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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아즈방의 이런 저런 여러가지 관심사 창고

🤍 濟州道 1015

한라산국립공원(漢拏山 國立公園)

漢拏山 國立公園 한라산(漢拏山)은 백두산, 금강산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영산으로 꼽힌다. 한라산은 해발 1,950m로 남한 최고봉이면서도 사람들을 가까이하여 친숙함을 느끼게 하는 산이다. 漢拏山의 漢은 '은하수'라는 뜻이고, 拏는 '끌어 당기다, 붙잡다' 의 뜻이다. 그러므로 漢拏山은 "은하수를 붙잡을 수 있을 정도로 높은 산" 이라는 뜻이 된다. 옛날에는 부악(釜岳), 원산(圓山), 진산(鎭山), 선산(仙山), 두무악(頭無岳), 영주산(瀛洲山), 부라산(浮羅山), 혈망봉(穴望峰), 여장군(女將軍) 등으로 불리었다. 한라산은 삼신산(三神山) 중의 하나로 한반도의 최남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한에서 가장 높다. 또 다양한 식생분포를 이뤄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은 동.식물의 보고(寶庫)로서, 1966년 10..

국토의 상징 한라산

[개설] 한라산(1,950m)은 남한 최고봉으로 백두산과 더불어 국토를 잇는 상징적인 산이다. 한라산은 예부터 삼신산의 하나인 영주산으로 백록을 탄 신선이 사는 영산이라 알려져 왔고, 불로초를 찾아 영주산을 찾았다는 서불의 전설이 깃들어 있다. 또한 한라산의 여신 설문대할망이 솥에 빠져 죽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는, 제주인의 풍부한 상상력과 영감의 보고이다. 또한 한라산은 세계 최대의 기생 화산을 거느린 산으로 360여 개의 자화산을 거느리고 있다. 그 기슭에는 2,000종에 이르는 한대·온대·아열대 식물과 3,000여 종의 곤충과 동물이 서식하고 있다. 이와 같은 지질·생태·경관적 가치로 인해 2003년에는 유네스코에 의해 생물권보존 핵심지역으로 지정 되었을만큼 생태적 가치가 높은 산이기도 하다. [사라..

한라산 최고봉의 이름은 '혈망봉(穴望峰)'

'한라산총서'(2006 발행) 中 '한라산 이야기' 한라산 최고봉의 이름은 '혈망봉(穴望峰)' 백록담은 한라산의 최고봉인가? 물론 아니다. 천지(天池)가 백두산의 최고 지점이 아니듯이 백록담도 그렇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종종 백록담을 한라산 정상인 것처럼 표현한다. 이는 정상을 일컫는 마땅한 이름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산을 자주 찾는 산악인들이나 학자, 그리고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한라산의 최고봉을 뜻하는 봉우리 이름을 고문헌에서 찾거나, 그게 없다면 도민들의 중지를 모아 새로 지어야 하는 게 아니냐는 논의가 오래 전부터 있어 왔다. 사실 명산이라 일컷는 산 중에 최고봉의 이름이 없는 산은 찾아보기 힘들다. 외국의 산들은 차치하고라도 백두산의 장군봉, 설악산의 대청봉, 지리산의 천왕봉처럼 이름을 날리는..

100 년전 제주의 모습

1890년대 제주시 관덕정 모습 제주시 관덕정의 1890년대 모습이다. 지붕 위의 풀들, 기왓장의 흩어져있는 모습, 왕조 말기의 쇠락이 그대로 실감된다. 오른 편에 긴 석주의 누각이 포정사(종루)이고 그 옆에 안내판인 듯한 작은 시설물이 두 개, 담벼락은 바로 전에 양희를 칠한 모습이다. 지금의 관덕정 광장은 돌을 박은 구획이 완연하다. 쇠털 벙거지에 흰 두루마기 차림의 남자, 흰 치마 적삼에 수건을 쓰고 있는 여자가 이무렵의 생활상을 말해주고 있다. 제주측우소 언덕에서 본 제주읍전경 지금의 제주측후소 쪽 언덕에서 내려다 본 일제시 제주읍의 전경이다. 자세히 보면 큰길 가의 집들부터 기와나 함석으로 지붕이 바뀌고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길가에 드문드문 전봇대, 멀리 끝부분에 해안과 수평선이 보인다...

제주 옛모습 -

제주 주둔 일본군 무장해제 해방 직후인 1945년 10월 제주에 진주한 미군이 일본군 제58군의 탱크 등을 무장해제 하고 있다. 지프 탄 이승만 대통령 1952년 여름 산방산이 보이는 모슬포 부근에서 이승만 대통령(오른쪽 앞자리)이 군 지프를 탄 채 지역 노인의 인사를 받고 있다. 외화벌이 꿩 사냥 1960년대 제주에서 열린 국제수렵대회에 참가한 일본 관광객들이 총을 들고 제주의 산간지역으로 향하고 있다. 수렵대회는 한때 외화벌이의 중요한 수단이었다.

제주 옛모습 -해녀

물질가는 옛 제주 해녀들. 고 김홍인 선생이 1950~1970년대 촬영한 물질 가는 해녀들의 모습. 물질 준비하는 해녀들 물질 나가는 수백명의 해녀들 ‘소중의’를 입은 수백여명의 해녀들이 태왁을 껴안고 짙푸른 바다로 물질을 나가고 있다. 물질 끝내고 나오는 해녀 해녀들이 물질 작업을 모두 마치고 각자가 채취한 해산물을 뭍으로 끌어올려 져 나르고 있다.

漢拏山 개요

개요 높이 1,950m. 남한에서 가장 높은 산. 漢拏山이라는 이름은 산이 높아 산정에 서면 은하수를 잡아 당길 수 있다는 뜻이며, 예 부터 영주산(瀛州山), 부라산(浮羅山), 혈망봉(穴望峰), 여장군 등으로도 불려왔다. 동국여지승람 에는 1002, 1007년에 분화했다는 기록과 1455, 1670년에 지진이 발생하여 큰 피해가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한라산 정상에는 지름이 약 500m에 이르는 화구호인 백록담이 있으며, 360여 개의 측화산, 해안지대의 폭포와 주상절리, 동굴과 같은 화산지형 등 다양한 지형경관이 발달했다. 자연환경 제주도의 윤곽과 한라산의 형태는 신생대 제3기 플라이오세에 화산활동이 시작된 이후 제4기에 이르는 수많은 용암 분출로 이루어졌다. 제3기말에 화산활동이 있었다는 것은 ..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제주 4.3사건 제주 4.3사건은 일본패망 후 한반도를 통치한 미군정체재의 사회문제와 남한 단독 정부수립에 반대하여 1948년 4월 3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일어난 민중항쟁으로, 미군정과 군정관리들이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는 과정에서 많은 주민이 억울하게 희생당한 사건이다.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에 따르면, 제주4·3사건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 당한 사건을 말한다. 당시 제주도는 광복 후 일본군이 철수하고 외지에 나가 있던 제주인 6만여 명이 귀환하였으나, 이들은 직업을 구하지 못하여 생업을 영위하기 어려운..

'순배기꽃 다 진 날에도' / 吳承哲

뙤미의 歷史는 우리 말하지 말게 친구여. 어느 바람결에 풀잎이 목숨 하나 얻었다 놓아 버리듯 할아버님, 할머님, 아버님이 이 땅의 바람과 물과 핏줄로 태어나서 살다가 묻힌 곳. 갯촌, 활싸움, 총싸움, 韓美蘇, 콩당당복닥..... 꿩코, 생이첫, 말총, 족제비코, 눈 쌓인 보리밭 이랑을 띄우던 풀물묻은 방패연 ..... 고불락, 막을락 ..... 망오름 봉수대에 피어오르던 불길. 간밤의 어지렁헌 꿈자리듯, 생교난리, 4.3사태가 배갯머리를 적시고, 초여름 깜부기 처럼 저 혼자 가슴이 까맣게 타버린 우리 삼촌들. 이제 그 가슴마다 새살이 돋아 나는데, 친구여, 뙤미의 歷史는 우리 말하지 말게. 상코지, 벌러니코지는 뭣 때문에 한바당까지 나왔는지 앞개는 밤에도 그리움 하나로 불밝힌 浦口. 남의 땅, 우리의 ..

里仁爲美

里仁 爲美 擇不處仁 焉得知 이인 위미 택불처인 언득지 인을 갖춘 마을에 사는 것이 아름답다. 그러므로 인한 마을을 택하여 살지 않으면 어찌 지혜롭다 하리요. * * * 인후한 마을에 사는 것이 좋으며, 그러한 곳을 택하여 살지 않으면 어찌 지혜롭다 하리요. 논어의 이인(里仁)편의 이야기. 이인위미(里仁爲美)를 주자(朱子)는, “마을에 있는 인후한 풍속이 아름답다”라고 해석하였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모이는 곳에 어진사람이 많고, 또한 어진모범의 인후한 풍속이 아름답기를 바라는 것이다 *** 사람은 환경에 영향를 많이 받게마련이다. 특히 자라나는 어린이나 청소년들에게 감화가 크다. 주거의 환경도 그렇지만 교우 관게도 중요하다. 맹자의 어머니가 어린아들의 좋은 환경을 위하여 세차례 이사헸다는 삼천지교(三遷之..

위미1리 설촌 유래

爲 美 里  * 위미1리 설촌 유래 위미리에 언제부터 사람이 들어와 살기 시작하였는가에 대한 사실은 그것을 입증할 만한 사료가 발견되지 않아서 그 정확한 연대를 밝혀 내기가 거의 불가능하다.그래서 비교적 객관성을 갖는다고 인정되는 구전자료에 의하여 설촌의 역사를 추정하고, 그 이후는 가문별 위미입도 선묘의 비문과 족보 등을 통하여 위미리 설촌의 역사를 밝혔다.위미리에 처음 들어와 살았던 사람은 지금부터 약400년 전 고좌수였다.고좌수는 상위미의 속칭 '큰 터왓'에 터를 정해 살았는데, 현재 이곳에는 당시의 사실을 입증하는 유물들이 많이 출토되고 있다.(오조리터의 토기와 유기 그릇의 파편들이 그것이다)그러나 고좌수의 후손들은 '좃벤 골총'의 전설에서 나오는 것처럼 절손되어 버림으로써, 현재 위미리와는 혈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