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효의 한라산이야기 - 41]
등산로변천사 (4)
사람 손에 만들어지고 훼손돼 버린 한라산
1950년대 후반 서북벽 등산 루트 개척
등산로 훼손 '가중'…지키고 보호해야
등산객들 선호하는 어리목코스
올해 들어 지난달까지 한라산국립공원을 찾은 탐방객수가 102만명을 넘어선 것으로 집계됐다.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의 96만5000명보다 5% 가량 증가한 수치다.
계절별로는 1월 12만3558명, 4월 10만1604명, 5월 13만5758명, 10월 14만8960명 등 4개월에 걸쳐 월 탐방객 10만명을 넘겼는데, 겨울철을 비롯해 진달래와 철쭉이 피는 봄, 그리고 단풍철에 많은 등산객이 몰렸음을 알 수 있다.
이는 2012년의 1월 11만4183명, 5월 14만80명, 10월 14만9825명과도 비슷하다.
등산로별로는 어리목이 35만1명으로 가장 많았고,
이어 성판악 38만1379명, 영실 22만3624명, 관음사 5만3134명, 돈내코 1만2080명 등의 순이었다.
결국 백록담을 목적으로 하는 등산객들은 대부분이 성판악코스를 이용했고,
어리목이나 영실코스의 경우는 골고루 몰리는데,
특히 어리목코스의 경우 수학여행단 등 단체 등산객이 많았다는 얘기다.
관음사코스 또한 정상까지 갈 수 있으나 성판악코스에 비해 상대적으로 험하기 때문에 등산보다는 하산코스로 이용하는 경향이 짙다.
영실코스도 크게 다르지 않은데, 탐방안내소까지만 버스운행이 가능하기 때문에,
여기에서부터 휴게소까지 1시간 가까이 걸어야 하는 부담감으로 인해 교통편이 편리한 어리목코스를 선호한다고 볼 수 있다.
한라산 등산의 비극
그렇다면 과거 한라산의 등산코스는 어떤 변화과정을 거쳤을까.
산악원로들의 이야기를 종합하면 1940년대 초반 상당수의 젊은이들이 일제의 징병을 피해 한라산으로 숨어들었다고 한다.
이들은 심지어 백록담까지 올라가 피신했는데,
일제의 패망직전 어승생악, 새미오름 등 한라산이 일본군들에 의해 군사기지화하면서 해방될 때까지는 더 이상 한라산에 갈 수가 없었다.
이후 해방된 조국에서의 한라산 등산은 비극으로 시작한다.
해방 후 산악단체의 한라산 첫 공식 등반은 1946년 2월26일부터 3월 18일까지 한국산악회가 국토구명사업으로 실시한 '제1회 한라산 학술등산대'였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적설기 등산으로는 좀 늦은 때였다는 지적이 제기되며,
47년 말부터 제대로 된 적설기 등산을 하자는 분위기가 산악회 내부에서 대두된다.
그리고는 48년 1월 본격적인 산행에 들어갔는데,
40년만의 폭풍설이 몰아쳐 1월 16일 귀중품과 식량만을 챙긴 채 급속하게 하산을 재촉해야만 했다.
그 과정에서 많은 눈이 쌓인 탐라계곡에서 등반대의 대장이었던 전 탁씨가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해방 후 우리나라에서 처음 발생한 산악조난사고다.
한라산의 비극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몇 달 뒤 제주 역사상 최대의 비극인 4·3사건이 발발, 한라산은 금족의 땅으로 변한다.
'해안선으로부터 5㎞ 이상 떨어진 중산간 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의 무리로 인정해 총살하겠다'는 무시무시한 포고문이 발표되며 한라산은 철저하게 고립된 것이다.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을 해제할 때까지 6년여에 걸쳐졌다.
그리고는 다시 한라산이 전면 개방됨에 따라 등산의 발길이 이어지는데,
그 시작이 같은 해 10월 5일 제주초급대학 학생들 120명 전원이 사각모를 쓰고 한라산을 오른 것이다.
당시 이들은 아흔아홉골과 어승생 사이로 올라, 큰두레왓을 거쳐 정상에 올라,
백록담 물을 떠다가 저녁밥을 지어 먹었다.
당시 산행에 참여했던 인사들의 기록에 의하면 아직도 산에 무장대가 남아 있을지 몰라 총을 든 이들도 동행했다고 한다.
이외에도 한라산 개방을 기념하는 등반대회가 기관, 직장, 단체별로 잇따라 열려
한라산 개방 후, 1955년 봄까지 전국 15개 산악회가 한라산을 등반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개척자들이 만든 서북벽 코스
4·3 직후 제주인의 한라산 산행은 식물학자인 부종휴를 비롯해 이기형, 고영일 등이 선두주자였다.
부종휴의 경우 1952년 가을을 기점으로 4·3사건이 누그러들자 당국의 허가를 받아 무장경관을 대동하고 한라산에 식물을 채집하러 다녔다.
1953년도에 부종휴와 함께 오른 현임종 씨의 기록을 보자.
부종휴가 한라산에서의 식물채집을 위해 당국으로부터 어렵사리 입산허가를 신청하자, 당국에서는 무장경관 3명이 호위하는 조건으로 허가한다.
3박 4일 일정으로 계획된 산행은 관덕정을 출발해 산천단에서 점심을 먹고 불타버린 관음사까지 이동, 1박을 하게 된다.
이어 둘째 날,
나대로 가지치기를 하며 산행에 나서 탐라계곡에서 점심을 먹고 개미등을 거쳐 용진각에 도착, 개울물에 목욕을 한 후 비박을 한다.
그리고는 셋째 날, 왕관능으로 올라 백록담에 도착하고,
이어 남벽으로 하산해 영실의 옛 절터에서 다시 1박한 후 다음날 서귀포 하원동으로 하산했다는 것이다.
당시의 영실코스는 지금의 등산로가 아닌 선작지왓 탑궤보다 영실의 동쪽 능선을 타고 내리는 코스다.
당시의 산행코스는 불타버린 관음사를 거쳐 용진각, 왕관릉, 정상으로 이어지는 지금의 관음사코스와 영실코스, 그리고 서귀포 방면의 남성대코스를 주로 이용했다.
훗날 많은 사람들이 백록담으로 오를 때 이용했던 서북벽의 경우 그 이후의 일이다.
서북벽은 조면암으로 이뤄진 바위덩어리가 급경사를 이룬 곳인데,
50년대 후반 당시 산에 다니던 산악인들이 이곳에 등산루트를 개척한 것이다.
이와 관련해 부종휴와 김종철이 징과 망치를 이용해 삼일동안 파서 발을 디딜 수 있도록 계단을 만들었다는 전설적인 이야기와 더불어, 현임종이 백록담에 갈 때마다 나대를 이용해 홈을 판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때 만들어진 서북벽코스는 이후 80년대 중반까지 백록담에 오르는 모든 사람들이 애용하던 등산코스다.
특히나 1973년 1100도로가 개통되자 어리목과 영실로의 접근이 쉬워져 모든 사람들이 이곳으로 몰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얼마나 등산객의 혼잡이 심했는지 1979년 5, 6월 중 휴일에는 서북벽코스를 이용함에 있어 시차제를 적용하기도 했다.
즉 서북벽을 정오까지는 등산만, 오후에는 하산만 가능토록 했던 것이다.
1973년 5월에는 서귀포산악회에 의해 돈내코 등산로가 개척되는데,
종전의 남성대 등산로가 길이 험한 까닭에 새로운 등산로를 개척한 것으로,
이에 따라 하산시간이 남성대의 5시간에서 3시간으로 2시간 단축된다고 소개되기도 했다.
훼손돼 금지된 등산코스
이 과정에서 1978년 1월, 제주도는 한라산 자연보호를 위해 백록담에서의 야영 및 집단행사를 금지시키는 한편, 5개 코스 이외의 입산행위를 단속하기 시작했고,
1979년 5월, 한라산 보호와 등산질서유지, 안전을 고려해 등산로 중 관음사와 돈내코 코스는 하산만 허용하기도 했다.
등산로 훼손이 가중되면서 1986년 5월에는 어리목과 영실코스의 윗세오름에서 서북벽을 거쳐 정상에 오르는 구간이 폐쇄되고 대신 남벽코스가 새로이 개설된다.
이에 따라 서북벽을 이용해 정상에 오르던 인파가 일시에 남벽으로 몰리며 이곳 또한 1994년 7월, 윗세오름-남벽정상마저 폐쇄되기에 이른다.
불과 6년 만의 일로 10년 앞도 내다보지 못했다는 비난이 이어지는 이유다.
우여곡절 끝에 성판악코스와 관음사코스를 이용한 백록담 등반을 전면 개방한 것은 2003년의 일이다.
한라산에서는 등반이 허용된 어리목과 영실, 관음사, 성판악, 돈내코코스 등 5개소 이외의 모든 지역은 출입제한 구역이다.
서북벽이나 남벽의 사례에서 보듯이 한번 훼손된 자연은 복원이 쉽지 않다.
아니 영영 되돌릴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함께 지키고 보호하고 지켜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글 : 강정효 / 사진작가 / 제민일보- 2013. 1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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