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효의 한라산이야기] 23.
산악훈련의 최적지, 용진각과 장구목
무한한 자애로움 안에 감춰진 ‘혹한의 공포’
산악인 즐겨 찾는 훈련 장소 ‘용진각과 장구목’
히말라야 등 해외 고산과 겨울 한라산 환경 비슷
#히말라야와 비슷한 한라산의 환경
해마다 이맘때 즈음이면 한라산과 관련해 보도되는 기사가 있다.
전국의 산악인들이 한라산 일대에서 훈련을 한다는 내용이다.
이번 겨울의 경우 당초에는 38개팀 432명이 한라산에서의 적설기 훈련을 신청했었다.
하지만 유독 눈이 적게 내렸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호우특보까지 내려질 정도로 많은 비가 내려,
14개팀 120명은 훈련을 포기했다고 한다.
한라산에서 산악인들이 즐겨 찾는 훈련 장소는 용진각과 장구목이다.
대개 용진각에 텐트를 쳐 베이스캠프로 삼은 후에 장구목에서 집중 훈련을 한다.
그렇다면 왜 이처럼 많은 산악인들이 겨울 한라산을 찾을까.
그 이유는 한라산에서의 적설기 훈련에 나서는 산악인 대부분은 해외의 고산 등반을 목표로 하는데,
히말라야를 비롯한 해외의 고산과 겨울 한라산의 환경이 비슷하다는 이유다.
특히 거센 눈보라와 영하 20도를 넘나드는 혹한은 히말라야 등 극지를 탐험하려는 산악인들이 반드시
거쳐야 할 훈련코스로 정평이 나 있다.
한라산은 그 높이에서도 육지부의 산과 차이가 나지만, 산 자체가 바다에 위치한 관계로 고산에서의
기후와 해양에서의 기후가 함께 나타난다.
이와 함께 맑은 날씨였다가 순식간에 바로 눈앞 1m도 안 보이는 '화이트아웃' 현상이 나타나는 등,
겨울 한라산의 날씨는 예측을 불허한다.
'화이트 아웃(white out)'이란 겨울철 악천후에 가스가 가득해 주변을 구분하기 어려운 상황을 말한다.
공간의 경계 구분이 어려워 행동 장애를 초래하는데, 길을 잃어버리기 쉽고,
고산에서는 심한 경우 눈처마를 잘못 밟거나 크레바스 등에 빠질 수도 있다.
한 지점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며 헤매는 환상방황도 이런 날씨에서 자주 발생한다.
필자의 경우 지난 2001년 장구목에서 훈련 중인 산악인들이 눈사태로 매몰되는 사고가 발생했을 당시
체험했다.
1m 앞의 일행도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는데 순간적으로 가스가 트인 상태에서 보니 눈처마위에 서 있는
모습을 보곤 아찔했던 경험이 있다.
#한라산의 눈은 '습설'
한라산의 눈은 육지부의 산과 다르다.
흔히 습설이냐, 건설이냐를 따지는데, 한라산의 눈은 습설이다.
건설은 영하 10도 아래로 떨어지는 추운 날씨에 내리는데, 가루 형태로 잘 뭉쳐지지 않는다.
반면 습설은 영하 1도 내외에서 내리는 눈으로 함박눈이 대표적이다.
특히 한라산은 낮에는 온도가 상승해 진눈깨비가 많이 내리거나 습설이 녹아 옷이 젖으면서 마르기 전에
얼어붙으므로 대비를 철저해야 한다.
이 상태에서 바람마저 분다면 치명적이기에 비상의류 등은 필수다.
또 습설은 눈의 겉면이 단단하게 얼어붙은 상태를 말하는 크러스트(crust)도 쉽게 형성한다.
쌓인 눈이 크러스트가 되는 원인으로는 바람이나 햇빛에 의해 나타나는데,
바람의 영향으로 건조한 눈이 굳어진 것은 윈드 크러스트(wind crust),
햇볕에 녹은 후에 굳어진 것은 선 크러스트(sun crust)라 구분하기고 한다.
크러스트 된 눈 위에 다시 신설이 쌓이면 눈사태의 위험이 높기 때문에 주의해야 하는데,
한라산 장구목이 대표적인 장소이다.
이 경우 눈 표면을 오르거나 내려올 때는 킥 스텝 기술을 이용해야 한다.
킥 스텝(kick step)은 설사면을 오르내리는 기술을 말하는데,
설사면을 등산화의 앞 끝과 뒤꿈치로 차면서 발 디딤을 만들어 오르거나 내려오는 기술이다.
킥 스텝은 오를 때는 발 끝, 하강할 때는 뒤꿈치를 이용한다.
눈의 표면이 단단할 경우는 스텝 커팅을 하거나 흔히 아이젠이라 부르는 크램폰(crampon)을 착용해야
한다.
표면이 부드러운 신설이 쌓여 있고 그 밑에 얼음이 단단하게 결빙된 눈 층이 있는 경우 킥 스텝은
오히려 위험하기 때문이다.
산악인들이 장구목에서 오르내리는 연습이 바로 킥 스텝이다.
킥 스텝을 하더라도 경사면에서는 미끄러지기 일쑤다.
이를 슬립이라 부르는데, 한번 슬립 돼 구르기 시작하면 어떠한 숙련된 등산가도 이것을 확실히 정지
시키는 확률은 거의 없다고 한다.
해서 슬립이 시작되는 시점에 빙사면에 피켈을 박아야 한다.
이때 실패하면 정지할 수 없기 때문에 꼭 자일로 확보 또는 연결해서 등반해야 한다.
앞뒤 사람이 자일로 연결하는 것을 안자일렌이라 부른다.
이 역시 훈련하기에는 장구목이 적지이다.
#눈사태로 유명한 장구목
한라산 장구목은 눈사태 지역으로도 유명하다.
지금은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 졌지만, 지난 2001년 이곳에서 적설기 훈련 중인 산악인 3명이
산사태로 목숨을 잃은 곳도 이곳이다.
장구목의 동쪽 사면, 즉 탐라계곡의 용진각으로 내려서는 경사면에서 일어난다.
당시 필자는 구조대원들과 함께 장구목에서 용진각으로 내리는데,
사람사이의 간격을 20m 간격으로 늘어서 경사지게 내려갔다.
이때 아주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말소리를 내지 말라는 경고와 함께.
눈사태는 심할 경우 소리의 진동에 의해서도 발생하기 때문이다.
눈사태의 특성은 한 번 일어났던 지형에서 재발하기 때문에 이곳에서의 겨울 훈련은 항시 눈사태를
염두에 둬야 한다.
한라산에서는 간혹 빙벽훈련도 이뤄진다.
예전에는 주로 영실의 빙폭 3곳에서 훈련을 많이 했으나, 영실은 한라산의 남사면에 위치한 관계로
얼음이 일찍 녹아버리는 단점이 있다.
해서 최근에는 탐라계곡의 이끼폭포에서 훈련을 많이 하는데,
탐라계곡은 용진각으로 이어지는 길목이기에 장구목에서의 훈련과 더불어 빙벽훈련도 할 수 있는
조건을 갖췄다고 할 수 있다.
장구목은 겨울철 적설기 훈련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러셀과 글리세이딩 훈련의 적지이기도 하다.
러셀(russel)은 적설기 등반에서 선두가 깊은 눈을 헤쳐 나가며 길을 뚫는 방법을 말하는 것으로,
눈길 뚫기, 눈 다지기, 눈 헤쳐 나가기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적설량이 정강이 이하일 때에는 그냥 걸어가듯이 헤쳐 나가면 되지만,
무릎 이상 빠질 때에는 무릎으로 눈을 다져가며 운행해야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설피나 스키를 활용하기도 한다.
글리세이딩(glissading)은 설사면을 등산화 바닥으로 미끄럼을 지치면서 내려가는 활강기술로,
장구목 사면을 내릴 때 훈련하게 된다.
글리세이딩에는 스키와 같이 선 자세로 활강하는 방법과,
앉은 자세에서 엉덩이로 제동해 내려가는 방법,
무릎을 구부려 쪼그리고 앉아서 내려가는 방법 등이 있다.
#‘자애와 공포’ 양면의 산
지금은 겨울 적설기 훈련의 최적지로 한라산이 각광받고 있지만 그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한라산에서의 적설기 등산은 그 시작부터가 사망자를 냈던 것이다.
한라산에서의 공식적인 첫 적설기 등산은 1936년 1월 경성제대 산악부에 의해 이뤄진다.
적설기 등산이란 용어는 일본인들이 일반적인 동계 등산과 구분해 불렀던 말로,
스키기술과 피켈을 주로 이용하는 여러 날에 걸친 등산을 의미한다.
경성제대 산악부는 폭풍설 속에 백록담에서 하산을 시도하다 왕관릉 인근에서 마에가와 도시하루
대원이 실종, 그해 5월에 숨진 채 발견된다.
해방 이후인 1948년 1월에는 한국산악회가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한라산 적설기 등반에 나섰으나
이들 역시 모진 폭풍설 속에 백록담에서 하산을 시도하다 전탁 대장이 조난,
3월에 탐라계곡에서 숨진 채 발견된다.
이후 한라산에서 사망한 산악인 사고의 대부분이 적설기 등산 과정에서 발생한다.
한라산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산이지만 저지대에서 보기에는 완만하게 보인다.
해서 산행에 나서는 많은 이들이 쉽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평상시는 한없이 자애로운 산이지만 일순간에 영하 20도를 넘나드는 혹한과,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폭풍설 등 무서움도 함께 하고 있음을 늘 잊어서는 안 된다.
만만한 산이 아니라는 얘기다.
강정효 /사진작가 / 제민일보 - 2013.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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