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효의 한라산이야기 - 11]
조선시대의 산악가이드들
1578년 최초의 산행기록 "산척·스님따라 등반"전해
존자암은 옛 '베이스 캠프'
스님이 안내·해설사 역할 "등산은 곧 도를 배우는 것"
산행 전 공부 본받을만 해
▲ 운무로 뒤덮힌 영실 풍경.
조선시대에는 ‘산척’(山尺)이나 스님, 아전 등 산악가이드 역할을 했던 이들과 함께 올랐다는
기록이 전해내려오고 있다.
#산행 필수 지침서 「남명소승」
한라산에는 현재 5개의 등산코스가 있다.
어리목과 영실, 돈내코, 관음사, 성판악코스가 그것이다. 그
리고 각 등산로마다 수많은 표지판과 함께 탐방로가 잘 정비돼 있어 일부러 등산로를 이탈하지 않는 한
길을 잃을 우려는 없다.
그렇다면 등반로가 제대로 정비되지 않았던 과거에는 어땠을까.
조선시대 한라산 산행을 안내했던 가이드들의 이야기다.
기록으로 전하는 한라산 최초의 산행기는 1578년 임제의 남명소승이다.
남명소승은 이후 한라산을 오르는 수많은 사람들이 산행에 앞서 반드시 읽는 지침서와도 같다.
그만큼 큰 영향을 끼친 책이다.
남명소승에 의하면 임제는 제주에 머무는 동안 줄곧 한라산에 오르기를 희망했다.
하지만 겨울철에 내려온 관계로 눈 때문에 오르지 못하다가,
2월 들어 어느 정도 눈이 녹자 마침내 산행에 나선다.
산 속에 살면서 사냥이나 약초를 캐는 것을 업으로 삼고 사는 사람을 이르는 산척(山尺)이,
눈이 얼마쯤 녹아 사람과 말이 다닐 수 있을 것이라는 말에 따라서.
임제 일행은 산척의 안내로 받으며 산행에 나서는데,
그 산척이 영실 기슭에서 나무를 찍어 돌아올 길을 표시했다는 내용으로 보아 지리를 잘 아는 사람은
아닌 듯하다.
마침내 존자암(尊者庵).
존자암은 고려대장경 법주기에서 '발타라존자가 탐몰라로 가서 불법을 전파했다'라는 기록에 의거,
한국불교의 최초 사찰이라 주장하는 곳이다.
홍유손의 존자암개구유인문(尊者庵改構侑因文)에 의하면 탐라의 고양부 3성이 나올 때 창건됏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탐라지에서는 처음에 영실에 위치했었으나 현재 복원된 불래오름으로 옮겨졌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어쨌거나 임제 일행은 존자암에서 기상악화 등으로 5일간 머무른다.
첫날은 영실 일대를 구경했는데 큰 도끼로 나무를 치고 얼음을 깨며 길을 터서 전진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그 다음 날부터는 구름이 잔뜩 끼고 폭우까지 이어지는 바람에.
답답한 마음에 구름을 없애 달라는 발운가(撥雲歌)까지 지어가며 신에게 기원을 드리기도 했다.
눈길을 끄는 대목은 당시 대정현감이 먹을 것과 두 종류의 감귤을 존자암으로,
백록담을 오른 후 하산길에 하루 묵었던 두타사에는 정의현감이 술 두병을 보냈다고 한다.
과거 급제자에 대한 예우인지, 아니면 절제사의 아들이라 잘 보이기 위해 그랬는지 각자 상상할 일이다.
그리고는 존자암에서 백록담으로 향하는데,
이들을 안내하며 노인성과 백록 전설 등 한라산과 관련된 수많은 이야기를 전해준 이가 청순스님이다.
백록담에서 청순스님은,
"한두 번이 아니라 해마다 여기에 오른다"라는 말로 미루어 수차례 산행에 나섰음을 알 수 있다.
1601년 9월 24일과 25일, 1박2일 일정으로 한라산에 올라 백록담에서 산제를 지냈던 김상헌의 경우도
존자암에서 휴식을 취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즉 24일 새벽에 남문을 출발한 김상헌 일행은 존자암에서 차를 마시며 휴식을 취했다는 것이다.
이때 서울에서 죄를 짓고 귀양을 온 승려 몇 사람이 백록담까지 동행하는데,
이전의 사람들은 여러 날 존자암에 묵으면서 날씨가 개이기를 기다렸다가 백록담에 올랐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한라산 산행에 나서는 이들의 경우 존자암을 종종 이용했음을 알 수 있다.
요즘의 개념으로 보면 베이스캠프 또는 전진캠프의 역할을 했던 것이다.
▲ 1993~1994년 실시한 발굴조사를 바탕으로 2002년 11월 복원된 존자암.
#김치·이형상의 한라산행
1609년 한라산을 올랐던 제주판관 김치의 경우를 보자.
하인과 마부 등을 대동하고 나섰는데, 존자암에서부터는 수정스님이 이들을 길 안내를 맡는다.
그리고는 영실 골짜기 안의 옛 존자암 자리를 거쳐 수행동 석굴, 칠성대 등을 거쳐 백록담으로 향했다.
수정스님은 하얀 사슴 전설을 비롯한 한라산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등 사실상의 길안내와 해설,
즉 가이드 역할을 했다.
1679년 어사의 자격으로 이증은 조정의 명을 받은 공식행사인 산제를 지내기 위해 한라산에 오르는데,
제주판관과 정의현감, 대정현감, 교수, 찰망, 전적 등 수많은 수행원이 대동했다.
새벽에 남문을 출발해 존자암에서 점심식사를 한 후 칠성대, 좌선암 등을 거쳐 백록담 분화구 안에서
1박을 한다.
당시 수행하던 사람들이 날이 이미 늦었으니 존자암에서 쉬면서 절 뒤에 제단을 꾸며 제를 올리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지만 그냥 강행한 것이다.
다음날 새벽 제사를 지낸 후 하산할 때는 영실 오백장군과 세 갈래 폭포를 둘러본 후 다시 존자암에서
아침식사를 하는 등 한라산 산행에 있어서 존자암은 반드시 거치는 코스였다.
영실의 폭포는 지금도 비가 내리는 날이나 겨울철 눈이 녹을 무렵 세 줄기의 폭포를 형성하는데,
이때 처음 기록으로 등장한 것이다.
등산로에서 볼 때는 두 갈래가 보이기 때문에 영실쌍폭이라 부르기도 한다.
1702년 한라산에 오른 이형상목사의 기록에 의하면,
존자암은 이미 헐려 스님은 없고 무너진 온돌 몇 칸만 남았다고 전한다.
한라산에서 길 안내와 한라산이야기를 들려주는 등 해설사의 역할을 하던 존자암 스님들이 없어진 것이다.
이형상목사의 산행에 안내을 맡았던 이는 늙은 아전으로, 안남 즉 베트남까지 표류했던 내용을 담고 있는
과해일기를 휴대하고 주변 나라들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주변 나라와 지명이 등장하는데, 글쎄 한라산에서 중국의 여러 지방과 오키나와, 베트남까지 보일런지는
상상에 맡긴다.
참고로 필자의 경우 시력이 나빠서인지는 모르지만 추자도 너머 전라도의 섬까지는 본 적이 있지만,
중국이나 오키나와, 베트남을 본 적이 없다.
#털모자에 가죽옷이 등산복
1841년 한라산에 오른 이원조목사는,
"등산은 도를 배우는 것과도 같다"고 할 정도로 한라산 등산에 대해 상당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일행은 하인 몇 사람과 기병, 제주의 유생 등이 함께 하는데,
말과 가마를 번갈아가며 타고서 백록담을 올랐다는 사실이다.
위험한 구간에서 잠시 걷기도 하지만.
백록담에서 뽑혀나갔다는 산방산 전설이나 영실과 관련된 이야기를 익히 들었다는 내용으로 보아 사전에
한라산에 대해 공부를 하고 산행에 나섰음을 알 수 있다.
이원조 일행은 한라산의 북쪽 코스를 이용해 한라산에 오르고 하산할 때는 영실코스를 이용한다.
그 이전의 경우 거의 대부분이 영실코스를 이용해 등산과 하산을 했던 것과 비교되는 대목이다.
어쩌면 존자암이 없어진 후 달라진 등산문화인지도 모를 일이다.
영실로 내리는 도중 대정현의 아전이 목사 일행을 영접하려고 산에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그 복장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당시의 등산복 모습을 유추할 수 있는 부분으로 짐승 복장에 털벙거지를 쓰고 사냥개를 데리고 갔다는
것이다.
7월임에도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옷과 모자를 쓰고 사냥개까지 함께 했다는 부분은,
1900년대 초반 사진에 등장하는 사냥꾼과 목자(테우리)의 모습과 흡사하다.
비슷한 복장에 대한 언급은 1901년 한라산의 찾은 독일의 겐테박사의 글에서도 볼 수 있다.
영실의 동굴에서 본 나무꾼들에 대한 내용인데,
거친 가죽옷, 목화솜을 넣은 바지, 털가죽 모자, 귀덮개 등이 그것이다.
1937년 7월 한라산에 올랐던 이은상의 글에서는 화전민의 복장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
짐승의 가죽옷을 입고 쓴다고 했다.
몽골의 풍습과 다를 바 없어 유명한 구경거리가 되고 있다는 부연설명과 더불어.
당시 이은상은 시로미 열매를 따던 화전민의 딸을 만나 그 소녀의 안내에 따라 산을 내려왔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한라산을 오른 기록들을 보면 산행에 앞서 철저하게 한라산에 대해 공부했음을
알 수 있다.
기본적으로는 남명소승을 시작으로 읍지, 지지, 남사록, 충암기 표해록 등등 이전의 기록들을 철저하게
살핀 후 산행에 나섰다는 얘기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
요즘 산행에 나서는 여러분들은 어떠신지요?
* 강정효 / 사진작가 / 2012.08.27 - 제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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