廣文者傳 / 박지원
광문은 거지였다.
일찍이 鐘樓(종로) 거리에서 빌어먹고 살았는데, 여러 거지들이 그를 두목으로 추대하였다.
그리하여 다른 거지들이 밥을 빌러 나갈 때 그는 그들의 소굴을 지키는 일을 맡았다.
어느 추운 겨울 날이었다.
다른 거지는 모두 밥을 빌러 나갔으나 거지 아이 하나가 몸이 몹시 아파서 그들을 따라가지 못하였다.
그 아이는 자리에 누워서 고통을 참지 못하여 신음하고 있었다.
그를 간호하던 광문은 가까운 거리로 나가서 우선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빌어다가 병든 거지 아이를
먹이려고 했는데, 광문이 음식을 빌어 돌아왔을 때 그는 이미 죽어 있었다.
나중에 밥을 빌어 온 거지들은 그 거지 아이가 죽은 것을 보고 광문이 죽였다고 생각하고는,
광문을 둘러싸고 몰매를 때렸다.
광문은 거기에 더 견뎌 내지 못하고 밤중에 쫓겨나고 말았다.
그는 추위를 피하기 위하여 마을 안으로 들어가 어느 집에 들어갔더니, 그 집 개가 몹시 짖었다.
그는 그 집 주인에게 붙잡혀 도둑으로 몰려 새끼줄에 꽁꽁 묶였다.
광문은 애걸하였다.
"저는 도둑이 아니에요. 거지들한테 몰매를 맞고 도망 온 겁니다.
제 말을 못 믿겠거든 내일 아침에 저를 따라와 보세요."
주인은 그의 말이 순박한 것에 감동하여 그를 헛간에 재운 뒤에 새벽에 놓아 보내었다.
광문은 고맙다고 인사를 한 뒤에 떨어진 돗자리를 하나 달라고 부탁하였다.
주인은 그에게 돗자리를 내주고는 그의 뒤를 따라가 보았다.
그 때 여러 거지들이 죽은 거지의 시체를 끌고 와서 청계천의 水標橋 다리 밑에 던지고 갔다.
그것을 본 광문은 그 다리 밑으로 내려 가서 그 시체를 자리에 말아서 싸 가지고 둘러 업더니,
그것을 西郊의 공동 묘지로 가져가 묻어 주었다.
그리고 한편으로 울면서 한편으로는 넋두리를 하였다.
이 광경을 본 주인은 그를 불러 놓고 사연을 물어 보았다.
광문은 그간의 일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그러자 주인은 광문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와서 옷을 주어 갈아입게 한 뒤에 다시 그를 부잣집인 약방에
심부름꾼으로 취직을 시켜 주고, 그의 신원 보증도 서 주었다.
얼마쯤 지난 뒤에 약방 주인은 외출을 할 때쯤에는 늘 약방 안을 유심히 둘러보고 또 귀중품을 넣어 놓는
궤짝의 열쇠를 확인하곤 하였다.
그리고는 광문을 보고 무어라고 말을 하려다가 그만두곤 하였다.
광문은 주인이 자신을 의심하고 있다고 느꼈으나 그 원인은 알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냥 말없이 일만 부지런히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약방 주인의 처조카가 돈을 가지고 돌아와 주인에게 말하였다.
"며칠 전에 제가 돈을 꾸러 왔었는데 마침 이숙(姨叔)께서 출타 중이셔서 급한 김에 방에 들어가서
그냥 돈을 가져 갔었습니다. 이숙께서는 혹시 그 사실을 알았습니까?"
주인은 그제야 자신이 광문을 의심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광문에게 사과하였다.
"얘야! 내가 참으로 졸장부다. 공연히 너같이 착한 사람을 의심했단다. 너를 볼 면목이 없구나."
그는 이 사실을 자신의 친지들에게 이야기하고,
그 친지들은 그 말에 살을 붙여 더욱 광문의 훌륭한 점을 칭찬하니,
소문은 금세 서울의 큰 부호들이나 상인들에게까지 퍼지고,
이어서 조정에 출입하는 높은 벼슬아치들에게까지도 자자해졌다.
그리하여 그에 대한 일화는 양반 귀족들의 잠자리에서까지 오르내리곤 하였다.
이렇게 광문이 옛날 훌륭한 사람들보다 더 과장되게 알려지자 이제는 그를 약방에 추천해 준 주인까지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이 있음을 칭찬받게 되고,
다음으로는 그 약방 주인도 훌륭한 사람이라고 그 명성이 온 서울에 알려졌다.
당시에 서울에서 돈놀이를 하는 자들은 주로 머리 장식품인 옥이나 비취 또는 의복이나 그릇 종류
아니면 종이나 땅문서를 저당 잡고 돈을 빌려 주었는데,
광문이 보증을 서 준다고 하면 채권 유무를 따지지 않고 단번에 천금을 내어 주기도 하였다.
광문의 사람됨을 따져 보면 얼굴도 매우 볼썽 사납게 생겼고, 사람을 사로잡을 만한 말재주도 없었다.
게다가 입은 커서 주먹이 두 개씩은 들락날락할 정도인데,
그는 특히 마당놀이인 曼碩놀이(요즘의 가면극 같은 놀이의 일종)나 철괴(鐵拐)춤을 잘 추었다.
당시 아이들이 서로 헐뜯고 욕할 때 "얘, 네 형이 達文이지." 하곤 했는데,
달문이는 곧 광문의 다른 이름이었다.
광문은 길을 가다가 싸움하는 이를 만나면, 자기도 옷을 벗어부치고 함께 달려들어 싸울 듯 하다가는
갑자기 벙어리처럼 뭐라고 입속으로 웅얼거리며 땅에 엎드려 금을 그어 놓고 무엇인가 시비곡직을
판단하려는 시늉을 한다.
그러면 거기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모두 웃게 되고 싸우던 사람들도 어쩔 수 없이 따라 웃어,
자신도 몰래 분한 마음이 풀어져 버려 싸움이 끝난다.
또 광문은 나이 사십이 넘도록 머리를 땋고 다녔다.
사람들이 장가를 가라고 하면 그는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얼굴이 아름다운 사람을 구하는 것은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도 마찬가지예요.
그런데 나같이 못생긴 사람이 어찌 장가를 갈 수 있겠어요."
그리고 사람들이 집을 마련하여 살림을 하라고 하면 그는 또 이렇게 말하였다.
"나에게는 부모 형제나 처 자식도 없어요.
게다가 아침에 노래를 부르고 나갔다가 저녁이면 부잣집 문간에서 잠을 잡니다.
우리 서울에 집이 8만 채인데 내가 매일 한 집씩 옮겨 다니며 자도 내 한 평생에 그 많은 집을 다 돌아
다니며 잘 수 없을 거예요."
이 때 한양에 있는 이름난 기생들은 아무리 아름다워도 광문이 소문을 내주지 않으면 유명해지지 않았다.
언젠가 서울에서도 유명한 한량들인 羽林의 무관들 그리고 여러 궁전의 別監들과,
임금의 사위인 駙馬都尉들이 종을 거느리고 옷소매를 휘저으며 이름난 기생 雲心을 찾은 일이 있었다.
그들은 마루 위에 앉아 술을 따라 놓고 비파를 뜯으며 운심에게 춤을 추라고 하였다.
그러나 운심은 짐짓 사양하면서 춤을 추지 않았다.
이 때 광문이 마루 밑에서 서성거리다가 마루에 성큼 올라와 상좌에 앉았다.
광문의 옷은 남루하고 행동은 거칠었지만 그의 의욕은 양양자득하였다.
눈꼬리에는 눈곱이 끼고 술 취한 듯한 목에서는 연해 딸꾹질이 났다.
염소털 같은 머리를 등쪽에 틀어 돌린 것을 본 사람들은 그를 당장에 두들겨 내쫓고 싶어하였다.
그러나 광문은 개의치 않고 오히려 앞으로 다가앉아 무릎을 치며 곡조에 맞추어 콧노래를 불렀다.
그러자 운심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 광문을 위하여 칼춤을 추었다.
드디어 온 좌석은 기쁨으로 가득찼고 그들은 광문과 벗을 삼기로 한 뒤에 헤어졌다.
-『燕巖集』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조선 후기 소설, 철학, 천문학, 병학, 농학 등 광범위한 영역에서 활동한 북학의 대표적 학자.
자는 仲美, 호는 燕巖(연암).
1780년 연행에서 접촉한 청의 문물은 그의 사상체계에 큰 영향을 주어,
인륜 위주의 사고에서 이용후생 위주의 사고로 전환하게 되었다.
귀국 후 저술한 〈열하일기〉는 〈호질〉·〈허생전〉 등의 소설도 들어 있고,
중국의 풍속·제도·문물에 대한 소개·인상과 조선의 제도·문물에 대한 비판 등도 들어 있는
문명비평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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