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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지킴'(守吾齋記) / 정약용

아즈방 2022. 6. 22. 13:00

마음을 지킴 / 정약용


수오제(守吾齋)는 나의 큰 형님<정약현>께서 당신이 사시는 집에 붙인 이름이다.
나는 처음에는 그런 이름을 붙인데 대해 이렇게 의심을 하였다.
"물건 중에 나와 굳게 맺어져서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것으로는,

 마음<心>보다 더 절실한 것이 없으니,
 지키지 않는다 한들 어디로 가겠는가.

 이상하다 그 이름이여!"

내가 장기(長기)로 귀양온 이후 홀로 지내면서 조용히 앉아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그러던 중 어느날 어렴풋이 그 이름의 의문점에 대해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이 렇게 스스로 말하였다.
"대체적으로 천하의 물건은 모두 지킬 만한 것이 없고, 오직 마음만은 지켜야 한다.
 나의 밭을 지고 도망갈 자가 있겠는가?  밭은 지킬 만한 것이 못된다.
 내 집을 이고 달아날 자가 있겠는가?  집은 지킬 만한 것이 못된다.
 나의 원림(園林)에 있는 꽃나무, 과일 나무 등 여러 나무들을 뽑아갈 수 있겠는가?

 그 뿌리는 땅에 깊이 박혀 있다.
 나의 책을 훔쳐다가 없앨 수 있겠는가? 성경(聖經)과 현전(賢傳)이 이 세상 널리 퍼져 물과 불처럼 흔한데,

 누가 그것을 없앨 수 있단 말인가?
 나의 의복과 나의 식량을 도둑질해 가 나를 군색하게 할 수 있겠 는가?
 지금 천하의 많은 실이 모두 나의 옷감이며, 천하의 곡식이 전부 나의 식량인데,
 도둑이 비록 훔쳐간다 하더라도 그 한 둘에 불과할 것이니,

 천하의 모든 옷감과 곡식을 모두 바닥낼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모든 천하의 물건들은 지킬만한 것이 못된다.
 유독 마음이라는 것은 그 성품이 달아나기를 잘하여 드나듦이 일정하지가 않다.
 비록 친밀하게 붙어 있어서 서로 배반하지 못할 것 같으나,
 잠깐이라도 살피지 않으면 어느 곳이든 가지 않는 데가 없다.
 이익과 작록이 유혹하면 그리로 가고, 위엄과 재화가 위협하면 그리로 간다.
 질탕한 상조(商調)나 경쾌한 우조(羽調)의  흥겹고 고운 소리를 들으면 그리로 가고,
 새까만 눈썹에 흰 이를 가진 아름다운 미인을 보면 그리로 간다.
 그리고 한번 가면 되돌아 올 줄을 몰라 붙잡아도 만류 할 수가 없다.
 그러니 끈으로 잡아 매고 빗장과 자물쇠로 잠가 굳게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잘못 간직하여 마음을 잃은 자이다.

어렸을 때, 과거(科擧)가 좋다는 것을 알고,

그 쪽으로 가서 과거 공부에 푹 빠졌던 것이 10년이었다.
그 결과 마침내 처지가 바뀌어 조정의 반열에 서게 되자,
오사모(烏紗帽)를 쓰고 금포(錦袍)를 입고서, 대낮에 큰 길을 마친듯이 활보하였다.
그런지 이제 12년이다.
이제 또 처지가 바뀌어 한강을 건너고 조령(鳥嶺)을 넘어 친척을 이별하고,

선영 산소를 버려둔 체, 곧바로 동해 바닷가의 대숲곳에 달려 와서 머물러야 했다.
나는 그제서야 땀을 흘리며 두려워 숨을 죽이면서 허둥지둥 마음의 자취를 따라 함께 이 곳에 오게 되었다.
나는 마음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자네는 어찌하여 이 곳에 왔는가?
 여우나 도깨비에게 홀려서 온 것인가?
 아니면 바닷귀 신에게 불려 온 것인가?
 자네의 집과 고향이 모두 초천(苕川)에 있는데,

 어찌 그 본고향으로 돌아가지 않는가?"

그러나 마음은 멍하니 움직이지 않고 돌아갈 줄을 몰랐다.

그 얼굴빛을 보니 어딘가에 얽매인 곳이 있어서 돌아가고자 해도 돌아갈 수 없는 듯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붙잡아 함께 머물렀다.

이 때에,

나의 둘째 형님 좌랑공(佐郞公 : 정약전)께서도 역시 당신의 마음을 잃었다가,
그 마음을 쫓아 남해 지방으로 오셨는데,
또한 그 마음을 붙잡아서 함께 그 곳에 머물러 계셨다.

그러나 유독 나의 큰 형님만은 당신의 마음을 잃지 않고,

'수오재(守吾齋)'에 편안히 단정하게 앉아 계시니,
어찌 본디부터 지킴이 있어 마음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큰 형님께서 당신의 집 이름을 그렇게 붙인 까닭인 것이다.

큰 형님께서는 늘 말씀하시기를,
"아버지께서 나에게 '태현(太玄)'이란 자(字)를 지어 주셨다.
그래서 나는 오직 나의 '태현' 을 지키려고 이것을 내 집의 이름으로 붙인 것이다." 라고 하시지만,

이것은 핑계대는 말씀이다.
맹자(孟子)가, "지킴이 무엇이 큰가?  몸을 지키는 것이 제일 크다." 하였으니,
진실하다 그 말씀이여!

丁若鏞 (1762-1836)
자는 미용(美鏞), 송보(頌甫).
호는 다산(茶山),삼미(三眉), 여유당(與猶堂), 사암(俟菴), 자하도인(紫霞道人) 등.
본관은 나주. 시호는 문도 (文度).
정조 13년(1789) 전시에 입격한 후 사간, 동부승지, 병조참의 등을 역임하며,

정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순조 1년(1801) 신유박해 때 천주교인으로 지목되어 장기로 유배되고,
이어 '황사영백서사건'으로 강진으로 이배,
그 곳 다산 기슭에서 18년간 유배생활을 하면서 광범한 학문을 쌓고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이 글은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가운데 시문집 권13 기(記)에 수록되어 있으며,

원제는 [수오재 기(守吾齋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