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효의 한라산 이야기 - 26]
4·3 사건의 흔적들
비켜가지 못한 4·3의 아픔, 이제는 흔적만 남아
철저한 고립속 무장대·토벌대 치열한 공방
피난소·잃어버린 마을 등 4·3 유적 곳곳에
# 수많은 4·3유적 산재
4월이다.
제주의 4월은 늘 아픔으로 다가온다.
4·3사건 때문이다.
얼마 전 모 단체에서 주관한 4·3기행에 안내를 맡아 안덕면 동광리 일대를 둘러본 적이 있다.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영화 '지슬'의 촬영무대인 큰넓궤와 잃어버린 마을을 안내하면서,
4·3과 한라산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다.
제주 4·3과 한라산은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다.
1948년 4월3일의 무장봉기도 한라산 중턱의 오름에서 봉화가 오르는 것을 신호로 4·3의 시작을 알린다.
이후 4·3이 마무리될 때까지 무장대는 한라산을 근거지로 게릴라전을 펼쳤고,
토벌대는 이들을 추격해 한라산과 오름에서 쫓고 쫓기는 공방을 벌이게 된다.
4·3과 관련한 한라산의 유적이라 하면,
무장대의 은신처, 토벌대의 주둔성, 주민들이 피난생활을 했던 장소, 중산간의 잃어버린 마을,
그 밖의 기념물 등을 꼽을 수 있다.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발굴한 4·3 당시의 사진들을 보면,
윗세오름 일대에서 작전을 펼치는 군인들의 모습도 볼 수 있다.
기록사진 중에는 한라산 중턱에서 피난생활을 하는 주민들의 모습, 그리고 하산하는 모습 등도 보인다.
최근 이 사진들과 관련하여 몇몇 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그 장소가 산세미오름과 제주시 해안마을
사이의 해안목장 인근이라는 결론을 내린 적이 있다.
구체적인 장소는 현지조사와 주민들을 대상으로 증언채록이 뒤따라야 정확해지겠지만.
영화 지슬에 나오는 동광리 사람들의 경우도 큰넓궤가 토벌대에 발각된 후 나중에 영실의 불래오름
일대에서 피난생활을 했었다.
이처럼 한라산에는 수많은 4·3 관련 유물유적이 산재할 것으로 추정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유적에 대해서는 제대로 조사된 게 없다.
한라산이 워낙 광범위하고, 또 국립공원 구역으로 묶여 조사에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빚어진 문제다.
어쩌면 마을주변 지역을 먼저 조사하다 보니 우선순위에서 밀렸을 수도 있겠지만.
# 초토화 작전, 77개 마을 잃어
4·3 당시 한라산을 비롯한 중산간 일대는 철저하게 고립된다.
1948년 10월 17일 제주도 경비사령관 송요찬은,
'해안선으로부터 5㎞ 이상 떨어진 중산간 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의 무리로 인정하여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하고 중산간 마을 주민들에 대해 해안 마을로 이주하라는 포고령을 내렸다.
1948년에 내려진 소개령으로 제주도 중산간 마을은 사람이 살지 않는 곳으로 변했다.
마을 주민들이 좌익 무장대에게 도움과 피난처를 제공한다고 판단한 토벌대는 중산간 마을 주민들을
모두 해안 지대로 내려 보낸 다음 마을 전체를 불태워버리는 이른바 초토화 작전을 자행해 폐허만이
남게 되었다.
1954년 가을, 입산 금지가 풀린 뒤 중산간의 자기 마을로 되돌아가 마을을 재건하게 되는데,
상당수의 마을은 이때 재건되지 못하고 영영 사라져버린, 잃어버린 마을로 방치됐다.
제주4·3연구소가 조사한 잃어버린 마을 현황을 보면 77개 마을에 달한다.
이 중 영남마을이나 종남마을, 동광리의 무동이왓, 삼밧구석 등은 해마다 4월이 되면 시민들이 역사
순례 장소로 많이 찾는다.
이밖에 경비대가 무장대를 토벌하며 쌓은 돌담이 남아 있는 주둔소가 있는데,
한라산 동쪽의 수악주둔소를 비롯하여, 서쪽의 녹하지악, 남쪽의 시오름, 북쪽의 관음사 등 곳곳에
아직도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또한 무장대를 이끈 이덕구가 은신했던 괴평이오름 주변 일대도 이덕구 산전이라 하여,
답사 코스의 하나가 되었다.
1949년 봄 이후에는 무장대사령부인 이덕구 부대가 잠시 주둔했던 곳으로 전해진다.
하천의 절벽이 휘둘러 가며 흐르기 때문에 천연의 요새였던 것이다.
이덕구는 훗날 인근에 위치한 작은개오리오름 자락에서 토벌대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
무장대의 은신처도 있다.
대표적인 곳이 한경면 산양리 한수기곶이다.
4·3초기 대정면당 사령부가 은신했던 곳으로 오찬이궤라는 굴을 중심으로 근거지로 삼았다.
이밖에 수악계곡의 바위 절벽 밑 바위틈에 돌담을 쌓아 만든 10여명이 은신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주의를 기울여야 찾을 수 있을 정도로 은폐된 곳이다.
어리목의 관리사무소 뒤편에도 돌을 아치형으로 쌓은 후 흙을 덮어 위장한 토굴이 몇 해 전 발견되기도
했다.
# 피신장소에는 희생의 흔적만
주민들이 피신 생활을 했던 장소 중에는 앞서 얘기한 동광리의 큰넓궤와 선흘리의 목시물굴,
어음리의 빌레못굴, 다랑쉬굴 들이 널리 알려져 있다.
길이 40m 정도의 작은 용암동굴인 다랑쉬굴 속에서는 11구의 유골이 확인됐다.
유골의 주인은 아홉 살 어린이 한 명, 부녀자 세 명, 성인남자 일곱 명으로 판명됐다.
선흘 곶자왈에 위치한 목시물굴은 많은 선흘주민들이 은신해 있는 굴이었다.
이날 목시물굴에서 총살된 희생자는 40여명이다.
굴에서 나오자마자 총을 쏜 후 시신에다 기름을 붓고 태웠기 때문에 나중에 희생자가 누구인지 얼굴을
분간하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고 한다.
주변에는 4·3 당시 무장대나 피난 주민들이 움막을 지어 생활하던 '트'(아지트의 줄임말)의 흔적이
산재해 있다.
황금곰의 화석이 발견되기도 한 구석기시대 유적으로 잘 알려진 어음리의 빌레못굴에서는,
4·3 때 30명 가까운 주민들이 희생되었다.
심지어는 아무것도 모르는 젖먹이 아기까지.
# 개방 후 평화기념비 건립
1954년 9월 21일 제주도 경찰국장인 신상묵은 한라산 금족지역을 해제, 전면개방을 선언하는 한편,
지역주민들에게 부과됐던 마을 성곽의 보초임무도 철폐했는데,
이는 1948년 4·3사건 발생 후 6년 6개월만의 일로 사실상 도 전역을 평시 체제로 환원시킨 것이다.
한라산이 전면 개방됨에 따라 다시 등산의 발길이 이어지는데,
그 시작이 같은 해 10월 5일 제주초급대학 한도호국단 주최로 120명 전원이 사각모를 쓰고 한라산을
오른 것이다.
당시 이들은 아흔아홉골과 어승생 사이로 올라 큰두레왓을 거쳐 정상에 올라,
백록담 물을 떠다가 저녁밥을 지어 먹었다.
당시 산행에 참여했던 현용준 박사의 기록에 의하면, 아직도 산에 무장대가 남아 있을지 몰라 총을 든
이들도 동행했다고 한다.
이어 10월10일에는 제주신보사가 주최한 '한라산 개방기념 답사'가 열려 길성운 도지사와 김창욱 검사장,
신상묵 경찰국장, 미 고문관 등 군경·교육·금융·언론계 인사 66명이 참가하기도 했다.
또 도청 산하 내무국, 산업국과 경찰국 합동으로 구성된 횡단도로 조사반이 한라산 횡단도로 공사를 위한
현지조사에 나서기도 했다.
제주대학 답사반은 한라산 전역에 대한 조사에 나서는 등,
한라산 개방에 따른 도민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이외에도 한라산 개방을 기념하는 등반대회가 기관, 직장, 단체별로 잇따라 한라산 개방 후 1955년 봄까지
전국 15개 산악회가 한라산을 등반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한편 한라산 입산금지령이 해제되고 1년 뒤인 1955년 9월 21일에는 한라산의 정상인 백록담 북쪽 능선에
한라산개방평화기념비(漢拏山開放平和紀念碑)가 건립되었고, 그 비는 아직도 한라산 정상에 서 있다.
신선부대장 허창욱이 글을 쓰고 동화임업 사장 이광철이 건립했다.
이와는 별도로 한국산악회 기록을 보면 백록담에는 개방평화기념비 말고도 평정기념비가 따로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국산악회는 1957년 1월 12일부터 29일까지 18일간 제2차 적설기 한라산 등반에 나서는데,
당시 홍종인 회장이 제주도 4·3사태 평정기념비를 바라보는 사진이 한국산악회 50년사에 실려 있다.
이와 관련하여 선배 산악인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예전 백록담의 서쪽 정상부근에 비석이 있었는데,
누군가가 외륜의 절벽으로 밀어버렸다고 한다.
해서 예전 산악안전대 대원들이 백록담 서쪽 벽을 타고 오르는 훈련을 할 때 깨진 비석의 파편을 주의해서
살필 것을 부탁했었는데 확인할 수가 없었다.
지금이라도 다시 찾아 나서고 싶은 심정이다.
강정효 / 사진작가 / 제민일보 - 2013.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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