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효의 한라산이야기 - 39]
한라산등반사(3)
한라산을 삶의 터전으로 살아간 제주 원주민
김희정씨, 1895년 한라산 산행 기록 남긴 최초의 제주인
소·말 다니던 길 사람들 발길 이어져 훗날 등산로로 개발
52세에 처음 오른 한라산
예전 한라산을 오른 산행기록 대부분이 제주사람이 아닌 외지인에 의한 기록이다.
조선시대의 경우 육지부에서 내려온 관리나 유배인들의 기록이고,
1900년대 들어온 이후에는 일본인을 비롯한 외국인과 각종 학술조사 명목으로 한라산을 찾은 이들이
기록으로 남겼다.
그렇다면 한라산을 삶의 터전으로 삼아 이 땅에 살아가는 제주사람들에 경우 한라산을 어떻게 올랐을까?
현재까지 알려진 한라산 산행기록을 남긴 제주인은 1895년의 김희정이다.
조천 출신으로 평생 후진양성에 매진했던 김희정은 그의 나이 52세에 처음으로 한라산을 오르게 된다.
제주도의 모든 사람들이 늘 한라산을 보면서 자랐듯이,
김희정 또한 창문을 열면 한눈에 들어오는 한라산의 풍광을 보면서 생활했다.
오죽했으면 지팡이를 짚고 나막신을 신어 산에 오르는 수고로움 없이도 방안에 앉아 책상 위의 물건을
움켜잡는 것이라 표현할 정도였다.
그의 산행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현재 기존에 알려진 등산코스가 아닌 새로운 코스를 이용해 한라산에
올랐다는 것이다.
즉 조천을 출발해 궷드르, 괴평촌이라 불리는 와흘리에서 안내를 맡은 사냥꾼들과 합류한다.
이어 대나오름, 단애봉 등으로 불리는 절물오름에서 점심식사 후,
도리석실이라 불리는 동굴에서 1박을 한다.
다음날 힘들게 전진하다가,
"서쪽에 좁은 길이 있다는데, 왜 험한 길로 안내하느냐"고 안내하는 이들에게 힐난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이에 동쪽이 가깝기 때문이라는, 출발지가 조천임을 감안하면 당연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제대로 정비되지 않은 코스를 고생하며 올랐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제주발전연구원의 기관지인 '제주발전포럼'에 번역문을 실었던 백규상 선생은,
현재의 산천단코스에 해당한다고 소개하고 있는데, 필자의 견해는 이와 다르다.
산천단코스라면 관음사코스를 지칭하는 것 같은데,
이곳이 아닌 물장올에서 속밭을 거쳐 백록담에 오르는, 즉 관음사의 북동 능선으로 오른 게 아니냐이다.
1963년 부종휴 선생이 제안했던 바로 그 코스다.
성널폭포서 물맞이 하는 아낙네
어쨌거나 1800년대 후반부터 등산로의 다변화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코스는 1900년대 들어서도 계속 이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1930년대 후반, 부종휴 선생이 당시 13세의 나이로 성널오름의 성널폭포에 물을 맞으러 갔다는 회고담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렇게 추정하는 이유는 조천과 구좌지역에서 성널오름에 가려면 속밭을 거치게 되는데,
앞서 김희정이 오른 노선과 바로 인접해 있기 때문이다.
한편 김희정의 기록에서 보면 사냥꾼을 길잡이 삼아 올랐다고 했는데,
지역주민들 중 한라산에 오르는 경우는 사냥꾼 외에도 방목중인 소와 말을 돌보는 테우리(목동),
약초를 캐는 이들, 화전민 등이 해당한다.
그들이 직접적으로 남긴 기록이 없으니 외지인들이 남긴 기록에서 그들의 발자취를 찾아보자.
먼저 1920년대의 풍경으로 성널폭포에서 물맞이를 하는 사진이 있다.
아낙네 7명이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을 맞는 모습으로,
물맞이는 신경통 등에 효험이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해발 1215m인 한라산 중턱의 성널오름까지 물을 맞기 위해 갔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한라산에서의 물맞이 장소는 성널폭포만 있는 게 아니다.
이은상의 기록에 의하면 어리목의 계곡에서 물맞이하는 부녀자들의 모습을 봤다고 말하고 있다.
어리목이라면 노형동이나 애월읍 광령리 일대 주민들이 물맞이 장소로 이용햇던 것으로 추정된다.
요즘의 경우 제주에서의 물맞이는 서귀포의 바닷가에 위치한 소정방폭포에서 이뤄지는데,
예전에는 한라산의 계곡에서 물맞이를 했던 것이다.
사냥꾼, 테우리, 화전민의 생활
사진으로 전하는 일제강점기 한라산의 모습은 물맞이 외에 사냥꾼과 테우리, 화전민의 모습 등도 보인다.
1935년 12월말 한라산에 올랐던 경성제대 산악부의 기록에 의하면,
눈 덮인 한라산에서 가죽옷과 설피를 착용하고 개를 끌고 다니는 사냥꾼 사진이 나온다.
화전민의 경우 1914년의 사진이 전하는데, 제주도 특유의 개가죽으로 만든 두루마기와 가죽신, 머리에는
정동벌립을 쓰고 있는 모습이다.
1929년 조선총독부가 펴낸 제주도생활상태조사에 의하면,
화전민들은 울창한 산림에 불을 놓아 2∼3년 동안 보리와 조, 산디 등을 재배하다가 지력이 떨어지면
다른 곳으로 옮기는 생활을 했다.
겨울에는 주로 사냥을 하며 짐승이나 털가죽을 팔아 생계를 꾸렸다.
주로 안덕면의 동광리 일대에 화전민 마을이 많았다.
화전민에 대한 기록은 1937년 국토 순례 행사의 일환으로 한라산을 오른 이은상의 글에서도 소개되는데,
하산할 때 모새밭(선작지왓) 너머 영실에서 화전민의 딸로 추정되는 여자아이가 시로미를 캐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은상 일행은 그 소녀의 안내를 받은 후 한라산 산행에서 가장 땀나는 급경사를 내렸다는 기록으로 보아
소녀를 만난 지점이 영실 동쪽 능선지대 위쪽의 선작지왓 지경이라 여겨볼 수 있다.
영실 일대에는 화전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1901년 한라산을 찾은 겐테 박사의 기록에 보면 나무꾼 이야기가 나오는데,
가족까지 대동한 23명에 달하는 인원이 동굴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나무를 베어내고 있었다고 소개
하고 있다.
겐테 일행은 이들 나무꾼의 길 안내를 맡으며 야간산행,
영실에 위치한 그들의 숙소인 동굴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도 했다.
그들의 복장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있는데, 거친 가죽옷, 목화솜을 넣은 헐렁한 바지, 털가죽 모자와
귀덮개 등등이다.
관음사코스서 만난 목동 이야기
이러한 특별한 목적과는 달리 1900년대 전반기 제주도민들이 한라산에 오른 가장 큰 이유는 방목중인
소를 돌보기 위해서였다.
1905년 여름 19세 어린 나이의 일본경성제대 학생인 이찌시따(市河三喜)가,
두 달에 걸쳐 한라산을 오른 후 훗날 그 일정을 기록에 남겼는데,
지금의 관음사코스에서 만난 목동 이야기이다.
즉 삼각봉 가기 전 지점에서 두 마리의 소를 모는 목동을 만나 그 뒤를 따라 삼각봉까지 전진했다는 것이다.
이찌시따는 며칠 뒤 삼각봉, 용진각 계곡을 지나 왕관릉 남쪽 방면으로 해서 정상으로 향하는데,
우마가 다니는 소로를 따라 백록담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한라산에서의 방목은 1980년대 중반까지도 이어졌다.
대부분 여름 한 철 한라산에서 방목하는 것으로, 백록담까지 소들이 드나들 정도였다.
한라산에서의 방목은 진드기 피해를 예방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실례로 노형동의 기록에 의하면 한라산에서 방목하는 오립쇠(野牛)는 아흔아홉골에서 백록담에 이르는
'상산'에서 방목했다고 한다.
구체적으로 정존 마을은 아흔아홉골 부근에서, 광평 마을은 큰두레왓이나 장구목 너머에 있는 '왕장서들'
아랫부분인 '도트멍밭'에서 방목했다고 밝히고 있는데,
이곳에서는 오라동과 이호동, 도두동, 연동의 주민들도 함께 이용했다고 한다.
또 광평이나 월산마을인 경우는 어승생 서쪽의 '서평밭'과 만세동산, 백록담에 이르는 '웃중장'에서,
일반 소는 '알중장'에서 방목해 소를 보러 가기 위해서는 첫 닭이 울 무렵 집에서 출발해야만 했다고 증언
하고 있다.
결국 방목 중인 소와 말을 관리하기 위해 백록담까지 숱하게 올랐다는 얘기다.
이들에게 있어 한라산은 경관을 구경하기 위한 장소가 아니라 삶의 터전이었다.
그리고 당시 소와 말이 다니던 길을 따라 사람들이 다니기 시작했고,
이게 훗날 등산로로 개발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글 : 강정효 / 사진작가 / 제민일보 2013. 10.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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