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pot of Jeju azbang

제주아즈방의 이런 저런 여러가지 관심사 창고

🤍 濟州道/漢拏山 .

[강정효의 한라산이야기 - 40] 한라산 상봉과 절정

아즈방 2023. 1. 7. 09:29

[강정효의 한라산이야기 - 40]

한라산 상봉과 절정

이름없는 한라산 정상…정확한 고증 통해 명명해야

백록담이란 이름외에 '절정'과 '상봉' 등으로 불려
혈망봉도 보편화된 이름 아닌 자료에 언급 됐을뿐

▲ 동릉에서 보는 백록담 전경. 맞은편인 서쪽이 정상이다.

한라산, 실제 정상은 어디인가
한라산 백록담에 오른 사람들이 의아해하는 게 있다.

한라산의 높이가 1950m라 알고 있는데, 팻말을 보니 1933m로 실제 정상은 어디인가 하는 것이다.

또 백록담이라 할 경우 분화구 안의 못을 지칭하는 것으로 한라산 정상을 따로 부르는 이름은 없는지를

묻는다.
 
먼저 백록담에 대해 소개한다면 화산 폭발로 만들어진 산정화구호다.

화구의 능선 둘레는 1.72㎞, 동서측 약 700m, 남북측 약 500m인 타원형 구조로,

그 넓이가 21㏊(6만 3000평)가 조금 넘는다.

1992년 한라산국립공원 관리사무소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분화구 바닥면의 해발고도가 1839m로 관측돼 화구호의 깊이는 최대 111m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백록담의 높이 1950m는 서쪽 정상의 높이이고,

현재 등산객들이 오르는 동릉은 이보다 17m 낮은 1933m이다.
 
옛 기록 속 정상 '절정' '상봉' 등
그렇다면 백록담이라는 이름 외에 정상부를 지칭하는 다른 이름은 없는 것일까.

한라산 등반기를 처음으로 남긴 임제의 기록을 보면 절정에 도착했다는 말로 정상에 올랐음을 알리고 있다.

이어 내릴 때는 상봉을 따라 내렸다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백록담이라는 이름이나 이외 별도의 이름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절정(絶頂), 상봉(上峰) 등으로 불렸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절정이란 산의 맨 꼭대기를, 상봉은 가장 높은 봉우리를 이르는 보통명사다.

이어 1601년 김상헌의 기록 역시 절정이라는 표현과 함께 백록담이라는 이름 대신,

그저 담(潭)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정상부에 대해서는 봉우리의 머리라는 의미로 봉두(峰頭) 또는 절정이라는 말로 대신하고 있다.

김상헌이 인용한 지지에도,

'봉우리의 꼭대기에 못이 있어 마치 물을 담은 그릇을 닮았기 때문에 두모악(豆毛岳)이라 불리게 됐다'는

설명으로 대신하고 있다.

어쩌면 정상의 모습을 설명한 두모악이라는 표현이 꼭대기에 어울리는 표현인지도 모를 일이다.
 
김치의 기록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정상에 오르고는 이름 대신 소위 상봉이라는 표현이 그것이다.

그리고는 절정의 꼭대기에 도착한 후 혈망봉(穴望峰)을 마주해 앉았다고 했다.

혈망봉과 관련해서는 봉우리에 하나의 구멍이 있는데,

이를 통해 바라볼 수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 소개하고 있다.

백록담이라는 이름은 이때 비로소 등장하는데,

세속에서 전해지기를 신선들이 하얀 사슴을 데려와 이곳에서 물을 먹였기 때문이라 설명하고 있다.
 
혈망봉과 백록담에 대해서는 이형상의 기록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된다.

즉 산봉우리에 구멍이 한 개 있으니 운천(雲天)을 엿볼 수 있다는 문장과 더불어,

깊이가 800척이나 되는데 그 아래 백록담이 있다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혈망봉이란 어느 부분을 말하는 것일까.

이원조의 탐라지 형승조에 의하면,

'혈망봉은 백록담 남변 봉우리에 있다.

 봉우리에는 한 구멍이 있어서 이를 통해 바라볼 수 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조금 동쪽에는 방암이 있는데 그 모양이 네모반듯해서 마치 사람이 깎아 만든 것 같다'

라는 설명이 있다.

당시 사람들은 대부분이 남벽을 통해 정상으로 오른 후 동능으로 이동했다.

한라산의 최고지점은 서쪽에 위치하지만 동쪽으로 향했던 것이다.

동능에만 수많은 마애명이 존재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절정에 오른 후 곧바로 혈망봉에 대한 언급이 있는 것으로 보아 남쪽 봉우리에 위치하고 있음을 가늠케

하는 부분이다.
 
백록담에 대한 이원조·최익현 기록
정상과 백록담을 동일시하는 표현은 이원조의 기록에서부터다.

이원조는 가마를 재촉해 백록담에 올랐다는 표현을 쓰고 있다.

더불어 백록담은 정상의 높은 곳에 있다는 설명까지 덧붙이고 있다.

하지만 정상의 봉우리를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실제와 다르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남쪽과 북쪽이 높고, 동쪽과 서쪽이 조금 낮다는 내용이다.

백록담에 오른 독자들은 알겠지만 한라산 정상 분화구는 서쪽이 가장 높고 그 다음 동쪽, 남쪽, 북쪽

순이다.
 
이원조와는 달리 최익현은 한라산의 최고 지점에 대해 정확히 짚고 있다.

서쪽의 최고 지점으로 향했는데, 이곳이 절정, 즉 정상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비로소 상봉이 보인다거나, 북쪽의 우묵한 곳에 당도해 굽어보니 상봉이라는 표현이 그것이다.

이렇게 보면 상봉이라 할 때는 백록담 좌우의 능선 전체를 아우르는 것이고,

백록담이라 할 때는 분화구 안의 못을 표현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최익현은 백록담의 북쪽으로 올라 분화구 안쪽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서쪽 정상 부분을 거쳐 남벽으로

내렸다.

서쪽의 정상에서,

'북쪽으로 1리쯤 떨어진 곳에 혈망봉과 옛 사람들의 각명이 있다지만 시간이 없어 가지 못했다'는 표현으로

볼 때 동능까지는 가지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럴 경우 동능의 분화구 안쪽 사면에 있는 최익현의 마애명은 뒷날 누군가가 대신 새긴 것이라 여겨진다.
 
최익현은 백록담 주변 지형의 특징을 상징적으로 말하고 있다.

즉 동대(東臺), 서정(西頂), 남애(南崖), 북암(北巖)이라는 표현이 그것이다.

해석하면 동대란 동릉의 평평한 모습을 이르는 말이고,

서정이란 제일 높은 곳인 서쪽 정상을,

남애란 남벽의 벼랑을,

북암이란 북쪽의 암벽 지대를 가리키는 것이다.

▲ 김정호의 동여도 중 백록담 부분. 백록담의 못과 그 주위로 혈망봉, 십성대, 거은굴, 삼수동 등의 지명이 보인다.

지도와 그림 속 백록담 묘사

한편 옛 지도와 그림들 중 백록담 주변의 지형을 비교적 소상하게 그린 작품들이 몇 점 있는데,

혈망봉이 등장하는 것으로는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들 수 있다.

1861년 제작된 대동여지도에는, 물이 고인 백록담과 더불어 그 북동쪽에 혈망봉, 북서쪽에 십성대를,

동쪽에는 거은굴, 서쪽에 삼수동을 각각 표시했다.

필사본인 동여도에도 마찬가지다.

이보다 앞서 1709년 제작된 탐라지도병서에는 동암과 서암이 나타나고 있는데,

동암과 서암은 1770년 호남의 실학자 위백규가 제작한 환영지의 탐라도라는 그림에 이어,

1899년의 제주군읍지에 수록된 제주지도에서도 등장한다.

동암과 서암에 대한 표기는 없지만, 18세기 제작된 제주삼읍도총지도에는 백록담 분화구와 더불어 서쪽

봉우리를 높게 그려 동쪽보다 서쪽이 높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림의 경우 백록담 주변을 보다 상세하게 표현하고 있는데,

대표적인 게 제주십경도, 제주도도, 윤제홍의 학산구구옹첩 등이다.

즉 19세기에 제작된 제주도도 백록담 그림에는 분화구안 백록담과 북쪽 능선에 구봉암과 한라산 후면

주봉을, 동북사면에 황사암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1844년 제작된 윤제홍의 학산구구옹첩 한라산도에는 분화구의 백록담과 북쪽에 한관봉,

구봉암을, 동쪽에는 조씨제명(조씨의 마애명)과 일관봉, 서쪽에 월관봉의 위치를 보여준다.
 
정확한 고증작업 필요해
한때 일부에서 한라산 정상의 이름을 별도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었다.

현재 부르고 있는 백록담이라는 이름이 정상을 지칭하는 것이 아닌 정상 분화구의 못을 말하는 것이기에

꼭대기를 부르는 이름이 있어야 할 것이 아니냐는 얘기다.

그리고는 그 대안으로 혈망봉이라 부르자고 제안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앞서 살펴보았듯이 혈망봉이라는 이름도 보편화된 이름은 아니다.

일부 자료에 언급되고 있을 뿐, 전체적으로 그렇게 불리지 않았다는 얘기다.
 
한라산 정상을 아우르는 이름을 부르자는 취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성급하게 추진해서도 안 된다.

정확한 고증작업과 도민사회의 공감대를 얻는 일이 우선되어야 한다.

글 : 강정효 / 사진작가 / 제민일보  2013. 11.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