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효의 한라산이야기] 24.
소와 말의 방목
'말들의 고향' 오늘날까지 독특한 문화 이어와
말사육은 곧 탐라왕국의 역사…고려시대부터 목장 본격화
목축 풍습 '방앳불 놓기' 재현한 들불축제 계승 고민 필요
# 기후·생태 말 사육에 최적
며칠 전 새별오름에서 들불축제가 열렸다.
들불축제와 관련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 연원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것 같다.
왜 들판에 불을 놓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들불축제의 뿌리에는 방앳불이 있다.
흔히 '방앳불 놓는다'라 하는데, 늦겨울에서 초봄 사이에 들판에 마을별로 불을 놓는 풍습을 이른다.
화입(火入)이라고도 부른다.
양질의 목초를 얻기 위해, 그리고 해충을 없애기 위한 수단으로 불을 붙였던 것이다.
결국 과거 목축문화에서 생겨난 풍습이 오늘날 축제로 탈바꿈한 것이다.
제주의 독특한 목축문화는 다른 지방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다양한 문화를 만들어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특징이 야산에 방목하는 풍속이라 할 것이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지난 19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한라산의 백록담 근처에서까지 들판에서 뛰노는
소와 말을 볼 수가 있었다.
한라산에서의 목축, 특히 말의 사육은 탐라 왕국과 역사를 같이한다.
제주도의 시조가 삼성혈의 구멍에서 솟아난 후 이들과 결혼하는 벽랑국의 세 공주가,
곡식의 씨앗과 함께 송아지와 망아지를 들여왔다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제주에 말을 키우는 목장이 운영되기 시작한 것은 몽골족의 원나라가 탐라를 지배
하면서부터이다.
원은 고려 충렬왕 2년(1276년) 제주도의 옛 이름인 탐라에 몽골식 목마장(牧馬場)을 설치하는 한편,
말 160필과 말 관리 전문가인 목호를 탐라로 보내어 기르게 한 것이 그 시초이다.
이후 100여 년간 탐라의 목마장은 원나라의 직할 목장으로서,
이곳에서 생산된 말은 다시 몽골로 징발해 갔다.
당시 기마병을 주축으로 지구전을 펼치며 유럽 대륙까지 진출했던 몽골의 군사들이 탔던 말 중 상당수가
탐라에서 생산된 말인 셈이다.
나라에서 운영하는 국영목장은 조선 시대에도 계속된다.
이는 제주도가 말을 키우기에 적합한 환경을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기후가 따뜻하고 풀이 무성하며,
호랑이를 비롯한 맹수가 없기에 산야에 방목하여 키우더라도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이와는 반대 입장, 즉 땅이 좁고, 한라산의 나무가 빽빽하고 수초가 부족
하기 때문에 목마장으로 적절치 않다는 논쟁이 꽤나 있었다.
어쨌거나 조선시대에는 한라산 둘레에 10소장이 설치돼 운영된다.
한라산에는 말 뿐만 아니라 소를 기르는 우목장도 존재했었다.
제주목의 황태장, 대정현의 모동장, 가파도의 별둔장, 정의현의 천미장 등이다.
# 우수한 품질 명나라까지 명성
10소장 외에 눈길을 끄는 목장으로는 산마장이 있다.
조천읍과 표선면, 남원읍 등 한라산 중턱에 위치한 목장으로,
산마를 전문으로 방목하는 아주 예외적인 목장이다.
산마장의 시작은 멀리 임진왜란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임진왜란 직후인 1600년 김만일과 그의 아들 김대길이 전투용 말 500필을 국가에 바치자,
조정에서는 10소장내에 동서별목장을 설치한 것이다.
이어 1658년 김대길과 그의 아들이 또다시 전투용 말 208필을 바치자,
임금이 제주목사의 건의를 받아들여 동서별목장을 산장으로 만들어 김대길을 산장감목관으로 임명하고
그의 자손들이 그 직을 세습하게 했다.
이렇게 생겨난 산마장은 그 범위가 한라산 정상에까지 이르렀는데,
숙종 28년에 침장(針場), 상장(上場), 녹산장(鹿山場)으로 개편되고,
나중에는 녹산장에 갑마장(甲馬場)이 설치된다.
요즘 표선면 가시리에서 걷기코스로 개발한 갑마장길은 녹산장 내의 갑마장을 둘러보는 코스라 할 수
있다.
여담이지만 갑마장길 개발 과정에 필자도 참여했는데, 특히 따라비오름에서 대록산에 이르는 구간의
잣성은 그 규모나 보존상태에 있어 제주도 최고를 자랑한다.
산마장의 말들은 품질이 우수해 초기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 결과 임금이 타는 어승마를 비롯해 조정의 대신들, 심지어는 명나라까지 보내지게 된다.
그 성질이 억세고 기운이 왕성하여 전투용도에 적합하다는 이유에서다.
# 방목금지가 오히려 산림파괴
한라산에서의 소와 말의 방목은 일제강점기까지도 계속된다.
초대 제주도사를 지낸 이마무라 도모의 기록에 의하면,
일본에서 들소가 있는 곳은 이즈(伊豆)의 오오시마(大島)와 조선의 제주도 두 곳뿐이라 소개하고 있다.
제주도의 들소, 들말과 관련하여 방목된 우마가 밀림지대로 도망하여 퇴화한 것으로,
준들소, 준들말이라 부를만 하다고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들말은 당시까지도 남아있지만, 들소는 1차세계대전 당시 가죽 가격이 비쌀 때 거의 포획되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편 1933년 마을단위로 116개소의 마을공동목장이 결성되며 제주에서의 우마 방목은 일대 전환점을
맞게 된다.
마을단위로 바뀐 것인데, 예를 들면 노형동의 경우 한라산에서 방목하는 오립쇠(野牛)는 아흔아홉골에서
백록담에 이르는 '상산'에서 방목했다.
구체적으로 정존 마을은 아흔아홉골 부근에서,
광평 마을은 큰두레왓이나 장구목 너머에 있는 '왕장서들' 아랫부분인 '도트멍밭'에서 방목했다고 밝히고
있는데, 이곳에서는 오라동과 이호동, 도두동, 연동의 주민들도 함께 이용했다고 한다.
또 광평이나 월산마을인 경우는 어승생 서쪽의 '서평밭'과 만세동산, 백록담에 이르는 '웃중장'에서,
일반 소는 '알중장'에서 방목해 소를 보러 가기 위해서는 첫 닭이 울 무렵 집에서 출발해야만 했다고 증언
하고 있다.
한라산에서의 방목(放牧)은 4.3사건 이후 또다시 재개되는데,
1970년대 초반 국립공원 지정 이후 이러한 방목은 환경논란에 휩싸이며,
10여 년간 논쟁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1975년 7월 한라산국립공원관리사무소에서는 공원구역 내에서의 가축방목을 금지하기로 했는데,
이는 가축방목으로 희귀식물이 훼손되고 축주들이 가축관리를 빙자해 무단출입함에 따른 것으로,
방목일체를 불허하고 위반자는 사법처리할 방침을 세운다.
1976년 7월 제주도는 국립공원에 들어가는 가축에 대해 관계법을 적용하여 축주들을 다스리겠다고 발표,
전통적인 방목행위에 쐐기를 박겠다는 입장을 밝혔는데,
부작용도 예상돼 단속보다 계몽이 앞서야 한다는 여론이 제기되기도 했다.
당시 공원관리자들은 해마다 여름철이면 백록담 등 깊은 산 속에서 5~6마리씩 떼 지어 다니는 가축들로
골치를 않아왔다.
그리고는 1980년 7월 한라산 1500고지 이상에서의 방목행위를 철저히 단속하기로 했는데,
연대보호림 안에서의 방목행위를 허용하는 내용의 산림법시행령이 1984년 7월 개정된 이후,
1985년 5월에는 도내에서는 처음으로 국유림내의 공동방목을 허용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한라산에서의 방목은 1988년을 기해 완전히 금지된다.
한편 한라산에서의 방목을 금지한 이후 1990년대 중반에는 제주조릿대가 기하급수적으로 번식하며,
시로미와 털진달래 등 다른 식물이 고사위기에 처하자, 방목을 금지했기 때문에 발생한 현상이라며,
방목을 허용해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되기도 했다.
실제로 제주조릿대 군락지 시험포에 제주마를 방목한 결과,
조릿대 잎사귀뿐만 아니라 줄기까지도 먹는 것으로 나타났다.
더 이상 늦기 전에 방목금지의 따른 득과 실을 비교 분석하여 특단의 대책을 세워야 할 필요가 있다.
# 우여곡절 끝 화입 전면허용
한편 화입, 즉 목장의 야초지에 방앳불 놓기 또한 환경파괴 논란이 대상이 되는데,
목축과 관련해 신문에 문제가 제기된 것은 1965년 5월로 진드기 구제를 위해 목야지를 태우는 화입
행위를 1966년부터는 금지한다는 내용이다.
이후 1967년의 기록에 의하면 1966년 한 해 화입으로 소실된 산림은 10만 그루에 해당한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도에서는 화입 시 군수, 경찰서장, 각급 행정기관장이 연대하여 경방태세를 갖추도록 지시
하기도 했다.
이 과정을 거쳐 화입은 1970년부터 금지되는데,
1977년 3월 표선면 가시리에서 자기 임야에 불을 지른 농민이 산림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처음으로
구속되기도 했다.
당시 당국은 화입행위를 6대 폐습으로 규정, 추방운동을 전개 할 무렵이었다.
이어 1990년 8월 애월읍 금덕리 마을공동목장에서 15년 만에 화입이 행해지고,
1995년 7월에 야초지 및 방목지에 대한 화입이 전면 허용된다.
앞서도 얘기했지만 방앳불 놓기라는 전통문화를 오늘에 맞게 축제로 재현한 것이 들불축제다.
우리의 문화를 어떻게 계승 발전시킬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강정효 / 사진작가 / 제민일보 / - 2013.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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