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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효의 한라산 이야기 - 31] 신선의 땅

아즈방 2023. 1. 7. 09:22

[강정효의 한라산 이야기 - 31]

신선의 땅

곳곳에 신선 이야기 서린 신령한 산

고대부터 '신선이 사는 이상향' 여겨…

"입산 자체가 신선 만나는 길"
백록신선 설화 얽힌 방선문, 수많은 마애명 남아…틀린 부분 고쳐야

▲ 들러진 엉덕 들렁귀의 아치형 석문

# 많은 기록서 '신령한 산' 표현
한라산은 예부터 영주산(瀛州山)이라 하여 봉래산(금강산), 방장산(지리산)과 더불어 3대 영산(靈山)의

하나로 신성시되어 왔다.

삼신산(三神山)이라고도 불리는 3대 영산은 중국에서 제(齊)나라 때부터 신선이 사는 곳으로 여겨온

이상향으로, 중국 사기(史記)에 '바다 한가운데 삼신산이 있는데 봉래, 방장, 영주가 그곳이다'라는 기록

에서 비롯된다.

중국 제(齊)나라 위왕(威王)과 선왕(宣王), 연(燕)나라 소왕(昭王) 등이 삼신산으로 사람을 보내,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는 불로불사(不老不死)의 영약을 구해오게 지시하기도 했다.
 
이후 중국 천하를 통일한 秦始皇 시대에 이르러 童男童女 500쌍과 함께 서불(徐, 서복이라고도 함)을

보냈다는 곳 또한 한라산으로 전해진다.

이때 서불이 한라산에서 불로초로 캐간 것이 백록담 주변에서 자라는 시로미 열매라 하기도 한다.

또한 서불은 돌아가는 길에 서귀포(西歸浦)의 정방폭포에 '서불과차'라는 글귀까지 남겼고,

서귀포라는 지명도 이때 서불이 돌아간 곳(西歸)이라 하여 유래됐다고 한다.

심지어 불국토를 건설하려던 석가모니의 제자인 16존자 중 여섯번째인 발타라 존자가 이상 세계로 여겨

눌러앉은 곳 또한 한라산의 영실이었다고「고려대장경」法住記와「조선불교통사」는 전하고 있다.

모두 한라산을 신성시하는 의미에서 생겨난 이야기들이다.

신령스런 한라산의 이미지는 그 이름과 더불어 수많은 설화 속에서도 확인된다.

은하수를 능히 끌어당길 수 있는 산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한라산의 이름부터가 예사롭지 않고,

신선이 하늘에서 흰 사슴을 타고 내려와 물을 마셨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백록담이라는 이름의

유래에서도 신선이 등장한다. 
 
# 백록은 '신선'이었다?
백록담에는 하얀 사슴을 타고 다니던 신선만 있었던 게 아니다.

많이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이니 잠시 소개하고자 한다.
 
아주 먼 옛날 백록담에는 많은 신선들이 살고 있었는데 매년 중복날에는 방선문으로 내려오고,

그 사이 백록담에는 하늘에서 선녀들이 내려와 물놀이를 즐긴다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해 중복에 호기심 많은 한 신선이 선녀들을 훔쳐보려고 백록담의 바위틈에 숨어있었다.

이윽고 자욱한 안개가 휩싸이며 선녀들이 내려와 물놀이를 즐기기 시작했다.

이때 이를 훔쳐보던 신선이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내밀게 되고 결국은 선녀들에게 발각된다.

기겁해 비명을 지르는 선녀들의 목소리가 하늘의 옥황상제의 귀에까지 들어가고,

신선은 동료들이 있는 방선문으로 뛰어 도망가는데 처음 뛰어내린 곳이 용진각이 되었고,

이때 달아난 길이 탐라계곡이 되었다고 한다.

옥황상제는 신병을 보내 신선을 붙잡고는 벌로써 하얀 사슴으로 만들어버린다.

그 후로부터 하얀 사슴이 백록담을 벗어나지 못하고 슬프게 울부짖게 됐다는 얘기다.
 
# 신선 만나는 길 방선문·우선문
이원조 목사의 기록에 보면 한라산을 신선가, 즉 도를 닦는 사람들은 영굴(靈窟)이라 하여 신성한 굴로

여긴다는 대목이 나온다.

해서 옛 선비들은 한라산에 오르는 행위 자체를 신선을 찾아가는 길에 비유하곤 했다.

한라산의 원래 이름이 하늘산에서 비롯됐다고 해석했던 이은상은 한라산에 오르는 행위 자체를 하늘의

신묘한 문으로 들어선다고 표현할 정도다.
 
그렇다면 신선을 만나러 가는 길, 신묘한 문은 추상적인 마음속의 문으로만 존재했을까.

한라산으로 이어지는 계곡의 경치가 뛰어난 곳에 위치한 자연 석문을 들어가는 문이라 하여,

의미를 부여했다.

대표적인 곳이 한천 중류의 방선문(訪仙門)과 광령천 중류의 우선문(遇仙門)이다.

방선문이 선경으로 찾아가는 문이라면 우선문은 신선과 만나는 곳이란 의미이다.
 
영주십경의 하나인 영구춘화의 무대로 더 잘 알려진 방선문은,

예로부터 시인묵객들이 즐겨 찾던 과거 제주목 관내의 대표적인 명소다.

예로부터 순 우리말 '들렁귀'로 불리는데,

들러진 엉덕('바위'를 뜻하는 제주어) 또는 뚫어진 엉덕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순우리말 들렁귀와 신선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한자어 등영구(登瀛丘)가 미묘한 조화를 이룬다.

지형을 보면 계곡 한가운데에 커다란 아치형 기암이 마치 문처럼 서 있어 신선이 사는 곳으로 들어가는

문을 연상시킨다.

이러한 경관과 더불어 옛 선비들이 새겨놓은 마애(磨崖)명 등이 남아있어 역사 문화적 요소와 자연경관이

복합된 자연유산으로서 가치가 뛰어나, 명승 제92호로 지정됐다.

고전소설의 무대가 되기도 하는데,
제주목사를 따라온 배비장이 서울을 떠날 때,

어머니와 부인 앞에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는데,

이곳에서 제주기생 애랑의 유혹에 빠져 망신을 당한다는 내용인 배비장전이 그것이다.

제주목사 중 가장 먼저 이곳에 글을 남긴 홍중징(洪重徵)이 1739년에 왔음을 감안할 때,

죽성마을을 거쳐 현재의 관음사코스 방면으로 한라산에 오르기 시작한 1800년대 이전부터 들렁귀에는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었음을 알 수 있다.
 
# 제액·오언율시에도 등장
지난해 한라산연구소의 조사에 의하면 방선문 일대에는 모두 64건의 마애명이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를 내용별로 보면 목사 등의 이름을 새겨놓은 제명이 48건, 오언율시 등 제영이 12건,

제액이 4건으로 訪仙門을 비롯해 등영구(登瀛丘), 우선대(遇仙臺), 환선대(喚仙臺) 등이 그것이다.
 
4건의 제액을 통해 신선을 찾아나서는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내용으로는 먼저 신선을 찾아나서는 방선문을 시작으로 신선을 부르는 환선대, 신선을 만나는 우선대,

신선의 세계로 들어가는 등영구 등의 순이다.

이곳과는 별도로 이 계곡을 따라 곧장 올라가면 탐라계곡 중간지점에 신선이 숨어 사는 골짜기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은선동(隱仙洞)이라는 제액이 따로 있다.

신들의 고향이라 불리는 이곳 제주에서 한라산신을 만나러 가는 길,

또는 한라산의 신선들을 만나러 가는 시작점이 바로 들렁귀인 것이다.

제액뿐만 아니라 12건의 시에서도 상당 부분 신선과 관련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한정운의 시에 '신선은 어디에도 뵈질 않으니(仙人不可見)'를 비롯해,

임태유의 시에서는 사슴타고 노닐던 신선이야기(騎鹿遊仙去),

조희순의 시에서는 역(易)의 이치를 근간으로 해서 儒敎와 도교(道敎)를 종합한 책인 참동계(參同契)를,

환선대라는 제액 옆으로는 '이곳이 신선이 사는 곳임을 알겠네(知是在仙間)'라는 글월이 보인다.
 
이밖에도 '신선은 떠났지만 꽃과 바위들은 남아있다'(仙去留花石)라거나,

'신선 만나보기 어렵다'(仙人難可見),

'신선과 속인들 얼마나 들락거렸던가'(仙俗幾多來) 등,

하나같이 '방선문에 들어서면 글쓰는 사람 역시 신선이 된다'(瀛丘我亦仙)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
 
# 마애명 재현 고증 철저히
이곳에서는 매년 오라동 방선문축제위원회 주최로 '신선들의 꽃밭 영구춘화 방선문축제'가 열린다.

이와 함께 제주시보건소 남쪽 연북로를 출발, 한북교를 거쳐 방선문에 이르는 4.7㎞ 구간에 걸쳐,

'방선문 가는 숲길'이라는 이름의 오라올레가 개설돼 많은 이들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며칠 전 이곳을 찾았다가 방선문 계곡 입구에 세워져있는 마애명 재현 표석들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한 적이 있다.

방선문이라는 지명의 의미와 관련하여 신선을 찾아가는 문이라 알고 있었는데,

설명에는 당나라 시인 백거이의 장한가의 시구를 인용하며,

'신선이 찾아오는 문'이라 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조선 영조 때의 명필 홍중징 제주목사의 '방선문에 올라서'(登瀛丘)라는 마애명을 재현하며,

마지막 문장 '학이 울며 날아드는 것 같구나'(鸞鶴若飛來)라는 부분에서 난(鸞)이라는 글자 하나를 빼

먹었다는 것이다.
 
계곡에서 마애명을 하나하나 찾기가 쉽지 않을뿐더러,

그 내용을 제대로 모를 경우 감흥이 달라질 수밖에 없기에,

재현하고 그 설명을 달아주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하지만 그 내용이 잘못되거나 글자가 누락되는 등의 실수가 있을 경우,

전체적으로 신뢰에 금이 갈 수밖에 없다.

철저한 고증을 거쳐 혹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고치고 바로잡기를 바란다.

 

강정효  / 사진작가 / 제민일보 - 2013.06.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