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효의 한라산 이야기]
제주, 1만8000 신들의 좌정처
도내 산신 신당 95개…전체 25% 농경신 이어 두번째 많아
전통문화 계승발전·관광자원화 차원 제주신화 확장 필요
도내에 한라산신을 모신 신당은 95개로 전체 392개의 25%에 해당한다.
사진은 와산 엄낭굴철산이도산신당.
# 한라산 산신 이야기
요즘 제주는 신구간(新舊間)이다.
신들의 인사이동이 있는 기간으로, 대한 후 5일에서부터 입춘 전 3일까지로,
양력 기준으로는 1월 24일부터 2월 1일까지다.
신임 신과 임기를 마친 신들이 모두 하늘나라에 올라가 인수인계를 하다 보니,
지상에서는 업무의 공백이 생기는 시기라 할 수 있다.
혹 집안을 고치거나 이사를 하려해도 신들의 눈치가 보여, 동티가 날까봐 미루다가 신들이 없는 틈에
해버리는 것이다.
해서 오늘은 한라산과 관련하여 한라산에서 태어난 신들에 대해 얘기해 보고자 한다.
지난 2008년과 2009년 제주특별자치도의 용역으로 제주전통문화연구소가 진행한 제주도 신당 전수
조사에 조사팀장으로 참여해 프로젝트를 진행한 적이 있었다.
당시 조사에 의하면 도내에는 392개소의 신당이 현존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현재 신당으로서의 기능이 살아있는 즉 단골들이 찾는 신당과 그 기능은 사라졌지만,
그 형태가 온전히 남아있는 신당을 합한 숫자다.
조사보고서 발간 이후에 추가로 확인된 곳도 몇 군데 더 있으니 400개소 가량 있는 것으로 보면 된다.
이 중에서 한라산신을 모신 신당이 95개소로, 전체 392개의 25%에 해당한다.
마을의 본향당에서 모신 신들의 성격을 보면,
산신, 농경신, 해신, 산육신, 치병신 등으로 나눠 볼 수 있는데,
산신계열이 농경신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숫자다.
특히 중산간 마을에 밀집돼 있다.
산신계열이라 하면 한라산에서 태어난 신들을 모신 신당을 말하는데,
구좌읍 세화리 본향당의 당신인 천자또는 '하로영산 백록담에서 부모 없이 저절로' 솟아났다고 하고,
서귀포시 호근동의 본향당신 애비국하로산또는,
'하로영산에서 을축년 3월 열사흘 날 자시에 솟아났다'는 식이다.
백록담에서 부모 없이 저절로 솟아난 천자또는 일곱 살부터 천자문을 시작으로 소학, 대학, 중용 등
학문을 익혔다.
열다섯 살에 어엿한 선비로 자랐는데 문장이 뛰어나 옥황상제의 일을 보좌했다.
훗날 옥황상제의 명을 받아 세화리의 '손드랑마루'라는 곳에서 당신으로 좌정하게 되면서,
마을 주민들의 출생, 사망, 생업 등 생활 전반을 관장한다.
서귀포지역에서 전해지는 산신의 계보를 보자.
한라영주산 서쪽 어깨에서 아홉 형제가 태어나는데, 차례로 울레(아래아)루하로산(성산읍 수산),
제석천왕하로산(애월읍 수산), 삼신백관또하로산(하례), 요드레 산신백관또하로산(호근),
중문이백관하로산(중문), 색달리 당동산백관또하로산(색달), 열리백관또하로산(예래),
고나무상테자하로산(감산), 제석천왕하로산(일과) 등으로 불리고 있다.
# 수많은 신당의 뿌리 한라산
이처럼 많은 수의 신당이 그 뿌리를 한라산에 두고 있다는 것은 한라산이 그만큼 신성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굿을 할 때 본풀이를 보면 그냥 한라산이 아닌 하로영산, 할로영산이라 하여,
신령한 산임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도 이에 대한 방증이다.
산신에 대한 호칭으로는 한라산또, 보름웃도, 산신백관, 산신또, 하로백관, 하로영산백관또 등으로
불리고 있다.
'한라산또'란 한라산에 신을 지칭하는 또가 덧붙여져 한라산신을,
'보(아래아)름웃도'는 바람 위의 신, 바람 위에 좌정한 신이라는 의미이다.
이들 신의 기능으로는 사냥신, 목축신, 풍수신, 풍신 등의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사냥신이기에 한라산신을 모신 본향당에서는 당굿의 막판에 산신놀이를 통해 신들을 즐겁게 만든다.
대표적인 곳이 동회천 본향당인 새미하로산당이다.
산신놀이의 주요 내용을 보면 잠에서 깨어난 두 포수가 산신제를 마치고 사냥을 나가는 장면에서부터
미리 준비한 닭(노루나 꿩을 의미)을 사냥한다.
이어 서로 자기가 잡은 것이라 다투다가 수심방이 중재자로 끼어들어 고기를 나눌 것을 제안한다.
고기를 나누는 분육행위에 이어 더운 피는 산신에게 올리고, 나머지 고기는 단골들에게 인정을 받으며
나누어준다.
액을 막아주는 의식으로, 예전 한라산을 무대로 수렵생활을 했던 산신들을 재현한 놀이굿이다.
지난해 성읍민속마을에서 제주큰굿 재현행사를 할 때 단골과 관광객들에게 가장 인기를 끌었던 부분이
산신놀이를 비롯해 영감놀이, 전상놀이, 세경놀이 등 놀이굿이었다.
# 수렵생활에서 농경사회로
제주도의 많은 신화를 보면 한라산에서 태어난 신들이 처음에는 사냥으로 먹고 살다가 외부에서 들어온
여신을 만나 농경을 하게 되는 정착과정을 그리고 있다.
탐라국의 개국을 알리는 삼성신화의 경우도 이와 다르지 않다.
삼성혈에서 태어난 삼을라가 벽랑국에서 온 세 공주와 만나 결혼하는 과정에서,
세 공주와 함께 도입된 것이 망아지와 송아지, 오곡의 씨앗이었다.
비로소 수렵생활에서 농경사회로 바뀌게 됨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제주 무속의 뿌리라는 송당본향당의 본풀이도 다르지 않다.
알손당 고부니모를에서 솟아난 소로소천국은 처음에는 한라산을 떠돌며 사냥으로 살아가던 산신이었다.
이후 서울 남산 송악산에서 태어난 금백주를 만나 결혼을 하면서 비로소 마을을 이루고,
농사를 짓기 시작한다.
하지만 배고픔에 밭을 갈던 소를 잡아먹고는 부인과 다툼 끝에 이혼, 원래의 고향인 고부니모를로 돌아가
첩을 얻어 수렵생활을 하며 살아간다는 내용이다.
한마디로 소천국이 쫓겨난 것으로, 농경문화가 기존의 수렵문화를 대체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는 제주여성의 강인한 생활력도 반영된다.
제주여성의 강인함은 서귀동본향당의 본풀이에서도 잘 나타난다.
한라산의 산신인 보름웃도가 여행을 다니다가 아리따운 처녀를 보고 그 집에 장가를 드는데,
결혼하고 보니 자기가 봤던 천하미색 작은 딸이 아닌 큰딸 고산국을 아내로 맞이하게 된 것이다.
이에 처제와 눈이 맞아 함께 제주도로 도망치는데 뒤늦게 이를 안 고산국이 축지법을 써서 쫓아온다.
이에 동생이 안개를 피워 숨어버리자, 고산국은 일문관의 도움을 받아 닭의 형상을 만들어 홰를 치니
새벽이 밝아오며 안개가 걷힌다.
한라산 일대에서 한바탕 싸움을 한 후 마침내는 얼굴은 못생겼지만 똑똑하고 무예에 능한 고산국이
이긴다.
처음 생각 같아서는 단칼에 죽이고 싶었는데, 막상 얼굴을 보니 그러지 못하고 동생에게는 어머니의
성을 따서 지산국으로 개명하라고 명한다.
그리고는 고산국 본인은 서홍마을을 차지한 후 지산국에게는 동홍마을을,
보름웃도에게는 서귀마을을 각각 차지하라고 명한다.
서홍과 동홍마을 사이에는 혼인은 물론 우마의 출입이나 목재반출마저도 금하라는 명령과 함께.
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다면 현용준교수와 진성기관장, 문무병박사 등의 책을 권한다.
# 스토리텔링 소재 ‘제주 신화’
제주도 당본풀이를 비롯한 신화를 보면 엄청난 스토리텔링 소재를 담고 있다.
심지어는 혼돈으로 시작되는, 처음 세상이 열리던 당시 상황을 담은 천지개벽신화까지도 간직한 곳이
제주도이다.
굿을 할 때 초감제에 나오는 천지왕본풀이이다 해서 간혹 해설사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는데,
늘 하는 말이 제주도가 비록 면적은 작은 섬이지만 제주사람들의 꿈과 상상력은 무척이나 장대하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껏 제주신화를 확장시키는 방안에는 적극적이지 못한 느낌이다.
1만8000신들의 좌정처라 하면서도 이를 확장시키는 노력이 부족했다.
이제 얼마 없어 설날이 지나면 마을마다 본향당에서 신과세제라는 당굿을 한다.
신들에게 과세, 즉 세배를 올리는 의식이다.
그리고 음력 2월이 되면 바다의 신인 영등할망을 모시는 영등굿이 열린다.
신구간부터 대략 두 달 가량 신들과 관련된 제의의식이 치러지는 것이다.
전통문화를 계승 발전시키는 작업, 나아가 관광자원화에 대한 방안마련이 필요하다.
강정효 / 사진작가 / 제민일보 - 2013. 1.28.
'🤍 濟州道 > 漢拏山 .'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강정효의 한라산 이야기 - 23] 산악훈련의 최적지, 용진각과 장구목 (0) | 2023.01.07 |
---|---|
[강정효의 한라산 이야기 - 22] 한라산의 얼음 창고, 빙고 (0) | 2023.01.07 |
[강정효의 한라산 이야기 - 20] 녹담만설 (0) | 2023.01.07 |
[강정효의 한라산 이야기 - 19] 제주산악안전대 (0) | 2023.01.07 |
[강정효의 한라산 이야기] 18. 조선시대, 한라산 등산의 이유 (0) | 2023.01.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