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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효의 한라산이야기 - 37] 등산로 변천사2

아즈방 2023. 1. 7. 09:28

[강정효의 한라산이야기 - 37]

등산로 변천사2

제주땅 밟은 외지인들의 한라산 초행

우마의 발길따라 등산로 개척…표고버섯 재배사 숙소 활용

무카에 켄고의 '제주도의 추억' 제주 여성의 강인함 소개도

▲ 1900년대 초반 외국인의 한라산 등반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에서 비롯됐다.

 

△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
제주에서의 20세기는 1901년 신축년의 항쟁으로부터 시작된다.

이재수의 난이라고도 불리는 이 난리는 천주교를 앞세운 세력과 과도한 세금징수에 대항해 일어난, 제주도민의 항쟁이었다.

그 봉기과정에서 천주교도 300여명이 살해되고,

프랑스 해군이 출동하는 등 제주는 국제분쟁에 휩싸인다.

나중에 프랑스는 피해보상을 요구하며 당시 돈으로 6315원을 받아갔고,

이를 도민 전체가 나누어 배상해야만 했다.
 
이처럼 시끄러운 난리가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

제주땅에 몇몇의 외국인들이 한라산을 찾아 들어온다.

대표적인 인물이 일본인 아오야기 츠나타로오(靑柳 綱太郞)와,

독일인으로 신문기자이자 지리학 박사인 지그프리트 겐테다.

이들로 시작된 1900년대 초반 외국인의 한라산 등반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에서 비롯됐다.
 
먼저 아오야기 츠나타로오(靑柳 綱太郞)의 기록을 보자.

그는 이재수 난이 발발하자 친구와 함께 미복차림으로 목선을 타고 제주에 와서 10여일을 체류하며 보고 느낀 점을 기록한 후, 훗날 체신성의 말단관리로 재직하며 공무로 제주를 찾게 되자,

조사의 모자란 점을 보완, 책으로 엮어내기까지 했다.

그의 기록은 1905년 3월 목포신보에 '대제주경영(對濟州經營)'이라는 글이 실리고, 이어 같은 해 9월 일본에서 '조선의 보고 제주도안내'라는 책자가 발간된다.

그는 머리말에서,

"제주사정을 알려 많은 사람들이 제주로 건너가 사업을 하는데 도움을 주고자 했다"고 밝히고 있는데, 당시 제주목사였던 홍종우(洪鐘宇)가 서문까지 써 주기도 했다.

한라산과 관련해 '한라산이 제주도'라는 부분을 소개한 후,

"산중에는 약초가 많고, 사슴, 멧돼지, 토끼 등 산짐승과, 풀어놓은 우마들이 무리를 이루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 한라산 첫 야간 산행
한라산 높이가 1950m임을 밝힌 겐테 박사 일행은,

1901년에 이재수 난의 수습을 위해 제주에 미리 파견돼 있던 강화도수비병 1개 소대의 호위를 받으며 도합 12명이 한라산을 오르게 된다.
 
등산코스를 살펴보면 제주성을 출발해 해안을 따라 서쪽으로 이동하다 산으로 올랐다.

시내에서 중간쯤 올라가면 사찰의 유허를 볼 수 있다는 소리에 이를 찾아 헤맨 기록이 나오는데, 영실의 존자암을 말하는 것 같다.

하지만 해발 1000m 지경까지 올라왔으나 존자암 터는 발견하지 못하고 헤매던 중 불빛을 발견, 이동하고 보니 나무꾼들이었다.
 
당시 나무꾼들은 가족까지 대동한 23명에 달하는 인원이 동굴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나무를 베어내던 상황이었다.

이들과 함께 동굴에서 잠을 잔 겐테는 다음날 영실을 올라 남벽으로 백록담에 올랐다.

백록담에서 동쪽으로 올랐으면 길은 쉬워지지만 더 지루했을 거란 표현도 달고 있다.

다시 남벽으로 내려 영실의 동굴에서 박한 후 하산했는데,

제주성을 출발한 지 3일째 되는 저녁에 제주성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겐테 박사 일행은 등산로가 없는 상태에서 무작정 산행에 나섰기 때문에,

한밤중이 되어도 숙소를 정하지 못해 무척이나 고생하게 된다.

나중에는 말이 앞서 나가는 방향을 따라 가는 원시적인 방법으로 산을 올랐는데,

이는 기록에 나타나는 한라산에서의 첫 야간 산행이라 할 수 있다.
 
△ 한라산행(漢拏山行)
뒤를 이어 1905년 7월 19세 어린 나이의 일본경성제대 학생인 이찌시따(市河三喜)가 한라산을 오른 후, 훗날 그 일정을 기록에 남겼는데, 한라산행(漢拏山行)이다.

그의 산행에는 미국인 앤더슨과 함께 했다.

목포에서 일본어를 하는 조선인 통역까지 구한 후,

1905년 8월 제주에 도착한 이찌시따는 경찰서에 부탁해 인부를 고용했는데,

당시 노임은 시내에서 3리반 정도 떨어진 능화동(菱花洞)이라는 마을까지 500문((文)-1엔(円))을 주기로 하고 3명을 고용했다.
 
남문과 삼성사(삼성혈)를 거쳐 돌담으로 이뤄진 들판을 지나 초원지대, 소나무와 갈까마귀, 소와 말, 관목 숲을 거쳐 능화동에 도착했다고 했는데,

능화동에 대해 7∼8채의 인가로 이뤄졌고 삼림지대까지는 아직도 10수정(町)이 남았다고 표현하는 것으로 보아 능화오름 주변이 아닌가 추측해 볼 수 있다.
 
8월 10일 능화동에 도착한 이찌시따는 다음날부터 계속되는 비 날씨로 비박과 민가에서 여러 날을 보낸 뒤 다시 선내로 내려갔다가 27일에 능화동으로 돌아왔으나, 또다시 비 날씨가 이어져 본격적인 산행은 9월 4일 시작된다.

첫날은 삼림대와 조릿대군락을 지나 삼각봉까지 갔다가 목동과 함께 하산했다.

이어 10일 삼각봉과 왕관릉을 보며 정상으로 접근했으나, 절벽에 막혀 돌아오고,

다음날 지형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좌우에 큰 계곡이 두개 있고 큰 절벽으로 끝나는 오른쪽 계곡에 천막을 쳤다는 것으로 보아, 서탐라골(개미계곡)에서 야영을 했음을 알 수 있다.
 
9월 13일 8시 출발해 삼각봉을 지나 용진각 계곡으로 내려 계곡을 따라 오르다 왼쪽으로 튼 후, 다시 오른쪽으로 올랐다니 오늘날 개념으로 보면 왕관릉 남쪽 방면으로 해서 정상으로 향했음을 알 수 있다.

이 날 기록에 의하면 앤더슨은 용진각 아랫부분 물이 나는 곳에서 야영했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어쨌든 이날 우마가 다니는 소로를 따라 백록담에 마침내 도착했는데,

그 시간이 11시로 3시간만이 소요된 것이다.

백록담에서 통역으로 동행했던 목포인 김용수 씨와 함께 수영까지 하며 여유를 부리다가, 다시 날씨가 흐려지자 오후 1시 하산, 앤더슨의 캠프에서 요기를 한 후 2시 30분 출발, 4시 능화동의 천막으로 돌아온 것으로 기록돼 있다.
 
△ 제주성내서 7리, 서귀포서 5리
일제강점 초기인 1911년 슈우게츠(大野秋月)는 '남선보굴 제주도(南鮮寶窟 濟州島)'라는 책을 통해 한라산 산행코스에 대해 자못 소상하게 소개하고 있다.

먼저 정상에 오르는 길은 제주성내와 서귀포에서 출발하는 두개가 있다며,

제주성내에서는 7리, 서귀포에서는 5리가 걸린다고 말한다.

이와 함께 길이 험준해 쉽게 등반할 수 없다며 만일 시도하고 싶으면 4∼5일분의 양식과 야영준비를 하고 가야 한다고 경고한다.

또 계절은 5월부터 11월 초순까지가 적당하다고 밝히고 있다.
 
제주성내에서 출발하는 코스를 보면,

처음 3리간은 고지대라고 부를 만한 고원으로 작은 오름과 밭이 이어지는데,

이곳을 지나면 설화동(雪花洞)이라 불리는 산록에 도착한다.

설화동에는 조선인 가옥 2호가 있다고 소개하고 있는데, 앞서 이찌시따는 능화동이라 소개한데 반해, 슈우게츠는 설화동이라 표기한 부분이 눈길을 끈다.

혹 당시 이 지역 사람들이 부르는 이름이 아닌 자신이 편의상 지어낸 이름인지도 생각해 볼 문제이다.
 
이어 설화동에서 15정(町)은 잡목림으로 졸참나무, 메밀잣밤나무 등이 많고,

이곳에서 계곡으로 내려 2리쯤 더 가면 삼림대는 끝나는데 한라산 7부 능선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여기서부터 상부는 계곡사이에 메밀잣밤나무가, 그리고 약간의 관목이 있고, 대부분은 제주조릿대가 덮고 있다고 소개한다.

이어 거대한 절벽을 오르면 정상에 닿는다고 밝히고 있다.
 
서귀포에서 오르는 코스는 2리반 가량 오르면 후지타의 표고 재배장 3호 헛간에 이르고, 2리 반을 더 오르면 정상에 닿는다고 소개하고 있다.

본격적으로 표고버섯 재배사가 한라산 산행에 있어 숙소로 이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 표고버섯 재배사는 1970년대까지 산악인들이 즐겨 이용하게 된다.

△ '문교의 조선' 10월호 
1928년 여름에는 제주에서 조선교육회 주최로 하계대학 강좌가 열려 150명 이상이 참가하고, 이들 중 일부의 발표논문들이 '문교의 조선' 10월호에 게재되기도 한다.

당시 이들은 3박4일 일정으로 제주읍을 출발하여 정오께 삼의양악과 관음사를 거쳐 백록담에 오른 후 서귀포로 하산했다.

이들 역시 표고버섯 재배사를 숙소로 이용했다.
 
여기에는 경성일보 기자인 무카에 켄고의 '제주도의 추억'이라는 글이 실렸는데,

진해에서 해군의 군함을 타고 산지항으로 입도해 한라산을 오르는 과정이 소개되고 있다.

특이한 것은 한라산에 오를 때 일행 중에 강수선이라는 여성이 있었다며 제주여성의 강인함을 소개하고 있다.

 

글 : 강정효 / 사진작가 / 제민일보  2013. 9.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