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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효의 한라산 이야기 - 29] 등산로 변천사<1>

아즈방 2023. 1. 7. 09:21

[강정효의 한라산 이야기 - 29]

등산로 변천사<1>

옛 사람들은 어느 코스로 한라산 올랐을까

조선시대 관리들 '존자암' 전진기지로 정상 올라
무수천·영실·선작지왓 등 다양한 코스기록 남아

영실의 적송지대. 조선시대 한라산 산행의 시작은 존자암을 전진기지로 삼아 영실 동쪽능선을 오르고는 선작지왓, 남벽코스를 이용해 백록담에 오르는 코스였다.

 

# 기록은 몇 사람에 불과
예로부터 삼신산의 하나로 알려진 한라산은 옛 사람들이 무척이나 동경하여 누구나 한 번쯤 오르고 싶은

산이었다. 그리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한라산을 올랐으며 많은 기록을 남겼다.

하지만 한라산 등반을 기록으로 남긴 사람들은 육지부에서 내려온 관리들로 극소수에 불과했는데,

관리 자신에겐 한라산 등반이 유흥이었을지 모르나 당시 그를 수행한 백성들에게는 고역 그 자체였다.
 
1520년 제주에 귀양 왔던 김 정은 한라산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내 귀양 온 죄인의 몸으로 그렇게 올라가볼 수 없음이 애석하다'며 아쉬워했다.

최익현도 '이 산에 오르는 사람이 수백 년 동안에 관장(官長: 제주목사와 현감 등 벼슬아치들)된 자

몇 사람에 불과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 임 제, 존자암 코스로 정상
그렇다면 예전 사람들은 어느 코스로 한라산에 올랐을까.

기록에 나타나는 최초의 등산은 조선 세종 시대로 달력을 관장하는 역관 윤사웅(尹士雄)과 최천형

(崔天衡), 이무림(李茂林) 등 세 사람을 보내 노인성을 관찰하게 했다는 내용이 있다.

이어 심연원(沁連源, 1491~1558)과 토정비결로 유명한 이지함(李之菡, 1517~1578)이 노인성을

보았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이들은 한라산에 올랐다는 기록만 있을 뿐 구체적으로 어느 지역으로 올랐는지 등에 대한

내용은 전혀 없다.

한라산에 오르는 구체적인 과정이 기록으로 남아있는 것은 임 제(林梯, 1549~1587)의 남명소승

(南溟小乘)이다.

임 제는 제주목사로 재직하고 있던 아버지 임 진(林晉)을 찾아왔다가 한라산을 올랐는데,

그의 기록은 훗날 한라산을 오르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가이드북처럼 이용된다.
 
임 제는 1578년 음력 2월 중순 산행에 제주목 서문을 출발해 도근천 상류를 거쳐 영실의 존자암으로

향한다. 당시 도근천 상류라 하면 무수천을 일컫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는 영실에 위치한 존자암에서 4일을 묵은 후 어렵사리 정상에 올랐다.
 
마침내 날이 풀리자 영실 입구에서 남쪽 능선을 따라 선작지왓을 거쳐 정상에 오른다.

정상에서의 하산은 남쪽으로 길을 잡아 두타사로 내리는데, 무리하게 올라가서였는지 피곤에 지쳐

두타사에 도착한 후 바로 잠이 들어버렸다.

두타사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없어 현재까지도 그 위치에 대해 다양한 주장이 나오는 이유다.
 
# 다양한 길로 오른 어사·판관들
존자암코스는 이후 한라산 산행의 정석처럼 여겨지는데,

1601년의 김상헌어사, 1609년의 김치판관, 1680년 이증어사 등이 이 코스를 이용했다.

먼저 김상헌은 제주목 남문을 출발, 병문천과 한천을 지나 서쪽으로 나아간 후 무수천 지경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존자암으로 향한다.

존자암에 도착했을 때는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듯 흐려지자 일행들이 차라리 존자암 뒤에 제단을 만들어

제사를 봉행하는 게 어떠냐고 제안하지만, 이를 거절하고 정상으로 올랐다.
 
김치판관은 노루생이오름, 삼장동을 거쳐 존자암에서 1박한 후,

영실의 옛 존자암터인 수행굴, 선작지왓의 칠성대를 지나 백록담에 올랐다.

하산시에는 백록담의 북벽으로 내린 것이 이전과의 차이점이다.

새벽에 존자암을 출발하여 백록담을 거친 후 북쪽 코스로 하산했는데,

해질 무렵 제주성으로 내렸으니 오늘날의 산행 일정과 비슷하다.
 
이증은 새벽에 일어나 식사를 한 후 남문, 연무정, 병문천, 한천, 무수천을 지나 용생굴에서 조반을,

존자암에서 점심을 든다.

이어 영실의 천불봉, 선작지왓의 칠성대, 좌선암을 거쳐 정상에 도착한다.

앞서의 김상헌과는 달리 이증 일행은 백록담 분화구 안에 장막을 치고 하룻밤을 묵었다.

여기서 새로운 지명이 등장하는데 용생굴(龍生窟)이다.
 
하산할 때는 영실에 들러 오백장군과 두 가닥의 빙폭, 존자암의 옛터를 본 후, 존자암에서 아침밥을

먹고는 무수천의 들렁귓소를 구경하고 이어 용매과원(龍寐果園)에서 점심식사를 한다.

용골과원 즉 지금의 용장굴을 이르는 말이다.

용장굴은 과거 용좟골(龍坐洞), 용골(龍洞) 등으로 불리는 과원이 있던 곳으로,

지금의 흥룡사라는 사찰이 위치한 곳이다.

# 이형상 목사, 최초로 당일산행
한편 이증의 산행에는 정의현감 김성구도 동행하는데,

김성구의 남천록에는 영실동, 오백장군동, 천불봉을 지나 외구음불(外求音佛)까지는 말을 타고,

이후로는 가마를 타고 정상 바로 밑까지 간 후 지팡이를 잡고 걸어서 정상까지 오른 것으로 돼 있다.

외구음불이라는 지명이 어디를 말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데,

영실 동쪽 능선으로 선작지왓 남쪽의 급경사지역이라 추정할 수 있다.

폐허가 된 존자암지에서 6-7리 거리에 위치한 영실 오백장군, 이어 존자암과 40리 거리인 외구음불,

외구음불에서 백록담까지의 거리가 15리라는 기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후 백록담에서의 하산할 때 이증 일행은 올랐던 길을 되돌아오는데 반해,

김성구는 백록담 밑 냇가에서 아침을 먹고 의귀원으로 하산,

저녁에 지금의 성읍리에 위치한 관아로 돌아간 것으로 돼 있다.

백록담에서의 구체적인 한라산신제 과정이 생략되고 임 제의 기록에 나타나는 두타사 부분도 전혀

언급되지 않아 임 제와 같은 코스였는지도 의문이다.
 
이형상목사는 1702년에 백록담에 올랐는데, 기록에 의하면 최초의 당일산행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한라산 전체적인 개관에 대해서는 잘 나와 있으나,

구체적인 등반코스에 그 지역을 유추해볼 수 있는 기록이 없어 정확한 코스는 알 수 없다.

존자암에 대해 거주하는 스님이 없고 단지 헐린 온돌만 몇 칸 남아있다는 내용으로 볼 때는 앞서의

사람들처럼 영실코스를 이용했음을 알게 해 줄 정도다.
 
# 1800년대 애용된 관음사 코스
이어 1800년대 들어서는 관음사코스가 자주 이용되는데,

1841년 이원조목사와 1873년 최익현이 대표적이다.

이원조의 탐라지초본에 보면 한라산에 이르는 길이 별도로 소개되고 있는데,

죽성촌에서부터 3소장을 지나고 숲그늘과 무성한 밀림을 지난다.

밀림이 끝나는 곳에는 대나무와 향기로운 나무가 우거져 있다.

돌이 많은 좁은 길이 매우 험하나 그것을 휘어잡고 의지하거나 기어올라서 꼭대기에 이른다는 내용이다.
 
실제로 이원조는 방선문 동쪽마을인 죽성촌에서 출발하여 백록담 북벽으로 정상에 오른후,

하산은 남벽을 이용 선작지왓을 지나 영실로 내렸다.

구체적으로 산행과정을 알아보자.

죽성촌에서 1박한 후 새벽에 출발, 말을 타고 가다 산기슭에서 가마에 갈아타고는 험한 곳에서는 짚신을

신고 걷기를 반복하며 백록담에 오른다.

이어 백록담에서 하산할 때는 남벽으로 내린 후 서쪽, 즉 움텅밧과 선작지왓을 거쳐 영실에 이른다.

영실에서 장막을 치고는 노숙,

그리고는 날이 밝자 서북쪽으로 유수암(금덕), 광령 경계를 지나 4소장으로,

오후에는 해안동 리생이마을에서 말을 갈아타고는 제주목의 서문으로 돌아오는 코스다.
 
최익현은 1873년 제주도에 유배되어 6년간 이곳에 머물렀는데,

1875년 2월 유배가 풀려 자유로운 몸이 되자 한라산 등반에 나섰다.

그 일정을 보면 남문을 출발해 방선문을 둘러본 후,

동쪽에 위치한 죽성마을에서 넓은 집 한 채를 빌려 숙박,

다음날 말을 타고 중산에 도착하는데,

관리들이 산행할 때 말에서 가마로 옮겨 타는 곳이라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는 나뭇꾼과 사냥꾼이 다니는 길을 따라 산으로 오르는데,

탐라계곡을 건너고 삼각봉을 지나 백록담 북벽으로 정상에 오른다.

하산할 때는 남벽으로 내린 후 서쪽의 선작지왓 방향으로 이동, 바위를 의지하여 노숙을 한다.

기록에 나오는 한라산 최초의 비박인 셈이다.

다음 날 영실을 거쳐 저녁에 제주목으로 돌아오는 2박3일 일정으로 진행됐다.
 
어쨌거나 한라산에 오르는 길은 처음에는 존자암을 전진기지로 하여 날씨가 풀리기를 기다린 후,

영실 동쪽 능선을 따라 선작지왓, 그리고는 남벽으로 오르는 코스가 많이 이용됐다.

이후 1800년대 이후에는 방선문, 죽성, 탐라계곡으로 이어지는 오늘날의 관음사코스와 비슷한 코스가

새롭게 등장한다.

조선시대 이후의 등산로변천사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로 미룬다.

 

강정효 / 사진작가 / 제민일보 - 2013.05.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