에 머금는다.
쌉싸름하던 첫맛이 갈수록 달콤해진다.
'세상 끝에서 커피 한잔'이라는 영화가 있다.
주인공은 어릴 때 헤어졌던 아버지가 8년 전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땅끝마을로 내려온다.
낡은 보트 창고를 개조해 카페로 만들고 커피콩을 볶으며 그를 기다리지만,
결국 살아서 돌아오지 못한다.
고향을 떠나 잠시 방황하던 딸은 다시 돌아와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
문 앞에 해가 비스듬히 드러눕는 시간, 서너 명의 손님이 들어온다.
한껏 치장한 중년 여인들이다.
아이들은 다 크고 특별히 챙겨야 할 식구가 없어 그런지 여유로워 보인다.
옆 테이블에 앉아 여행이나, 그림그리기, 주식투자에 대해 마치 계주하듯 이어나간다.
저들은 지금 엄마와 아내라는 베이스에 자신이라는 샷을 추가하는 중이리라.
어느덧, 젊음의 열정은 내게서 빠져나가고 이제 현실과 적당히 타협하며 지내는 중년이 되었다.
권태와 나른한 나르시즘과 무의미한 일상이 계속되던 중, 커피를 만났다.
어느 날 갑자기 글쓰기를 만난 것처럼.
타고난 홈루덴스족인 나는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다.
가끔 외출하여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도 한다.
아침에 눈을 뜨면 책을 읽고 틈틈이 글을 쓰려 애쓴다.
내게 있어 글쓰기는 생두를 볶아 특유의 향을 추출하는 일과 비슷하다.
93도의 물로 30초 동안 30mL를 내리는 에스프레소.
버튼만 누르면 같은 맛이 나오는 게 아니라 원두의 상태와 로스팅, 알갱이의 굵기에 따라 달라진다.
이제 막 내 삶에 추가한 글쓰기도 까다로운 과정을 거쳐 그윽한 향을 내면 좋겠다.
창밖으로 바다가 출렁인다.
백사장은 푸른 바닷물을 가득 채워놓은 커다란 잔 같다.
여름이 떠난 가을 모래사장 위에 갈매기가 내려와 앉는다.
반쯤 남은 잔에 갈매기 울음과 파도소리가 추가된다.
혼자 마시는 오후 4시의 커피는 나를 업(up)시키는 매혹의 샷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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